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정보국의 비밀공작과 분당파의 미필적 고의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차례〉
1. 공중침투공작의 실패, 신당창당공작의 성공
2. 50여 년 전 사회변혁운동의 좌절원인
3. 분당파의 미필적고의
1. 공중침투 공작의 실패, 신당창당 공작의 성공
1954년 중국 심양에서 열린 비공개 법정 피고석에 두 미국인이 서 있었다. 그들은 세상에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존 다우니와 리처드 펙토이다.
중국 법정은 다우니에게 무기징역형을, 펙토에게 20년형을 선고하였다.
중형을 받고 감옥으로 다시 끌려간 그들은 한(조선)반도에서 전쟁의 불길이 치솟고 있었던 1952년 11월 29일 침투용 군용기를 타고 길림성 상공을 저공비행하고 있었다.
중국인민해방군의 대공사격을 피하여 달아나던 군용기는 나무에 부딪혀 추락했고, 두 사람은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중국 정부당국이 심문한 끝에 알아낸 사실은, 그 두 미국인이 미국 중앙정보국(CIA) 공작요원이고, 그들의 공중침투 목적은 길림성에서 암약 중인 반혁명세력과 접선하려는 것이었다.
당시 한(조선)반도에서 전쟁을 벌이고 있었던 미국은 중국에 새로 세워진 사회주의정권을 초기에 무너뜨리기 위해 처음에는 장개석의 국민당 정권을 이용하다가 가망이 없다고 판단하였고, 새로운 반혁명세력을 중국 내부에서 길러내기 위한 새로운 비밀공작을 개시하였다.
그 공작을 떠맡은 주무부처가 중앙정보국이었고, 다우니와 펙토는 반혁명공작임무를 받고 길림성으로 공중침투하다가 체포된 것이었다.
중앙정보국은 다우니와 펙토를 길림성에 침투시켜 새로운 반혁명세력을 육성한 뒤에, 그 세력을 배후에서 조종하여 중국 동북지역에서 반혁명유격전을 일으키려는 비밀공작계획을 세워두고 있었다.
다우니와 펙토를 체포하고 심문한 중국 정부당국은 신화통신을 통해 중앙정보국의 반혁명침투공작을 폭로하면서 중앙정보국 요원들의 신원을 세상에 공개하였다.
당황한 미국정부는 그들이 중앙정보국 공작원이라는 사실을 부인하는 기만술책으로 대응하였다.
중국 정부당국은 미국 대통령 리처드 닉슨이 베이징을 찾아갔던 1971년에 가서 중미관계 정상화를 의식하여 펙토를 석방하였고, 닉슨이 그들이 중앙정보국 공작원이었음을 실토한 뒤인 이태 뒤에 다우니를 석방하였다.
중국에서 반혁명세력을 길러내려던 비밀공작이 실패하자, 중앙정보국은 중국정부 고위층에 접근할 침투로를 찾았다.
그러나 냉전시기에 적국의 고위층에 접근할 침투로를 찾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게 보였다.
고심하던 중앙정보국이 찾아낸 협조자는 네덜란드 국가안보국(BVD)이었다. 네덜란드 국가안보국은 다우니와 펙토가 중국에서 체포된 이듬해 1955년에 소련 모스크바에서 열린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석한 진보성향의 네델란드 청년 피터 부베를 포섭하고, 그를 이용한 비밀공작을 준비하고 있었다.
무려 12년 동안이나 치밀하게 계획하고 준비한 네덜란드 국가안보국이 좌파신당으로 교활하게 조작해 낸 것이 네덜란드 맑스레닌당(MLPN)이다.
1969년 네덜란드 맑스레닌당이 좌파신당으로 창당될 때, 당대표로 선출된 사람은 크리스 페터슨이었는데, 그가 바로 12년 전 네덜란드 국가안보국에 포섭되어 1957년부터 비밀공작원으로 활동하였던 수학교사 출신의 피터 부베였다.
네덜란드 국가안보국이 네덜란드 맑스레닌당 창당자금과 운영자금을 은밀히 대주었음을 물론이고, 네덜란드 언론계에 침투한 공작원을 동원하여 네덜란드 맑스레닌당을 서유럽의 대표적인 좌파정당으로 대중들에게 인식시키는 언론공작을 벌였다.
