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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통신] 동일방직, 그 후 30년

작성일 2006.05.11 작성자 여성위 조회수 2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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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주주의가 이루어졌다고?"  
  [전태일통신 35] 동일방직, 그 후 30년
  동일방직 노동조합운동 이야기가 여성 영상집단 움에 의해 만들어지기 시작한 지 1년만에 『우리들은 정의파다』라는 제목으로 여성영화제에서 상영이 되었다.
  
  1978년 민주노조를 했다는 단지 그 이유 하나만으로 우리들 124명이 집단으로 쫒겨난 지 28년. 화면으로 나오는 우리들의 이야기를 보면서 나는 음식을 먹고 체한 것처럼 다시 가슴이 울렁거렸고 우리들의 20대에 겪은 부당한 일들이 하나둘 떠올라 불꽃에 녹아 촛물이 흘러내리듯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나뿐이 아니고 영화를 함께 관람한 해고자들과 관객들 모두가 놀라움과 충격으로 대부분이 나처럼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어떤 젊은 친구는 커다란 돌망치로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것같은 충격을 받았다고도 하였다.
  
  최초의 여성지부장 탄생…민주노조의 기틀을 잡다
  
  내가 해고당한 동일방직 회사의 당시 현장 작업조건은 그야말로 사람이 일하는 그런 곳이 아니었다. 1분간에 140 걸음을 걸어야 하는 표준동작은 기본이었다. 생각해보라. 거대한 방직기가 끝도 없이 늘어선 밀폐된 작업장 안에서 실을 만들기에 적당한 온도 섭씨 32도를 훌쩍 넘은 더위 아래 한여름에도 휘날리는 솜먼지를 뒤집어쓰고 단 1초도 숨돌릴 틈 없이, 눈코 뜰 새 없이 땀에 절어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십대, 이십대 젊은 여성들을. 하루 3교대 8시간 노동이었지만 작업시간에는 식사시간도 없었다. 무좀과 위장병은 다반사였고, 폐병 또한 흔하디 흔한 병이었다. 이런 조건을 개선하고자 노동조합이 법으로 정해져 있지 않은가. 우리는 그나마 법에 나와 있는 최소한의 노동자 권리를 되찾고자 했을 따름이었다.
  
  동일방직 노동조합은 1972년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여성지부장이 선출되면서 민주노조의 기틀을 다지기 시작했다. 여성중심의 노동조합 집행부가 구성되면서 산업선교회와 천주교회를 중심으로 조합원들이 그룹 활동을 하며 노동법과 노동의 역사를 공부하고, 노동자의 삶이 무엇인지 고민하며 깨닫게 되어가는 것은 그러므로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문제는 이런 지극히 당연한 공부와 이른바 '의식화'였다. 그러다보니 조합원들이 시키는 대로 묵묵히 일만 잘하는 순종이 아름다운 미덕이라며 배웠던 권위적인 틀을 과감히 깨고 부당한 행위를 거부하는 불복종운동에 나서게 되었고, 노동자는 기계가 아닌 사람이라며 인간답게 살아 가기 위한 희망으로 노동조합운동을 펼치게 되었던 것이다. 노동운동은 우리들에게는 고단한 노동으로 지친 몸과 고향을 떠난 외로움을 극복하는 생명수같은 삶의 활력소였다. 실제로 조합원들의 폭발적인 참여를 무기로 노동조합이 적극 단체행동에 나서면서 동일방직의 근로조건은 비약적으로 개선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주변의 노동자들은 동일방직 노동자들을 부러워 할 정도가 되었으며 동일방직에 입사하기 위해 '빽'을 쓰려는 여성노동자들이 줄을 이을 정도였다.
  
  이렇게 되자 회사와 당시 박정희 유신정권의 동일방직 민주노조 파괴 시도가 본격화되었다. 대의원들을 찾아가 돈으로 매수 협박해 대의원대회를 방해하기도 하고 핵심 집행부 간부에게는 부서이동, 임금인상 누락 등을 통해 보복하는 등 온갖 파렴치한 부당노동행위가 자행되기 시작했다.
  
