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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애국열사 고 류낙진 선생 추모게시판

작성일 2005.04.07 작성자 대외협력 조회수 9099
위 링크를 누르시면 추모홈페이지와 장례위원 명단 자료 등을 보실 수 있습니다.





제목 없음

































"정말 자랑스런 아버님을 가졌습니다"
src="http://www.tongilnews.com/images/main/subtitle_pic.gif"> 통일애국열사 류락진 선생 민족통일장 엄수
style="BORDER-TOP: rgb(152,152,152) 1px dashed; BORDER-BOTTOM: rgb(152,152,152) 1px dashed"
vAlign=bottom align=left width=350> 
style="BORDER-TOP: rgb(152,152,152) 1px dashed; BORDER-BOTTOM: rgb(152,152,152) 1px dashed"
vAlign=bottom align=right width=250>2005-04-05 오전 11:58:09   href="http://www.tongilnews.com/article.asp?menuid=101000&articleid=53514&email=Y"> src="http://www.tongilnews.com/images/sub/art_mail.gif" border=0>  href="http://www.tongilnews.com/article.asp?menuid=101000&articleid=53514&printflag=Y"> src="http://www.tongilnews.com/images/sub/art_print.gif" border=0>






















광주=김치관 기자( href="mailto:ckkim@tongilnews.com"> color=#0080ff>ckkim@tongilnews.com color=#0080f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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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 광주광역시 전남도청앞에서 통일애국열사 류락진 선생 민족통일장이
거행됐다.
사진은 이규재 장례위원장이 추도사를 하는 모습. [사진 - 통일뉴스 김도형
객원기자]
"저희 4남매는 정말 자랑스런
아버님을 가졌습니다. 아버님의 뜻을 따라 살겠습니다. 아버님 사랑합니다. 아버님 사랑합니다. 아버님 사랑합니다."


한평생을 조국통일의 길에 바치다 지난 1일 별세한 류락진 선생의 차남 식(40)씨가 영결식장에서 회한의 눈물을 흘리며 부친의 생애를 껴안자
참석한 유가족과 동지들이 눈시울을 붉혔다.


휴일인 5일 오전 8시 50분 광주광역시 전남도청앞 시민공원에서 '통일애국열사 류락진 선생 민족통일장' 영결식이 장례위원회(위원장 임방규,
이규재, 홍번) 주최로 250여명의 친지와 동료, 후배들이 참석한 가운데 엄수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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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결식장에는 250여명의 친지와 동료, 후배들이 참석했다.
[사진 - 통일뉴스
김도형 객원기자]
생전의 환한 미소가
담긴 고인의 영정과 '민중의 충복 신념의 강자, 통일조국에서 영생하소서'라고 쓰인 현수막이 영결식장 전면에 내걸리고 20여개의 만장과 '선생님의
조국통일정신 저희들이 이어가겠습니다'라고 쓰인 남총련의 현수막, 범민련남측본부를 비롯한 수십개의 단체와 개인이 보내온 화한들이 고인의 마지막
길을 호위하고 나섰다.



박상춘 범민련광주전남본부 사무국장의 사회로 진행된 영결식에서 이규재 장례위원장은 추도사를 통해 "선생님의 의로운 한 생을 되돌아보면 감옥
아니면 투쟁이셨다"며 "이땅에 점령군, 분단원흉 미군이 버티고 있는 한, 선생님의 주어진 시간, 모든 여력을 오직 조국해방, 조국통일에
쏟으셨다"고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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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민련북측본부와 해외본부, 6.15공동행사준비위 북측준비위에서도 조사가
전달돼
대독됐다. [사진 - 통일뉴스 김도형
객원기자]
이규재 위원장은 "우리는
반드시 미국을 이땅에서 몰아내고 6.15공동선언 완전 실현으로 우리 모두의 소원 조국통일을 기필코 이루고야 말겠다"고 다짐하고 "삼가
통일애국열사 류락진 선생님의 명복을 빈다"고 추도했다. href="http://www.tongilnews.com/librarycontent.asp?menuid=1&libraryid=8867">(범민련 남측본부 추도사 전문
보기)



김정길 광주전남통일연대 상임공동대표는 역시 추도사를 통해 "인생의 3분의 1을 징역에 갇혀 빼앗겨 버렸음에도 그 짧은 시간을 쪼개어
선생님은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세상에 남겨놓았다"며 "평소 당신이 좋아하시던 '이신작칙' 그 모습을 끝으로 저희 곁을 떠나셨다"고 애석해 했다.
(광주전남 통일연대 추도사 전문
보기)