크리스 페터슨이라는 가명으로 네덜란드 맑스레닌당의 당대표가 된 비밀공작원 피터 부베는 오래지 않아 서유럽에서 명성이 자자한 좌파정당 거물로 화려하게 등장하였다.
그것만이 아니라, 기존의 네덜란드 공산당에서 활동하던 사회주의자 600여 명이 비밀공작에 감쪽같이 속아넘어가 네덜란드 맑스레닌당으로 당적을 옮겼다.
네덜란드 맑스레닌당은 기존에 있었던 네덜란드 공산당과 치열하게 경쟁하면서 네덜란드의 사회주의정치세력을 두 갈래로 분열, 약화시켰다.
사회주의정치세력을 갈라놓은 분열공작에 성공한 피터 부베는,‘중국정부 고위층에 침투하라.’는 지령을 받고 '붉은 청어'라는 공작명으로 불리면서 맹렬하게 암약하였다.
부베는 좌파정당 거물의 명성과 지위를 교묘하게 이용하여 중국공산당을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공개발언을 유럽언론에 쏟아냈다.
그렇게 하여 그는 자신을 서유럽에서 '중국공산당의 대변인'으로 위장하는데 성공하였고, 네덜란드 맑스레닌당을 '중국공산당의 서유럽 창구'로 위장시키는데 성공하였다.
부베의 위장공작이 먹혀 들어가면서 중국공산당 수뇌부의 관심을 끌기 시작하였고, 1980년대 말 냉전체제가 무너지면서 비밀공작활동을 중단하기까지 25년 동안 부베는 해마다 베이징을 방문하여 마오쩌뚱을 비롯한 중국공산당 수뇌부와 접촉하면서 간첩활동을 벌였고, 헤이그에 있는 중국대사관에 수시로 드나들면서 고급정보를 빼돌렸다.
부베의 간첩활동에는 '몽골작전'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미국 중앙정보국은 '몽골작전'을 통해서 부베가 빼돌린 정보들이 다른 공작원들이 수집한 정보보다 정확하고 신속하다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부베는 지금도 네덜란드 휴양지 잔트보르트에 살면서 연금생활자의 이익을 대변하는 작은 정당 오피지(OPZ)의 당대표를 맡고 있다.
그의 비밀공작과 간첩활동은 전혀 알려지지 않았는데, 냉전시기에 네덜란드 국가안보국 간부로서 체코슬로바키아와 동독의 공작책임을 맡았던 프리츠 획스트라가 2004년 11월에 펴낸 회고록에서 폭로되었다.
2. 50여 년 전 사회변혁운동의 좌절 원인
제224 방첩대 파견대(The 224th Counter Intelligence Corps[CIC] Detachment)가 서울에 나타난 때는 1945년 9월 9일이다.
그 파견대의 요원들은 태평양전쟁 시기에 오끼나와 점령전투에 참전하였던 군인들이다.
처음에 제224 방첩대 파견대는 도쿄에 있었던 제441 방첩대 파견대의 통제를 받으면서 암약하였는데, 1946년 2월 13일 제224 방첩대 파견대가 북위 38도선 이남전역에서 비밀공작통제권을 장악하였고, 4월 1일부터는 제971 방첩대 파견대로 확대, 통합되었다.
제971 방첩대 파견대의 임무는 38도선 이남지역의 사회변혁운동을 파괴하고 이북지역에 침투하는 비밀공작을 추진하는 것이었다.
제971 방첩대 파견대가 1949년에 작성한 비밀보고서에 나오는 비밀공작원은 당시 남조선로동당의 핵심간부였던 임화이다.
임화는 10월항쟁 시기에 미군정이 지명수배하였던 남로당 간부명단에 들어있었다고 하여 1947년 초에 월북하였으나, 그것은 월북을 위장한 침투공작이었다.
당시 위장월북으로 침투하였던 박헌영과 이승엽은 해주연락소를 차려놓고 남로당을 지휘하고 있었는데, 임화는 그들 밑에서 실무자로 일하였다.
훗날 미국에서 기밀해제된 문서에 따르면, 미군정 정보기관에 포섭되어 월북형식으로 이북지역에 위장침투하였던 남로당 핵심간부들 가운데는 임화 이외에도 이강국과 설정식이 있었다.
미국 정보기관의 위장침투공작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1948년 6월 미군정 사령관 하지는 박헌영에게‘미국에서 포섭한 공작원들을 유럽을 통해 평양에 보내겠으니 그들의 입국과 활동을 보장해 주라.’고 말하였다.