  노동조합을 통해 달라진 나의 삶
  
▲ ⓒ프레시안  

  나는 열여덟의 나이로 동일방직에 입사했다. 어부였던 아버지의 배 사업이 부도가 나면서 집안 식구 모두가 고향
  을 떠나 동일방직 바로 옆 만석동 판자촌으로 이사를 왔다. 가진것 없이 자리를 잡은 우리 가족은 딸 다섯에 아들
  하나까지 해서 모두 여덟 식구였다. 아버지의 고기잡이와 엄마의 막노동으로는 도저히 먹고 살 수가 없었다.
  
  당시 20킬로 정부미 한 포대를 사면 며칠을 먹지 못해 동이 나기 일쑤였다. 쌀이 떨어지면 누룽지를 끊여서 한 그릇씩 나누어 마시며 끼니를 대신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돈을 벌어 가족의 살림살이에 보탬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나이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언니 이름으로 어떻게 어떻게 동일방직에 들어갔다. 처음 들어가서 8시간 일하고 나니 발바닥은 부르트고 일 끝나고 집에서 잠을 잘 때도 시끄러운 기계소리가 환청으로 들려 자다가도 몇 번씩 식은땀을 흐르며 깨어나기도 했다.
  
  내가 들어갈 당시인 1975년도의 동일방직 노동조합은 회사측의 노조파괴 책동이 끊임없이 자행되고 있을 때였다. 나는 노조 대의원 언니들의 자상함과 친절함이 너무나 좋았다. 노동조합은 현장관리자들의 눈총과 일 독촉에 주눅이 들은 나에게 엄마의 품처럼 따뜻한 안식처였다. 나는 노동조합에서 비로소 노동법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고 노동조합이 노동자들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합법적인 기구라는 것도 배웠다. 내게는 눈이 번쩍 뜨이는 신천지가 눈 앞에 펼쳐져 있었다.
  
  자연히 나는 근로기준법을 지키라며 몸을 사른 전태일 열사의 이야기도 듣게 되었고 청계피복 노동자들과 함께 시위 대열에 참여도 하게 되었다. 사회를 보는 눈을 뜨기 시작한 것이다. 동아일보 기자들의 집단해고와 광고방해 사건들을 보고 들으며 노동운동을 통한 민주사회 건설에 대한 필요성을 절감하는 사람으로 변했던 것이다. 나는 동일방직을 3년을 다니다 해고될 때까지 한 번도 기계 앞에 서지 못하고 쓰레기 치우는 일과 운반 일만 하다가 해고당했다. 현장에 들어가자마자 열성적으로 노동조합 활동을 하였다는 이유로 회사의 미움을 받았기 때문이다.
  
  '옷 벗은 처녀들 몸에 누가 손을 대랴!'
  
  1976년 7월 23일 회사는 매수한 대의원들만 모아놓고 도둑처럼 불법으로 대의원대회를 치뤄 회사측 남성노동자를 신임지부장으로 선출했다. 이에 분노한 조합원들은 자발적으로 불법연행한 지부장 석방과 회사의 노조활동 개입중지, 자율적인 노조활동 보장 등의 요구사항을 내걸고 파업농성을 하였다. 회사측이 단전, 단수를 하자 농성은 자연스럽게 단식농성으로 이어졌다. 3일째인 25일. 무장한 전투경찰 수백 명이 농성장을 에워싸며 연행해 가겠다고 협박했다. 너무 무서웠다.
  
  겁에 질린 우리들은 누구의 제안이라고 할 것도 없이 여성으로서 수치심도 마다하고 모두 옷을 벗어들고 저항했다. 옷을 벗으면 설마 경찰이 손을 대지는 않을 것이라는 단순한 생각이었다. 이것이 그 유명한 우리들 동일방직 여성노동자들의 나체시위였다. 그러나 그게 통하리라고 생각한 우리는 세상 물정 모르는 너무도 순진한 나이어린 여성노동자들에 불과했다. 우리는 무자비하게 개처럼 끌려가지 않을 수 없었다. 모두 강제 연행당했다. 그 사건으로 충격을 받고 두 명의 여성노동자들은 정신병원에서 6개월 이상 치료를 받아야 했다.
  