대독된 범민련북측본부와 해외본부, '6.15공동선언 실천을 위한 남북해외 공동행사 북측준비위원회'에서 보내온 조사들도 한결같이 "류락진
선생은 조국통일에 한생을 바쳐온 통일애국자였다"고 회고하고 깊은 애도의 뜻을 전했다. href="http://www.tongilnews.com/librarycontent.asp?menuid=1&libraryid=8869">(해외와 북측에서 보내온 조사 전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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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남 진우씨가 무릎을 꿇고 회한의 눈물을 흘렸다.
[사진 - 통일뉴스 김도형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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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념의 강자' 비전향장기수들도 눈시울을 붉혔다. [사진 - 통일뉴스 김도형
객원기자]
유족을 대표해 인사말을 한
차남 식씨는 무릎을 꿇고 "아버지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마음을 아프게 한 것을 용서해달라"고 흐느끼며 "아버님이 얼마나 숨차게 살아오셨는지
오늘 새롭게 느꼈다"며 참석한 고인의 동료들과 후배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href="http://www.tongilnews.com/librarycontent.asp?menuid=1&libraryid=8870">(유가족 조사 전문 보기)



고인의 가장 절친한 동료이자 후배인 기세문 선생과 함께 호상을 맡은 이명한 광주전남연합 상임공동대표는 "닷새동안 이어진 위문의 행렬은
고인이 얼마나 고귀하고 아름다운 생애를 살다 갔는지를 증명하는 것이었다"며 "오늘 감격의 물결이 통일의 큰 강물이 되어 흐를 것"이라고
인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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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산에 눈나린다'가 울려퍼졌다. [사진 - 통일뉴스 김도형
객원기자]
영결식에서는 박종화 시인이
조시를, 희망새가 조가를 불렀으며 구정철 전농광주전남도연맹 부의장이 고인의 약력을 소개했다. 특히 희망새와 광주전남지역 문화패들이 함께 '태백산
빨치산가'로 알려진 '태백산에 눈나린다'를 합창해 고인이 걸어온 생을 돌이켜보게 했다. href="http://www.tongilnews.com/librarycontent.asp?menuid=1&libraryid=8868">(박종화 시인의 조시 전문 보기)



비전향장기수 기세문 선생은 "나하고는 청춘시대부터 같이 옥고를 치른 후 반세기에 걸쳐 조직적, 인간적으로 가까이 지낸 선배이고 동지"라며
"너무나 마음이 슬프지만 고인의 뜻을 이어서 부끄럽지 않게 살겠다고 결의한다"고 말하고 "고인의 명복을 진심으로 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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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향하는 가족들. [사진 - 통일뉴스 김도형
객원기자]
"고인과는 말할 수 없이
가족적으로 다 통했다"는 임민식 범민련 공동사무국 사무총장의 어머니 박경자(81)씨는 "진짜 통일을 염원하고 잘 받들었는데 조금만 더 계셨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고 추도하고, 아직 한국땅을 자유롭게 밟지 못하는 아들의 입국에 대해 "남북이 잘 대화가 이뤄지면 될 것"이라며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



영결식을 마친 운구행렬은 영정과 만장을 앞세우고 범민련광주전남본부 사무실을 거쳐 화장지인 영락공원으로 서둘러 향했다. 하관식은 경기도 파주
보광사에서 오후 6시경 진행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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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의 운구행렬은 범민련광주전남본부 사무실을 거쳐
영락공원으로 향했다. [사진 -
통일뉴스 김도형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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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ign=middle>유가족 조사
style="BORDER-RIGHT: rgb(102,102,102) 1px solid; BORDER-TOP: rgb(102,102,102) 1px solid; BORDER-LEFT: rgb(102,102,102) 1px solid; BORDER-BOTTOM: rgb(102,102,102) 1px solid"> face=굴림 color=#2f2f00 size=3>


오늘 저희 4남매는 사랑하는 아버님을 멀리 멀리 다시 뵙지 못하는 곳으로 보내야만 합니다. 저희 자식들보다 더욱 더 아버님을
아껴주시고 보살펴주시던 정말 고마운 분들이 오늘도 이렇게 많이 함께 해주시니 저희 4남매를 대신하여 먼저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마지막 가시는 길에 저희는 아버님을 편안히 가시도록 해야만 합니다.
좋은 세상을 만들어보고자 온몸으로 싸우며 살아오신
아버님이십니다.
그토록 보시고자 하신 좋은 세상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는데 저희들만 또 한번 덜렁 남겨두시고 이제 영영 가시려고
합니다.


아버님! 가시는 길에 저희는 묻고 싶습니다.
무엇이 아버님에게 어린 저희 4남매를 미뤄두고 그토록 험한길로 가시게
하셨었나요?
어린 저희 4남매보다 귀중했던 아버님의 그것은 무엇이었나요?
저희는 남들처럼 따뜻한 아버지의 품이 그리웠고 엄마 아빠
양손 잡고 토끼뜀을 뛰며 가는 아이들이 한없이 부러웠답니다.
이제 저희들도 다 자랐습니다. 저희도 엄마 아빠가 되었고 아버님을 이해하기
위해 수 없는 생각을 합니다.