그러한 비밀침투계획에 따라 평양에 침투하기 위해 1949년 1월 미국을 출발하여 체코슬로바키아 프라하에 도착한 공작원은 윌리엄 리와 앨리스 현이었다.
이사민이라는 가명을 쓴 윌리엄 리의 본명은 이경선이다.
앨리스 현은 하와이에서 독립운동에 참가하였던 현순의 딸이다.
윌리엄 리와 앨리스 현이 프라하에 도착하였던 때로부터 47년이 지난 1995년 10월 서울신문 특별취재반은 워싱턴에 있는 미국 국립문서보존관리국에서 놀라운 사실이 담겨있는 문서를 찾아내었다.
그 문서는 1948년 12월 당시 워싱턴에서 월리엄 리가 김일성 수상(당시)과 박헌영 앞으로 직접 발송한 비밀보고서이다.
'미국 워싱턴 주재 동지 대표' 이사민의 이름으로 작성된 비밀보고서에는 미국공산당에 입당한 재미조선인 당원 26명이 "미국공산당의 허락을 받아 당내에 조선인그룹빠를 재조직하고 1개월에 1차 회집한다"고 하면서, '조선인그룹빠'의 활동, 조선인거류민의 분위기, 독립운동 상황, 미국 정세를 자세히 기록하였다.
또한 월리엄 리는 그 보고서에서 1947년 4월부터 체코슬로바키아의 중간연락거점을 통해 정기적으로 보고서를 제출하였으나, 그 연락통로가 불가능한 듯하여 앞으로는 자기에게 직접 연락해달라고 하면서 자신의 미국 주소를 적었다.
월리엄 리가 그 비밀보고서를 작성하였던 1948년 12월이라는 시점은 냉전체제의 대립이 격화되었던 때였으므로, 워싱턴에 있는 그가 체코슬로바키아를 통해서 평양의 박헌영과 직접 서신을 주고받는 것은 미국 정보기관의 '묵인'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평양으로 보냈다는 윌리엄 리의 비밀보고서가 47년 뒤에 워싱턴 국립문서보존관리국에서 서울신문 특별취재반에 의해서 발견된 까닭이 바로 거기에서 밝혀진다.
윌리엄 리의 비밀보고서에 나오는 미국공산당의 '조선인그룹빠'에 속하였던 당원 26명 가운데 당원대표 7명은 로스앤젤레스의 변준호, 김강, 현앨리스, 워싱턴의 이사민, 선우학원, 뉴욕의 신두식, 곽지순이다.
그들 가운데 유일한 생존자는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선우학원이다.
선우학원은 1997년 서울에서 펴낸 자신의 책 '한미관계 50년사'에서 이렇게 적었다.
"필자는 1948년에 미국에서 시인 임화 편에 '김일성, 박헌영 동지 앞'으로 편지를 전한 적이 있다. 그런데 그 편지가 한국전쟁이 발생한지 2주일 후 미국 정보원이 본인을 심문할 때 증거물로 제출되었다. 그 편지는 분명히 필자가 인편으로 보낸 편지였다. 그 편지가 미국 정보국에 들어가게 된 자세한 경위는 아직 미지수이다. 나의 추측으로는 임화 또는 박헌영 두 사람 중 하나가 미 정보부에 전달했을 것으로 본다."
미국 정보기관이 직접 파견한 윌리엄 리와 앨리스 현이 프라하에 도착하였을 때, 체코 정부당국은‘정치적 동기가 없는데도 북측에 망명하겠다.’고 하는 그들을 의심하였다.
그래서 일단 그들을 억류하고 북측에 억류사실을 통보하였다.
북측 정부당국도‘그들의 망명을 받아줄 수 없다.’고 통보하였다.
그러나 외무상이었던 박헌영은 내무성의 망명불허 결정을 뒤집고 외무성에게 지시하여 그들에게 입국사증을 내주었다.
박헌영의 도움으로 평양에 들어간 윌리엄 리는 조국전선 중앙위원회 조사연구부 부부장으로, 앨리스 현은 조선중앙통신사 번역부장을 거쳐 외무성 조사보도국에서 일하였다.