  대의원 선거장에 똥물벼락 웬말인가!
  
▲ ⓒ프레시안  

  1978년 2월 21일은 노조 대의원 선거 날이었다. 나체 시위 이후 우여곡절 끝에 그래도 민주노조를 지킨 우리로서는 또다시 회사 측에 노동조합을 넘길 수는 없었기에 그 선거는 매우 중요했다. 그러나 새벽 6시 야근반 퇴근자들이 선거를 하기 위해 노조 사무실을 향해 가는데 갑자기 몇몇 남자조합원들이 방화수통에 똥을 퍼 가지고 손에는 고무장갑을 끼고 닥치는 대로 똥물을 끼얹기 시작했다.
  
  이들은 굶주린 야수처럼 투표장인 노조 사무실과 조합원들의 얼굴과 몸에 마구잡이로 똥물을 뿌렸다. 이런 모습을 보고도 노조에서 요청한 수 명의 정사복 경찰과 회사직원, 그리고 섬유노조 본부에서 파견된 간부들은 강 건너 불구경 하듯 하고 있었다. 다급해진 조합원들이 말려달라고 호소하면 이들은 "야! 이 썅년아! 가만 있어. 이따가 말릴 거야"라는 대답만 돌아왔다. 한 술 더 떠 남자조합원과 한국노총 섬유노조 소속의 조직행동대란 깡패들이 노조 사무실을 아예 점거하고 있었다.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섬유노조는 동일방직 노조를 와해시키기 위해 한국노총 산하 각 산별노조와 전국지부들로부터 협찬금이라는 명목으로 기금을 모아 경비로 충당했다.
  
  이 똥물 사건으로 대의원대회가 무산되자 섬유노조 본부는 기다렸다는 듯이 동일방직 노조를 사고지부로 규정하고 지부장과 부지부장, 총무를 제명시켰다. 중앙정보부와 한국노총 섬유노조가 이미 기획한 음모대로 착착 진행되고 있었던 셈이다. 그 뒤부터 우리는 노조사무실에 아예 들어 갈 수조차 없게 되었다. 회사와 섬유노조, 그리고 유신정권은 동일방직 노조는 도시산업선교회의 지시를 받고 움직이며 도시산업선교회는 빨갱이 단체라고 선전하기 시작했다. 세상에 교회 단체를 빨갱이라고 몰아붙이다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홍지영이 쓴 『도시 산업선교 무엇을 노리나』라는 책자가 전국에 배포된 것도 이때였다.
  
  시위, 구속, 가택연금, 그리고 블랙리스트
  
  그 뒤 우리는 3월 10일 장충체육관에서 열리는 노동절 행사에서 시위를 벌이기도 하고 명동성당에서 목숨을 건 단식을 하기도 하면서 우리들의 억울한 사정을 알리기에 온 힘을 다했다. 단식이 길어지자 이것을 걱정한 종교계인사들과 회사측은 우리 모두를 조건없이 받아들이기로 약속을 해놓고 현장을 무단이탈했다는 이유로 124명을 해고 시켰다. 나는 3월 26일에는 여의도에서 열린 부활절 연합예배에 당시 남영나이론의 김현숙, 진혜자, 원풍의 장남수, 삼원섬유의 김지선 언니(지금은 노회찬 의원의 부인), 대농방직의 김정자와 함께 참석하여 "노동3권 보장하라", "우리는 빨갱이가 아니다"라는 구호를 외치다 구속이 되었다. 또 김옥섭, 권분란, 추송례, 공인숙, 박양순 등은 당시 섬유노조 위원장이던 김영태가 부산의 통일주체국민의 대의원으로 출마한다고 하여 김영태의 비리를 적은 유인물을 부산에서 돌리다 연행되어 구속이 되었다.
  
