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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이사람 이야기-단병호 민주노총 위원장 : 시련속에 강

작성일 2000.01.10 작성자 교육선전실
[이사람이야기] 민주노총 위원장 단병호




12년 동안 노동운동을 하면서 민주노총 단병호(段炳浩·51)위원장이 집에 들어가본 것은 1년이 채 되지 않는다. 그 나머지는 4차례 구속에 따른 수감과 수배생활 등으로 채워졌다. 그는 이같은 신산고초(辛酸苦楚)를 겪으면서 한국을 대표하는 노동운동가가 됐지만 그 계기는 실로 우연한 것이었다. 인간의 삶이 전적으로 자기 의지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그에게도 어김없이 적용된 것이다. 경북 포항의 외진 바닷가에서 출생한 그는 가정형편 때문에 다니던 상업고등학교도 중퇴하고 생업전선에 뛰어들었다.






생후 6개월만에 사망한 아버지 얼굴은 사진으로 기억해야 했고 홀어머니 밑에서 농삿일을 거들거나 행상을 하면서 먹고 살아야 했다. 그러다가 서울 여자와 결혼했고 2년 뒤 신혼여행때 들고갔던 가방 하나와 현금 10만원을 들고 서울로 올라왔다. 장모의 도움으로 동대문구 면목동에 반지하 방 한칸을 얻은 뒤 청량리 일대에서 1년간 행상을 했고 택시를 몰기도 했다.






“먹고살기 위해 안해본 일이 없다”고 그는 말했다.






1983년 드디어 안정된 밥벌이를 얻었다. 전신주나 건축용 말뚝을 만드는 공장인 (주)동아콘크리트에 입사해 불과 3년만에 작업 조장으로 승진할 정도로 일에 열심이었다. 이즈음 이 업체를 인수한 동아건설이 연말 상여금을 주지 않겠다고 했다. 노동자들은 파업을 벌였다. 작업조장인 그는 옆에서 지켜보고만 있었다. 너무나 무질서하고 세련되지 못한 파업이었지만 노동자들의 요구가 받아들여졌다. 이 우연한 파업이 그의 의식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면서 그를 늦깍이 노동운동가로 탄생시켰다. 이때 읽은 ‘전태일 평전’을 통해 수없이 울면서 노동운동을 시작하리라 마음먹었다. 노동조합에 관심을 갖고 혼자서 공부하고 뛰어다니면서 동아건설 창동노조를 설립했고 초대위원장을 맡았다.






이후 지역별로 노동조합을 연대하는 작업에 가담했고 서울지역노조협의회(서노협)를 결성했으며 제2대 서노협 위원장에 추대됐다. “전문적인 노동운동가가 되겠다는 생각은 전혀 없었습니다. 열악한 작업환경을 개선하고 노동자들의 권익을 좀더 찾겠다는 심정이었지요. 어쩌다가 오늘에 이르게 됐는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피할 수 없는 상황에 맞닥뜨릴 때 피해나가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그는 89년 서울지하철 파업때 ‘제3자 개입’으로 처음 구속되면서 감옥에서 또한번 인생의 전환점을 맞는다. “이때가 제 나이 마흔이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주민등록에 ‘빨간 줄’이 남게 되면 인생 끝난다는 두려움이 있었지요. 하지만 막상 투옥되자 앞으로 어떻게 살아나갈 것인지를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감옥은 제게 좋은 학교였습니다. 감옥이 없었다면 이렇게 살아올 수 없었을 겁니다”






90년 전국노동자협의회(전노협)가 결성되면서 그는 내리 4대까지 위원장을 맡는다. 지금은 ‘합리적’이란 이미지도 형성됐지만 단병호라는 이름 앞에 붙었던 ‘강경’의 고정관념은 그때 생겼다. 대규모 파업과 가두시위를 주도하고 수배와 구속이 잇따르면서 그는 ‘강경투사’로 대중들 속에 깊이 각인된 것이다.






이같은 강성이미지는 96년 민주노총이 처음 출범할 때 노동계의 주력부대인 금속연맹의 지지를 받고 있던 그가 초대 위원장을 양보할 수밖에 없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그는 지난해 진작 와야 할 자리였던 민주노총 위원장으로 마침내 되돌아왔다.






그가 3대 민주노총 위원장에 당선되자 당시 정부와 재계 일각에서는 내심 반가운 뜻을 나타냈다. 이같은 반응은 우선 그가 “대화가 되는 인물”이라는 데서 비롯된다. 노사관계를 담당하는 이들은 그동안의 경험을 통해 단씨의 유연한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투쟁을 해야 할 때는 투쟁으로, 대화로 풀 수 있을 때는 대화를 선택하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저에 대한 강성이미지는 전노협 시절에 생긴 것인데 그때는 무조건 탄압만 했어요. 대화 자체가 불가능한 시절이었지요” 세속적으로 보면 그는 ‘벼락출세’를 했다. 평범한 행상 또는 노동자에서 한국 노동계를 양분하는 조직의 최고책임자가 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달라진 게 없다고 말했다. 여전히 양복보다는 점퍼가 어울리며 깡마른 체구에 웃으면 잇몸이 다 드러나보이는 이웃집 구멍가게 아저씨 같은 그는 지난 연말을 국회 앞에서 동지들과 함께 천막농성으로 지샜다. 그의 ‘너무나 노동자 같은’ 인상 때문에 단위사업장 노동자들은 처음에 조심스러워 하다가도 금방 스스럼없이 그에게 다가오곤 한다. 어떻게 보면 노동운동을 위해 타고난 자산인 셈이다.






그런 그도 호되게 한번 당했다. 지난해 파업유도사건의 강원일 특별검사 사무실을 방문했다가 빚어진 ‘욕설사태’는 자신을 돌아보게 만든 계기가 됐다.






“정말 혼났어요. 언론이 과정은 빼고 그 모습만 보도해 억울한 점이 없지 않습니다만 어쨌든 잘못된 것은 인정합니다. 민주노총이 합법화 이후 좀더 성숙한 모습을 가지라는 채찍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새천년은 그에게 어떤 의미를 갖고 있을까.






“이제 60만 민주노총 조합원만의 사업이 아니라 근로시간 단축 등 전체 1천3백만 노동자들의 요구를 신장시키는 데 역점을 둘 계획입니다. 특히 제도적으로 대우를 못받고 있는 임시직 노동자들의 권익을 보호하고 기층민중들의 삶을 개선시키기 위한 사회개혁에도 나서야 합니다. 민주노총 내부적으로도 정책기능을 보다 강화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또 재정자립을 위한 노력도 기울여야겠죠. 총선이 눈앞에 닥쳤으니 정치활동도 활성화해야겠고요…. 참 이 이야기는 집사람에게 전해주기 위해 꼭 해야겠습니다. 이번 입시에 딸이 특차로 합격했습니다. 모두 아내가 고생한 덕분입니다”






〈정인화기자 jihra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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