윌리엄 리와 앨리스 현이 짧은 기간에 고위층에 침투할 수 있었던 것 역시 박헌영이 적극 뒷받침해주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윌리엄 리와 앨리스 현은 유럽에 있는 중간연락거점에 편지연락을 몇 차례 시도하였으나 답장은 한 차례도 받지 못하였다.
그 까닭은 그들의 정체를 의심하였던 내무성이 그들이 보내는 편지를 검열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분위기를 눈치챈 월리엄 리와 앨리스 현은 ‘유럽여행을 다녀오겠다.’고 정부당국에 요청하였다.
내무성은 당연히 출국불가를 통보하였으나, 이번에도 박헌영의 지시로 외무성이 출국허가를 내주었다.
그러나 그것은 함정이었다.
평양을 빠져나간 그 두 사람이 모스크바 공항에 내렸을 때,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은 북측의 안전국 요원들이었다.
안전국 요원들이 그들의 짐을 뒤지니 조선인민군에 관계된 비밀자료들을 비롯하여 그 동안 수집한 첩보문서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처럼 남로당 최고지도부가 미국 정보기관에 간첩으로 포섭되어 암약하였으니, 당시 남측의 사회변혁운동이 좌절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1949년 9월 18일 남로당 서울시당 핵심간부들이 이승만 정권에 투항하였다. 그들이 넘겨준 정보에 의하여 9월 21일 200여 명이 체포되었고, 9월 24일에는 65명이 체포되었다.
9월 25일에는 남로당 강원도당 위원장이 투항하였다.
이승만 정권은 1949년 10월 1일부터 11월 30일까지 두 달 동안을 '자수주간'으로 정하고 집중공세를 가하였다.
10월 18일 이승만 정권은 진보성향의 정당과 사회단체 133개의 등록을 취소하여 '불법화'하였다.
그 기간 동안 서울에서만 1만2천196명이 투항하였고, 경상북도에서는 1만8천669명이 투항하였다.
10월 15일에 체포된 정백은 12월 27일 기자회견을 열고 전향을 선언하였다. 1950년 6월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까지 투항한 사람들은 약 10만 명이었다. 이승만 정권은 전쟁이 일어난 직후 투항자들을 모두 학살하였다.
"자수하여 남조선정부조직에 침투하라"고 하였던 박헌영의 지시는 이렇게 남측의 사회변혁운동을 완전히 무너뜨렸다.
그 무렵 미군정이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새로 세워질 나라의 사회체제가‘사회주의체제로 되어야 한다.’고 응답한 사람은 70%였고‘공산주의체제로 되어야 한다.’고 응답한 사람은 7%였다.
불과 14%의 응답자만이 새로 세워질 나라의 사회체제가‘자본주의체제로 되어야 한다.’고 응답하였다.
일제식민지체제가 해체되어 해방의 새날을 맞이한 조국에 사회주의체제가 세워지기를 바랐던 70%의 정치적 요구는 무참히 짓밟히고 말았다.
3. 분당파의 미필적 고의
남측의 사회변혁운동이 미국 정보기관의 와해공작과 이승만 정권의 탄압으로, 그리고 전쟁시기 대량학살로 좌절한 때로부터 어느덧 50년 세월이 흘러갔다.
시대가 바뀌었고 세대가 교체되었다.
영원한 불모지처럼 보였던 땅에서도 어느덧 사회변혁운동의 자생적 움직임이 싹트기 시작하였다.
1990년대 중반에는 민주노총과 전농을 비롯한 진보적 근로대중조직들이 새로 일어섰고, 2000년대에 들어와서는 진보정당이 창당되었고 연대전선도 형성되었다.
이로써 사회변혁운동은 좌절한지 반세기만에 전략거점과 투쟁진지를 다시 갖추게 된 것이다.
그런데 주목하는 것은, 50여 년 전에 이 땅의 사회변혁운동을 분열공작과 와해공작으로 교살하였던 제국주의 정보기관이 여전히‘중앙정보국 한국지부’라는 이름으로 암약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남측언론은‘미국 중앙정보국이 2007년 12월에 실시된 대선기간에 수많은 공작원들을 추가로 파견하였다.’는 소식을 전하였다.
그들에게 맡겨진 중대한 임무는, 반세기 전에 그들의 선배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남측의 사회변혁운동이 더 장성하기 전에 분열, 와해시키는 것이다. 그들의 분열공작, 와해공작이 노리는 첫 번째 목표는 민주노동당일 것이다.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진보정당들은 언제나 미국 중앙정보국이 노리는 첫 번째 공작목표로 되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지금 공교롭게도, 민주노동당이 분당위기에 휘말려 들었다.