  그 이후 우리들 동일방직 해고자들은 1980년대까지 어디서도 취업을 할 수가 없었다. 섬유노조 위원장 김영태가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전국에 배포했기 때문이다. 블랙리스트에는 해고자들의 주민등록번호, 일하던 부서, 집주소까지 기록하여 '업무에 참조바람'이라는 도장과 함께 전국 사업장으로 돌려졌다. 형벌은 이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요시찰'이라고 담당형사들이 따라 붙어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가택연금을 당했고 취업하는 곳마다 몇 번씩 해고를 당해야만 했다. 심지어는 식모, 버스안내양, 식당 등에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위장취업을 해서 일하다가도 형사들에게 뒤를 밟혀 다시 해고를 당해야 했다. 블랙리스트 철폐를 주장하다 김옥섭, 김용자, 김지선, 서귀화, 신정희가 다시 구속되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먹고는 살아야 하는데, 취직도 못하고 항의하면 구속되는 악순환의 세월은 우리에게는 풍전등화처럼 참으로 견디기 힘든 시절이었다. 박정희가 죽고 1980년 민주화의 봄 때 잠시 복직의 꿈에 부풀기도 했지만 그마저 광주학살과 함께 물거품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민주화운동으로 인정은 받았으나 복직은 안돼
  
▲ ⓒ프레시안  

  2000년에 우리는 민주화운동명예회복및보상심의위원회에 명예회복 신청을 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동일방직 사건은 박정희 정권의 중앙정보부가 개입해 일어난 것이라는 당시 중앙정보부 최종선 씨(고 최종길 교수의 동생)의 양심선언 덕분에 민주화운동으로 인정도 받게 되었다. 위원회는 후속조치로 회사에 복직권고도 내렸다. 그러나 1970년대로부터 30년이나 지난 2000년대인 오늘, 우리는 복직이 되지 않고 있다. 복직을 위해 몇 차례 회사 앞에서 농성도 하고 정부종합청사 앞에서도 농성을 했지만 회사 측은 예전과 하나도 다름없이 해고는 정당했으므로 인정할 수 없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살기 좋아졌다고 이야기 한다. 하지만 나는 천만의 말씀이라고 말하고 싶다. 지금 우리 사회는 더욱 깊어진 빈부격차로 이게 과연 더불어 함께 사는 공동체인지 의심이 들 정도다. 참여정부가 누구에 의해 만들어졌는데 예나 지금이나 노동자들의 참여는 배제되고 있다. 노동자들에게 명예회복이란 두말할 여지없이 현장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부당한 해고에 대한 명예회복조차 이루어지지 않는 참여정부를 나는 도저히 노동자들이 참여하는 민주주의로 봐줄 수가 없다.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노동 현실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음을 나는 다시 경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이야기는 이제 시작일 뿐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우리 해고자들은 우리들의 이야기를 언젠가는 우리들의 언어로 쓰고 싶은 열망이 있었다. 열여덟 꽃다운 사춘기 질풍노도의 시기에 우리의 생존권을 빼앗고 우리의 인생을 바꿔놓은 우리의 아픔이자 삶의 뿌리가 된 30년 세월, 그 아픈 삶을 되새기면서 정리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막상 영상으로 찍어보자는 제안을 받았을 때 선뜻 나설 수가 없었다. 그것은 우리의 삶을 여과없이 드러내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용기가 필요했다. 그러나 우리는 마음을 다잡고 기꺼이 촬영에 응했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계약직이라는 이유로, 비정규직이라는 이유로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불안하게 살아가는 노동자들과, 케이티에프 여승무원들, 그리고 해고의 위협 속에서 싸우고 있는 수많은 노동자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 시작에 불과한 다큐멘타리 『우리들은 정의파다』가 잘못된 역사의 진실을 바로 알리고 고통당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위안이 되었으면 하는 소망을 가져본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리고 나는 30년 삶의 질곡을 헤치고 고난 속에서 단련된 중년여성으로서, 엄마로서 굳세고 힘차게 당당하게 오늘을 살아가는 노동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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