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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보도

<노동과세계> 진보정당의 도전사

작성일 2000.02.02 작성자 노동과세계 조회수 4438
<진보정당의 도전사>




남은건 민주노총의 실천 뿐




'진보당' 이후 실패와 좌절 거듭


분단이데올로기가 강요하는 취약한 대중기반이 원인





분단체제가 강요하는 뿌리깊은 피해의식과 폭압적인 군화발 아래 40여년.


진보정당이 실패와 좌절을 거듭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로 꼽는 상황이다. 그 속에서도 이 땅의 노동자와 민중, 그리고 진보적 지식인들은 이같은 현실을 뒤엎을 대안으로 진보정당을 제기해왔다.




남한사회에서 진보정당이 뿌리내리기 어려웠던 역사는 최초의 진보정당인 '진보당'의 운명과 궤를 같이한다. 저 유명한 조봉암을 당수로 하는 진보당은 56년 1월에 창당준비위가 구성됐고 같은 해 대통령 선거에서 조 후보가 2백16만표를 얻는 성공을 거둬 11월 창당됐다. 그러나 평화통일을 내세운 통일정책을 빼고는 정책에서 당시 보수정당과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주로 조봉암 개인의 정치력에 바탕을 둔 상층연합의 성격이 짙어 대중적 기반이 취약했다. 이 때문에 58년 1월 이승만 정권의 음모와 탄압으로 조봉암이 검거되자 두 달만에 무너졌다.




이후 지난 40여년 동안 우리나라 진보정당은 진보당이 드러낸 '미미한 대중적 기반'이라는 한계를 넘어서지 못한 채 명멸을 거듭했다. 57년 민주혁신당, 60년 4월혁명 직후의 사회대중당, 한국사회당, 사회혁신당, 통일사회당 등이 별다른 실천력을 보여주지 못한 채 고질적인 분파대립을 겪다가 60년 7월29일 총선에서 참패한 뒤 61년 군사쿠데타로 무너졌다.




67년 통일사회당, 81년 민주사회당, 82년 신정사회당, 85년 사회민주당 등이 혁신정당을 표방하며 깃발을 올렸으나 이들은 과거의 진보정당운동과는 단절된 흐름이었다.




이처럼 어둠속에 갇혔던 진보정당운동에 빛을 선사한 것이 바로 87년 6월 민중항쟁. 87년 13대 대통령선거에서 백기완 후보를 무소속으로 출마시킨 진보진영은 88년 13대 총선을 앞두고 '민중의 당'을 창당했다. 의석을 단 한 석도 얻지 못해 50여일 만에 문을 닫았지만 16명의 국회의원 후보를 냈고, 평균 4.3%의 지지를 얻어 잠재된 가능성을 보였다. 같은 해 4월 창당한 한겨레민주당도 63개 지역구에 2천여명의 당원을 모으는데 그쳤고, 전국득표율도 1.28%에 그쳤다.




이어 88년 9월 민중의 당과 한겨레민주당이 통합하고, 이들과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일부가 모여 90년 11월 민중당이 출범했다. 91년에는 합법적인 노동자정당 건설을 목표로 하는 한국노동당창당준비위원회가 결성돼 92년 14대 총선을 앞두고 민중당과 통합했다. 그러나 민중당 또한 단 한석도 얻지 못해 해산되는 비운을 겪었다. 이후 98년 청년진보당이 깃발을 올릴 때까지 남한사회에서 진보정당은 존재하지 않았다.




지난 97년 10월 권영길 후보의 대통령선거대책본부로 결성된 국민승리21이 모태가 돼 2000년 1월31일 출범한 민주노동당은 역사속으로 사라졌던 과거의 진보정당과는 다른 배경을 갖고 있다. 97년 노조 정치활동 금지조항이 풀렸고, 노동자 대중조직인 민주노총이 최고 의결기구인 대의원대회를 통해 당원확보와 정치자금 모금을 결의한 바 있다. 이같은 결의에 따라 민주노총 주요간부와 활동가들의 실천이 얼마나 구체적으로 진행되느냐가 진보정당의 성패를 가름할 열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경은 joungke@kctu.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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