대선에서 패배한 후유증으로 그렇지 않아도 위기감이 감돌고 있는 상황에서 분당파가 들고일어난 것이다.
대선패배와 분당위기는 민주노동당을 창당 이후 가장 커다란 시련으로 몰아넣었다.
중앙정보국 한국지부는 민주노동당이 겪는 분당위기를 지켜보면서 속으로 쾌재를 부를 것이다.
민주노동당이 망하기를 바라는 한나라당을 비롯한 수구우파세력들 모두가 분당파의 출현을 기뻐하며 반기고 있을 것이다.
자기들이 해야 할 일을 분당파가 대신 해주고 있으니 어찌 그렇지 아니하겠는가.
성장단계에 있는 생물유기체를 인위적으로 갈라놓으면 생명력을 잃게 된다. 이것은 생물학의 법칙이자 진보정치의 법칙이기도 하다.
아직 성장단계에 있는 진보정치운동에게 분열은 그 자체가 쇠퇴와 몰락의 전주곡으로 들린다.
진보정치운동이 단결과 통합과 연대를 자기의 생명처럼 소중하게 여겨야 하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분당파는 진보정치운동을 둘로 쪼개놓음으로써 중앙정보국 한국지부가 추진하려는 분열공작을 앞질러 대행해주고 있으며, 한나라당과 수구우파세력에게 만족과 기쁨을 주고 있다.
분당파는‘진보정치운동을 쇄신하고 혁신하기 위해서 진보신당을 창당하는 길을 선택하였다.’는 어처구니없는 말장난을 늘어놓았지만, 네덜란드 국가안보국이 좌파정치운동을 분열시키기 위하여 좌파신당을 창당할 때도 아마 그런 말장난을 늘어놓으며 거짓명분을 찾았을 것이다.
그러나 분당은 어디까지나 분열이다.
명백하게도, 분당은 성장단계에 있는 생물유기체를 인위적으로 갈라놓아 생명력을 조금씩 앗아가는 잔인한 정치적 살상이다.
분당은 절대로 신당창당이 될 수 없다.
미필적 고의에 의한 범행이라는 법률용어는 분당파의 분열소동에 정확하게 들어맞는 말이다.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차례〉
1. 공중침투공작의 실패, 신당창당공작의 성공
2. 50여 년 전 사회변혁운동의 좌절원인
3. 분당파의 미필적고의
1. 공중침투 공작의 실패, 신당창당 공작의 성공
1954년 중국 심양에서 열린 비공개 법정 피고석에 두 미국인이 서 있었다. 그들은 세상에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존 다우니와 리처드 펙토이다.
중국 법정은 다우니에게 무기징역형을, 펙토에게 20년형을 선고하였다.
중형을 받고 감옥으로 다시 끌려간 그들은 한(조선)반도에서 전쟁의 불길이 치솟고 있었던 1952년 11월 29일 침투용 군용기를 타고 길림성 상공을 저공비행하고 있었다.
중국인민해방군의 대공사격을 피하여 달아나던 군용기는 나무에 부딪혀 추락했고, 두 사람은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중국 정부당국이 심문한 끝에 알아낸 사실은, 그 두 미국인이 미국 중앙정보국(CIA) 공작요원이고, 그들의 공중침투 목적은 길림성에서 암약 중인 반혁명세력과 접선하려는 것이었다.
당시 한(조선)반도에서 전쟁을 벌이고 있었던 미국은 중국에 새로 세워진 사회주의정권을 초기에 무너뜨리기 위해 처음에는 장개석의 국민당 정권을 이용하다가 가망이 없다고 판단하였고, 새로운 반혁명세력을 중국 내부에서 길러내기 위한 새로운 비밀공작을 개시하였다.
그 공작을 떠맡은 주무부처가 중앙정보국이었고, 다우니와 펙토는 반혁명공작임무를 받고 길림성으로 공중침투하다가 체포된 것이었다.
중앙정보국은 다우니와 펙토를 길림성에 침투시켜 새로운 반혁명세력을 육성한 뒤에, 그 세력을 배후에서 조종하여 중국 동북지역에서 반혁명유격전을 일으키려는 비밀공작계획을 세워두고 있었다.
