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년대 여인들 ‘생계와의 전쟁’
한국 산업화와 여성노동
한국여성들은 해방과 한국전쟁 후 한국의 산업화를 일구며 오늘날의 눈부신 역사를 일으켜 왔다. 그러나 이들이 힘겹게 해 온 노동과 그 가치에 대해서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것이 현실. 우먼타임스는 여성가족부 산하 여성사전시관과 공동으로 4회에 걸쳐 한국전쟁 이후 여성들의 노동에 대해 기획, 집중적으로 재조명해 본다.
① 전쟁을 살아낸 여성들, 사회를 누비다
-한국전쟁과 여성노동
거의가 남성대신 집밖에서 돈벌이 날품팔이·목판장사도 여성이 차지
전후 나라재건 여성노동으로 안정
“to my mother”
올해 연말까지 열리는 여성사전시관의 소장유물전에는 유독 눈길을 끄는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방석보와 스카프, 행거치프로 만들어진 참전 기념품들인데, 한국전쟁에 참전했다가 귀국하는 유엔 군인들이 어머니 선물로 샀던 것들이다.
참전 기념품 위쪽에는 큰 글씨로 “to my mother”라는 문구가 으레 새겨져 있는데, 보는 이들은 이를 통해 전쟁에 참가하는 남성과 여성의 위치를 단번에 상상하게 된다. 남성들이 포탄이 난무하는 ‘최전방’에서 국가와 가정을 위해 목숨 바쳐 싸우는 동안, 여성들은 안전한 ‘후방’에서 남편과 아들들이 무사히 귀환하기를 바라는 모습 말이다.
이러한 이미지들은 남성을 ‘보호하는 자’로, 여성을 ‘보호받아야 되는 자’로 규정하면서 전쟁의 성별 정치학을 강화시켜 왔다. 생사를 넘나드는 전선에서 어머니를 그리며 살아 돌아갈 것을 맹세하는 군인들에 대한 동일시와, 적과 함께 맞서 싸우며 맺어진 남성들 간의 연대감. 이 유물들은 다름 아닌 전쟁에 대한 남성들의 욕망과 추억을 상기시키고 있는 것이다.
한국인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한국전쟁도 이와 다르지 않다. 전방과 후방이 따로 없을 정도로 전 지역이 전쟁터였던 전쟁이건만, 남성들은 ‘전선에서 생사를 넘나드는 자’이고 여성은 ‘후방에 남겨진 자’라는 등식이 한국전쟁을 기억하는 방식이었다.
▲남성 부재와 ‘집 밖’의 여성들=여성들에게 한국전쟁은 ‘남성 부재’의 두려움과 공포를 안겨주었다. 한국전쟁은 대규모의 남성 징집으로 인해 전사회적인 남성 부재 상황을 초래했고, 전쟁 중 생계노동자로 가정을 책임졌던 여성들은 전후에도 이름 붙여지지 않은 수많은 노동을 수행했다. 일상화된 죽음의 공포를 생존의 끈질김으로 살아낸 여성들에게 1950년대는 곧 ‘죽지 않기 위한’ 노동의 다른 이름인 셈이다.
이 시기 직업을 가진 여성 비율은 1951년 63.7%, 1952년에는 58.4%를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경제활동이 가능한 15세 이상 여성 대부분을 아우르는 수치다. 즉, 전후 한국사회에서 일할 수 있는 나이의 여성들은 모두 ‘집 밖’에서 돈 버는 일을 했다는 뜻이다.
산업 기반이 거의 전무한 상태에서, 전쟁이 남긴 폐허를 가로지르며 여성들은 닥치는 대로 돈 될 만한 일들을 찾아 나섰다. 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한데다 특별한 기술이 없는 여성들은 ‘식모’나 삯바느질, 세탁 등 ‘집안일’의 경험을 살리는 노동들을 수행했고, 젊은 여성들은 방직 공장 노동자로 일하거나 기술을 익혀 미장원이나 병과점에라도 취직하는 것이 큰 행운이었다. 또한 점령자로 존재했던 미군을 상대로 장사를 하는 여성들도 적지 않았다. 이처럼 사회 구석구석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행해졌던 여성들의 노동은 불안정한 생계형 노동이었다.
어쨌건 전쟁이라는 소용돌이를 살아낸 1950년대, 한국인들 사이에서 ‘여자들의 판국’이 되어가는 세상을 한탄하는 목소리들이 나오는 것은 당연했다. 동대문시장과 남대문시장은 완전히 부인네들의 차지였고, 사금융을 좌지우지했던 계 마담들도 일간지의 단골 주인공들이었으니까. 이러한 여성의 경제활동이 단지 ‘돈 버는 일’로만 환원될 수 없는 새로운 여성 주체성의 경험을 낳았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1950년대 한국사회는 국가 재건을 이루어내야 하는 남성적 시선으로 남성 부재의 공간과 노동의 힘을 경험했던 여성들의 삶을 해석하기 시작했다. 특히 30만~50만 명으로 추산되던 전쟁미망인들은 그야말로 극심한 생활고를 극복하기 위한 노동을 수행하면서도 ‘이상화된 모성’의 역할 모델이 되어야 한다는 담론으로 인해 ‘죽은 듯 살아야 하는’ 고통을 경험했다.
▲한 많은 미아리 고개에 대한 다른 시선=한국전쟁과 여성이 관계하는 방식은 ‘한 많은 미아리 고개’로 인식되어 왔다. 전쟁에 나간 남편을 기다리는 인고의 한을 간직한 여성의 역할만이 강조될 뿐, 노동을 통해 경험했던 새로운 여성 주체성에 대한 이야기는 들리지 않았다. 전쟁의 ‘추억’을 위한 참전 기념품들을 보고 전쟁의 집단적이고 남성적인 추억만을 읽을 뿐, 그것들이 남편과 아버지 없는 가족을 책임져야 하는 여성들의 노동으로 완성되었다는 사실을 읽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어머니를 위해 전쟁 기념품을 사는 남성 군인의 이야기는, 밤낮으로 자수를 하면서도 겨우 입에 풀칠할 정도의 품삯밖에 받지 못했던 여성들의 노동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일할 수 있는 나이의 거의 모든 여성이 수행했던 노동의 흔적들은 지금까지 우리가 기억해왔던 1950년대 여성에 대한 균열을 야기한다. 그 균열을 따라가다 보면, “거리에 서면 전부 여인네뿐이로세”라는 말을 ‘집 밖’의 여성 주체에 대한 남성적 위협감으로 읽을 것이 아니라, 여성 주체가 갖고 있던 욕망과 꿈으로 다시 읽을 필요가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