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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보도

[배태선 전 조직실장이 박근혜 탄핵을 지켜보며 보낸 옥중서신]

작성일 2017.03.21 작성자 교육선전실 조회수 858
잘 지내시는지요? 배태선입니다.
봄날 아침이네요. 신도 쉬기를 허락한 일요일인데 생각이 많아집니다. 
기결수들이 출역을 나가는 평일에 비해 휴일 아침은 다소 소란한데, 오늘은 다들 흔쾌히 봄의 서정에 잠겼는지 고요합니다. 
딱 좋은 시간입니다.

지난 월요일은 햇살이 온통 퍼져 방 안은 덥기까지 해서 겨울 티셔츠를 벗어던지고 반팔티에 관복을 입고 운동장에 나섰습니다. 
상쾌했어요. 그러나 섣불렀습니다. 
자연이 당당하다고 하여 따라 나섰다가 감기가 들어 콧물만 내내 훌쩍였습니다. 
자신의 상태를 충분히 살피지 못하고 분위기에 취해 움직이면 몸 상하고 기운만 버린다는 교훈을 얻었습니다.

박근혜가 파면되고 삼성동의 제 집으로 들어가는 장면을 티비로 봤습니다. 
상상 밖의 풍경이었습니다. 
하긴 뭘 해도 상상 그 이상이었으니. 소위 친위대라 불리는 그들의 퇴행 또는 반동을 보면서 적폐의 뿌리는 깊고도 질기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한국 사회의 양극화는 비단 자산과 소득뿐 아니라 이념적 또는 정서적 측면에서 더 심각하고 비극적입니다. 
스스로의 존엄을 믿지 못하는 이들의 소외감이 정치적 기형아를 낳고 있는 게 아닐까 싶었습니다. 
불안했습니다.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생태적, 변혁적 지향과 전망을 갖지 못하면 우리도 비슷한 굴곡에 처하게 될 수 있다는 생각이 이어져 더욱 그렇습니다. 
평등과 더 나은 세상을 위한 연대를 말하면서 실제 우리의 몸은 한 곳에 정지된 채 엉거주춤 하고 있지는 않은지 되묻게 됩니다. 
열 발을 내딛어야 할 때, 반 걸음밖에 나가지 못하면서 열 사람의 한 걸음을 위해서라 핑계대는 건 아닌지 곰곰히 생각해봅니다. 
파격적 상상과 진취적 실천이 간절한 때입니다. 
지금이야말로 정세를 앞서기 위해 전력질주 해야할 시기가 아닐까 합니다.

3월 한달을 사고의 방황 속에 지냈습니다. 
실천의 뿌리가 약한 때문인지 모이기보다 자꾸 흩어져서 스스로 책망하기도 합니다. 
책 안에서 길을 찾고 싶은 갈망에 빠진 적도 있지만, 책 안의 길도 워낙 여러 갈래라 저같은 길치는 헷갈리면 나오기도 쉽지 않습니다.
결국 길은 여럿이 함께 지향을 향해 가면서 만들어지는 것이 맞는 모양입니다. 
민주노조는 그런 의미에서 조합원 안에서 길을 묻고 길을 찾는 훌륭한 조직적 기초입니다. 
이것이 무너지면 다 무너지는 것이지요.
곧 4월입니다. 대선이 본격화되는 때입니다. 
한겨울 내내 '박근혜 없는 세상, 적폐없는 세상'을 외치며 촛불을 들었던 시민들이 만든 공간입니다. 
민주당은 이미 계 탄 분위기네요. 열심히 곗돈 부은 사람들은 따로 있는데 말입니다. 
이 정치적 대표성의 불일치를 좁혀나가는 게 우리의 역할이고 과정으로서의 정치세력화라고 생각합니다.

위원장과 저는 4월에 형이 확정되어 기결이 됩니다. 
그간 매일 면회를 조직하고 면회를 다니느라 고생하신 동지들 정말 고맙습니다. 
경북본부 동지들, 특히 먼 길 면회 다니고 마음 써줘서 고맙습니다. 
춘천으로 오면서 강원본부 동지들이 여러모로 신경 써주신 거 깊이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늘 안타까운 눈빛으로 우리를 보시는데, 여기 그렇게 못 있을 곳은 아닙니다. 
여름을 제외하면 나름 계절마다 특색도 분명하고 밖에서 정신없이 일할 때는 느끼지 못하는 자연의 변화를 그야말로 세밀하게 체감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자연친화적 환경에 놓여보는 보기 드문 기회이지요. 
물론 적극 권할만큼은 아닙니다.

21일 박근혜가 검찰에 불려가네요. 
그 걸음이 교도소로 직행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최소한 지 입으로 떠들었던 '책임'을 일부라도 지는 게 됩니다. 
서울구치소 여사에 독방은 1사에만 있는데 최순실에 상에 있으니 박은 하 15방쯤 들어가겠네요. 
낮에는 고함이, 밤에는 비명이 종종 울리는 곳이니 귀마개는 일찍 주문하는 게 좋겠다는 꿀팁도 아울러!

구속된 1년 2개월의 시간 동안에도 세상에 대한 분노와 걱정은 마모되었다가 쌓이기를 반복했습니다. 
더불어 무얼 해야되는지 궁리하고 모색하기도 했습니다. 
당장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지만, 그건 별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때가 되면 할 수 있을테니 말입니다. 
저는 그때를 기다리고 동지들은 그 때에 서있습니다. 
서로 최선을 다하고서 만나기를 바랍니다. 
건강하십시오. 힘껏 응원하겠습니다. 
새로운 에너지를 담장 밖으로 팡팡 날립니다. 받으소서.

2017.3.19. 배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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