다우니와 펙토를 체포하고 심문한 중국 정부당국은 신화통신을 통해 중앙정보국의 반혁명침투공작을 폭로하면서 중앙정보국 요원들의 신원을 세상에 공개하였다.
당황한 미국정부는 그들이 중앙정보국 공작원이라는 사실을 부인하는 기만술책으로 대응하였다.
중국 정부당국은 미국 대통령 리처드 닉슨이 베이징을 찾아갔던 1971년에 가서 중미관계 정상화를 의식하여 펙토를 석방하였고, 닉슨이 그들이 중앙정보국 공작원이었음을 실토한 뒤인 이태 뒤에 다우니를 석방하였다.
중국에서 반혁명세력을 길러내려던 비밀공작이 실패하자, 중앙정보국은 중국정부 고위층에 접근할 침투로를 찾았다.
그러나 냉전시기에 적국의 고위층에 접근할 침투로를 찾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게 보였다.
고심하던 중앙정보국이 찾아낸 협조자는 네덜란드 국가안보국(BVD)이었다. 네덜란드 국가안보국은 다우니와 펙토가 중국에서 체포된 이듬해 1955년에 소련 모스크바에서 열린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석한 진보성향의 네델란드 청년 피터 부베를 포섭하고, 그를 이용한 비밀공작을 준비하고 있었다.
무려 12년 동안이나 치밀하게 계획하고 준비한 네덜란드 국가안보국이 좌파신당으로 교활하게 조작해 낸 것이 네덜란드 맑스레닌당(MLPN)이다.
1969년 네덜란드 맑스레닌당이 좌파신당으로 창당될 때, 당대표로 선출된 사람은 크리스 페터슨이었는데, 그가 바로 12년 전 네덜란드 국가안보국에 포섭되어 1957년부터 비밀공작원으로 활동하였던 수학교사 출신의 피터 부베였다.
네덜란드 국가안보국이 네덜란드 맑스레닌당 창당자금과 운영자금을 은밀히 대주었음을 물론이고, 네덜란드 언론계에 침투한 공작원을 동원하여 네덜란드 맑스레닌당을 서유럽의 대표적인 좌파정당으로 대중들에게 인식시키는 언론공작을 벌였다.
크리스 페터슨이라는 가명으로 네덜란드 맑스레닌당의 당대표가 된 비밀공작원 피터 부베는 오래지 않아 서유럽에서 명성이 자자한 좌파정당 거물로 화려하게 등장하였다.
그것만이 아니라, 기존의 네덜란드 공산당에서 활동하던 사회주의자 600여 명이 비밀공작에 감쪽같이 속아넘어가 네덜란드 맑스레닌당으로 당적을 옮겼다.
네덜란드 맑스레닌당은 기존에 있었던 네덜란드 공산당과 치열하게 경쟁하면서 네덜란드의 사회주의정치세력을 두 갈래로 분열, 약화시켰다.
사회주의정치세력을 갈라놓은 분열공작에 성공한 피터 부베는,‘중국정부 고위층에 침투하라.’는 지령을 받고 '붉은 청어'라는 공작명으로 불리면서 맹렬하게 암약하였다.
부베는 좌파정당 거물의 명성과 지위를 교묘하게 이용하여 중국공산당을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공개발언을 유럽언론에 쏟아냈다.
그렇게 하여 그는 자신을 서유럽에서 '중국공산당의 대변인'으로 위장하는데 성공하였고, 네덜란드 맑스레닌당을 '중국공산당의 서유럽 창구'로 위장시키는데 성공하였다.
부베의 위장공작이 먹혀 들어가면서 중국공산당 수뇌부의 관심을 끌기 시작하였고, 1980년대 말 냉전체제가 무너지면서 비밀공작활동을 중단하기까지 25년 동안 부베는 해마다 베이징을 방문하여 마오쩌뚱을 비롯한 중국공산당 수뇌부와 접촉하면서 간첩활동을 벌였고, 헤이그에 있는 중국대사관에 수시로 드나들면서 고급정보를 빼돌렸다.
부베의 간첩활동에는 '몽골작전'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미국 중앙정보국은 '몽골작전'을 통해서 부베가 빼돌린 정보들이 다른 공작원들이 수집한 정보보다 정확하고 신속하다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부베는 지금도 네덜란드 휴양지 잔트보르트에 살면서 연금생활자의 이익을 대변하는 작은 정당 오피지(OPZ)의 당대표를 맡고 있다.