아버님!
저희들은 아버님께 너무 많은 잘못을 하였습니다.
때로는 아버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여 아버님 마음 아프게 해 드린 것,
용서해주세요.
넉넉하지 못한 저희들의 좁은 소견으로 번번이 아버님 슬프게 해드린 것 용서해주세요.
허리가 아프셔서 잔뜩 구부러진 채
겨우 걸으셔야만 하셨을 때 제대로 부축 한번 못 해 드린 것 용서하세요.


연로하신 아버지 남겨두고 멀리 이국땅으로 떠나 버린 아버님의 마음에 텅 빈 한 구석을 만들어 드린 저희들의 불효를 용서해주세요. 뭐가
서먹했는지 힘껏 안아드려보지도 못했습니다. 숨이 차올라 호흡이 곤란할 때 아버지가 저희를 필요로 하실 때 저희는 자주도 그곳에
없었습니다.


아버님의 정과 사랑을 그토록 오랫동안 그리워했던 저희들이지만 정작 저희에게는 그 사랑을 받아드릴 가슴이 너무도 작았습니다.
어쩌면
저희는 너무나도 긴 세월동안 깊은 질투를 했는지도 모릅니다.


아버님!
못난 저희들의 모든 잘못을 용서하시고 편히 가십시오.
저희는 보았습니다. 그리고 확인하였습니다.
아버님의
동지들께서 아버님의 다른 아들 딸들이 저희 가족보다 더 많이 아버지를 아끼고 보살펴 주셨다는 것을!


저희보다 더 많이 더 깊은 사랑을 아버님께 베풀어주신 여러분들 앞에 저희는 너무도 부끄럽기만 합니다.
저희는 오늘 새롭게 느꼈습니다.
아버님께서 얼마나 열심히 아버님의 길을 숨차게 뛰어오셨는가를!
저희는 이제 아버님의 수 많은 동지들 앞에서 아버님의 인생을 다시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희는 자신있게 말합니다.


저희 4남매는 정말 자랑스러운 아버지를 가졌습니다.
저희 모두 아버님 높은 뜻을 기리며 열심히 살겠습니다.
아버님! 편히
가십시오. 


아버지 사랑합니다!
아버지 사랑합니다!
아버지 사랑합니다!


2005년 4월 5일 둘째 아들 류식 올림

(출처 : 시민의소리 href="http://www.siminsori.com">www.siminsori.com)



작성일자:2005-04-05 오전 11:58:09 / 수정일자:2005-04-05 오전
11:58:09  

 







<통일애국열사 류락진 선생께서 걸어오신 발자취>

1928년 8월26일(양력 10월9일) 전라북도 남원군 이백면 과립리에서 출생
1933년 부모와 함께 일본으로 이주
일본 사범학교 수학
1946년 2월경 고향으로 귀국
1950년 5월 국민대학 수학
1950년 6월 한국전쟁 시 군당 선전부 활동
1950년 9월28일 9.28후퇴 후 입산(순창, 회문산 등지)
1952년 3월 지리산에서 체포, 광주 포로수용소에 투옥
1952년 3월30일 피검 군법재판소에서 사형선고 받음
1952년 10월 민간재판소로 이양돼 광주지방법원에서 5년 선고
1957년 10월3일 출옥
1957년 신애덕 선생님과 결혼
1963년 혁신정당사건으로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 선고
1967년 집행유예로 출옥, 5년간 지방 사립학교에서 교편을 잡음
1971년 3월 호남통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체포, 서울지법에서 사형선고
1972년 대법에서 무기 확정
1989년 전주교도소로 이감
1990년 2월 20년 복역 후 감형 출옥(보안관찰 대상자 처분)
1994년 7월 구국전위사건으로 구속, 서울지법 무기선고, 서울고법 8년 선고
1999년 8월15일 비전향 출옥(보안관찰 처분 현재에 이름)
2002년 5월30일 광주지법, 백운산지구 위령비 비문 작성 사유로 불구속 입건
징역 8월, 집행유예 2년 선고(국가보안법 7조 위반)
2001년-2003년 범민련 남측본부 고문
2000년-2005년 현재 통일광장 임원
2005년 4월 1일 23시 45분 향년 78세로 영면

<생전 직업>
건축기사 자격취득(1964년)~건축공사 현장에 근무
중고등학교 교사근무 5년(1967년 말 경~1971년 3월)
서예가로서 서예지도를 해 오심

<서예전 출품 경력>
대한민국 미술대전 입선, 대한민국서예전 입선(서협)
대한민국서예대전 입선(미협), 한국미술협회 서예분과 회원
광주시 미술대전 추천작가, 전라남도 미술대전 추천작가
광주시미술대전 특선 3회 입선 7회, 전라남도미술대전 특선 3회 입선 7회
전국무등미술대전 입, 특선 8회, 국제서법예술연합 한국본부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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