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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보도

징역살이는 마라톤 같았습니다. 함께 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잘 지내지요? 배태선입니다.

610일입니다. 항쟁의 아침을 맞는 기분이 남다릅니다.

30년 전 오늘, 저는 몇 주째 계속되는 가두투쟁에 나설 채비로 신발 끈을 다시 조여 매고 있었을 겁니다. 제 기억은 이날을 넘어 바로 달 포 뒤 공장 안에서 맞이한 87년 노동자 대투쟁의 한 가운데에 서 있습니다.

 

점심시간이었습니다. 700여명의 20대 초반 여성노동자들이 일하던 현장은 닫힌 동굴처럼 캄캄했습니다. 굳게 닫혔던 조립식 철문이 열리고 빛이 쏟아져 들어오던 그 공간에 갑자기 내걸리던 현수막. “민주노조 건설하여 인간답게 살아보자!”였습니다.

눈이 휘둥그레지는 것도 잠시, 쿵쾅거리며 가슴이 뛰기 시작했습니다.

꿈에도 그리던 노조결성의 순간이, 굴종이라고 밖에 느껴지지 않던 노동자 계급의 분노가, 혼자가 아니라 계급의 힘으로 터져 나오는 것을 내가 함께 겪고 있었습니다.

노동자 대투쟁! 그 뜨거운 체험의 순간에 서 있다는 감동으로 전율했습니다.

이날 저는 평생 잊지 못할 노동자 계급의 기세를 봤습니다.

이 역사적 세례는 이후 30년 동안 저를 지탱하는 힘이 됐습니다.

 

67일부로 기결이 됐습니다. 712일이 만기일입니다. 정말 얼마 안 남았네요.

기결이 됐다고 해서 달라진 건 별로 없습니다. 그저 관복이 바뀌었을 뿐. 기결 통보를 받는 순간 홀가분했습니다. 다만 한상균 위원장과 손잡고 같이 나가기로 한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된 것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숙제를 끝내지 못하고 잠자리에 든 기분이었습니다.

 

지난 15개월을 돌아보면 대체로 평안하고 무탈했습니다.

원래 감정의 기복이 없는 편이라 큰 어려움과 동요 없이 지냈습니다.

제일 힘들었던 시간은 백남기 농민이 돌아가셨을 때였습니다. 제 감정은 아득한 무기력감과 처연한 서러움 사이를 오갔으며, 제어할 수 없는 적개심과 분노에 시달렸습니다.

이 시기를 견디게 한 힘은 온전히 온 몸을 던져 살인정권에 맞서 싸운 백남기대책위와 여러 동지들의 헌신과 투쟁이었습니다.

사실 박근혜 정권은 이때 이미 폭력성을 여과 없이 드러내는 무리수를 두면서 말기적 징후를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정세의 반전은 이 투쟁에서 예고되고 있었습니다.

 

201511월 민중총궐기로 인한 징역살이는 마라톤 같은 거였습니다.

정권에 의해 징발된 동지들이 줄지어 함께 뛴.

한상균, 박준선, 이재식, 조성덕, 이현대, 이종화 동지는 이 구간을 저와 함께 뛴 동지들입니다. 저는 구속 당시 에이 씨하면서도 어차피 뛸 거면 쪽팔리지 않게 잘 달리자딱 이랬습니다. ㅎㅎ

 

마라톤처럼 징역도 체력과 의지가 없으면 대단히 힘겹습니다.

숨이 가쁘고, 다리가 후들거려 주저앉고 싶은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뛰면서 호흡을 가다듬고 폐활량을 늘이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뛸수록 다리에 근력이 붙는 체험은 나쁘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달리는 중간 중간 건강한 모습으로 완주하고 출소하는 동지들을 보는 것도 위안이 됐습니다. 힘들 때마다 동지들의 응원이 가장 큰 힘이 됐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특별히 기억에 남는 것은 촛불이 타오르기 시작하면서 마라톤을 하는 사람과 응원하는 사람의 위치가 뒤바뀌었다고 느꼈던 점입니다.

이 때는 바깥의 동지들이 촛불을 들고 종횡무진 달리기 시작했고 저는 열심히 응원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기분이 희한했습니다.

정말 잘 뛰어주기를 얼마나 혼신의 힘을 다해 응원했는지 모릅니다.

응원도 상당한 체력을 요하는 것이더군요. ㅎㅎ

 

정권이 바뀌었습니다. 여러 시각과 의견들이 분분할 때이지요.

그러나 정권을 어떻게 규정하느냐 보다 중요한 문제는 민주노총의 역할과 지향을 어떻게 설계하고 조직해 나가느냐라고 생각합니다.

노동의 미래는 모든 동지들의 고민이지요.

저는 조직률 30%는 더 이상 머뭇거릴 수도 없는 과제라 생각합니다.

확대된 조직률을 바탕으로 가난과 실업, 불평등에 맞서는 민주노총으로 한국 사회의 왼쪽 날개임을 자임해야 합니다.

노동이 아니면 이 역할을 누구도 대신할 수 없습니다.

민주노총은 세상을 더 평등하게 만들 임무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출소가 한 달쯤 남았습니다.

남은 시간은 마라톤이 아니라 동네 공원을 산책 나온듯한 걸음걸이로 감옥 생활을 음미해 볼 생각입니다.

감옥에서의 시간도 귀하고 중했습니다. 함께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남은 기간 동안 오감을 열어 잠든 감각을 깨우려 합니다.

소소한 사유의 즐거움을 만끽하며 지내겠습니다.

(약간 버거운 과제로 여겨지긴 하지만) 깊은 감성이 자리할 여백을 만들고 싶습니다.

무엇보다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동지들을 만날 준비를 하겠습니다.

 

잘 지내다 가겠습니다. 건강하십시오. 투쟁!

 

2017년 6월 10일

춘천교도소

배태선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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