그의 비밀공작과 간첩활동은 전혀 알려지지 않았는데, 냉전시기에 네덜란드 국가안보국 간부로서 체코슬로바키아와 동독의 공작책임을 맡았던 프리츠 획스트라가 2004년 11월에 펴낸 회고록에서 폭로되었다.
2. 50여 년 전 사회변혁운동의 좌절 원인
제224 방첩대 파견대(The 224th Counter Intelligence Corps[CIC] Detachment)가 서울에 나타난 때는 1945년 9월 9일이다.
그 파견대의 요원들은 태평양전쟁 시기에 오끼나와 점령전투에 참전하였던 군인들이다.
처음에 제224 방첩대 파견대는 도쿄에 있었던 제441 방첩대 파견대의 통제를 받으면서 암약하였는데, 1946년 2월 13일 제224 방첩대 파견대가 북위 38도선 이남전역에서 비밀공작통제권을 장악하였고, 4월 1일부터는 제971 방첩대 파견대로 확대, 통합되었다.
제971 방첩대 파견대의 임무는 38도선 이남지역의 사회변혁운동을 파괴하고 이북지역에 침투하는 비밀공작을 추진하는 것이었다.
제971 방첩대 파견대가 1949년에 작성한 비밀보고서에 나오는 비밀공작원은 당시 남조선로동당의 핵심간부였던 임화이다.
임화는 10월항쟁 시기에 미군정이 지명수배하였던 남로당 간부명단에 들어있었다고 하여 1947년 초에 월북하였으나, 그것은 월북을 위장한 침투공작이었다.
당시 위장월북으로 침투하였던 박헌영과 이승엽은 해주연락소를 차려놓고 남로당을 지휘하고 있었는데, 임화는 그들 밑에서 실무자로 일하였다.
훗날 미국에서 기밀해제된 문서에 따르면, 미군정 정보기관에 포섭되어 월북형식으로 이북지역에 위장침투하였던 남로당 핵심간부들 가운데는 임화 이외에도 이강국과 설정식이 있었다.
미국 정보기관의 위장침투공작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1948년 6월 미군정 사령관 하지는 박헌영에게‘미국에서 포섭한 공작원들을 유럽을 통해 평양에 보내겠으니 그들의 입국과 활동을 보장해 주라.’고 말하였다.
그러한 비밀침투계획에 따라 평양에 침투하기 위해 1949년 1월 미국을 출발하여 체코슬로바키아 프라하에 도착한 공작원은 윌리엄 리와 앨리스 현이었다.
이사민이라는 가명을 쓴 윌리엄 리의 본명은 이경선이다.
앨리스 현은 하와이에서 독립운동에 참가하였던 현순의 딸이다.
윌리엄 리와 앨리스 현이 프라하에 도착하였던 때로부터 47년이 지난 1995년 10월 서울신문 특별취재반은 워싱턴에 있는 미국 국립문서보존관리국에서 놀라운 사실이 담겨있는 문서를 찾아내었다.
그 문서는 1948년 12월 당시 워싱턴에서 월리엄 리가 김일성 수상(당시)과 박헌영 앞으로 직접 발송한 비밀보고서이다.
'미국 워싱턴 주재 동지 대표' 이사민의 이름으로 작성된 비밀보고서에는 미국공산당에 입당한 재미조선인 당원 26명이 "미국공산당의 허락을 받아 당내에 조선인그룹빠를 재조직하고 1개월에 1차 회집한다"고 하면서, '조선인그룹빠'의 활동, 조선인거류민의 분위기, 독립운동 상황, 미국 정세를 자세히 기록하였다.
또한 월리엄 리는 그 보고서에서 1947년 4월부터 체코슬로바키아의 중간연락거점을 통해 정기적으로 보고서를 제출하였으나, 그 연락통로가 불가능한 듯하여 앞으로는 자기에게 직접 연락해달라고 하면서 자신의 미국 주소를 적었다.
월리엄 리가 그 비밀보고서를 작성하였던 1948년 12월이라는 시점은 냉전체제의 대립이 격화되었던 때였으므로, 워싱턴에 있는 그가 체코슬로바키아를 통해서 평양의 박헌영과 직접 서신을 주고받는 것은 미국 정보기관의 '묵인'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평양으로 보냈다는 윌리엄 리의 비밀보고서가 47년 뒤에 워싱턴 국립문서보존관리국에서 서울신문 특별취재반에 의해서 발견된 까닭이 바로 거기에서 밝혀진다.
윌리엄 리의 비밀보고서에 나오는 미국공산당의 '조선인그룹빠'에 속하였던 당원 26명 가운데 당원대표 7명은 로스앤젤레스의 변준호, 김강, 현앨리스, 워싱턴의 이사민, 선우학원, 뉴욕의 신두식, 곽지순이다.
그들 가운데 유일한 생존자는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선우학원이다.
선우학원은 1997년 서울에서 펴낸 자신의 책 '한미관계 50년사'에서 이렇게 적었다.
"필자는 1948년에 미국에서 시인 임화 편에 '김일성, 박헌영 동지 앞'으로 편지를 전한 적이 있다. 그런데 그 편지가 한국전쟁이 발생한지 2주일 후 미국 정보원이 본인을 심문할 때 증거물로 제출되었다. 그 편지는 분명히 필자가 인편으로 보낸 편지였다. 그 편지가 미국 정보국에 들어가게 된 자세한 경위는 아직 미지수이다. 나의 추측으로는 임화 또는 박헌영 두 사람 중 하나가 미 정보부에 전달했을 것으로 본다."
미국 정보기관이 직접 파견한 윌리엄 리와 앨리스 현이 프라하에 도착하였을 때, 체코 정부당국은‘정치적 동기가 없는데도 북측에 망명하겠다.’고 하는 그들을 의심하였다.
그래서 일단 그들을 억류하고 북측에 억류사실을 통보하였다.
북측 정부당국도‘그들의 망명을 받아줄 수 없다.’고 통보하였다.
그러나 외무상이었던 박헌영은 내무성의 망명불허 결정을 뒤집고 외무성에게 지시하여 그들에게 입국사증을 내주었다.
박헌영의 도움으로 평양에 들어간 윌리엄 리는 조국전선 중앙위원회 조사연구부 부부장으로, 앨리스 현은 조선중앙통신사 번역부장을 거쳐 외무성 조사보도국에서 일하였다.
윌리엄 리와 앨리스 현이 짧은 기간에 고위층에 침투할 수 있었던 것 역시 박헌영이 적극 뒷받침해주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윌리엄 리와 앨리스 현은 유럽에 있는 중간연락거점에 편지연락을 몇 차례 시도하였으나 답장은 한 차례도 받지 못하였다.
그 까닭은 그들의 정체를 의심하였던 내무성이 그들이 보내는 편지를 검열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분위기를 눈치챈 월리엄 리와 앨리스 현은 ‘유럽여행을 다녀오겠다.’고 정부당국에 요청하였다.
내무성은 당연히 출국불가를 통보하였으나, 이번에도 박헌영의 지시로 외무성이 출국허가를 내주었다.
그러나 그것은 함정이었다.
평양을 빠져나간 그 두 사람이 모스크바 공항에 내렸을 때,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은 북측의 안전국 요원들이었다.
안전국 요원들이 그들의 짐을 뒤지니 조선인민군에 관계된 비밀자료들을 비롯하여 그 동안 수집한 첩보문서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처럼 남로당 최고지도부가 미국 정보기관에 간첩으로 포섭되어 암약하였으니, 당시 남측의 사회변혁운동이 좌절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1949년 9월 18일 남로당 서울시당 핵심간부들이 이승만 정권에 투항하였다. 그들이 넘겨준 정보에 의하여 9월 21일 200여 명이 체포되었고, 9월 24일에는 65명이 체포되었다.
9월 25일에는 남로당 강원도당 위원장이 투항하였다.
이승만 정권은 1949년 10월 1일부터 11월 30일까지 두 달 동안을 '자수주간'으로 정하고 집중공세를 가하였다.
10월 18일 이승만 정권은 진보성향의 정당과 사회단체 133개의 등록을 취소하여 '불법화'하였다.
그 기간 동안 서울에서만 1만2천196명이 투항하였고, 경상북도에서는 1만8천669명이 투항하였다.
10월 15일에 체포된 정백은 12월 27일 기자회견을 열고 전향을 선언하였다. 1950년 6월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까지 투항한 사람들은 약 10만 명이었다. 이승만 정권은 전쟁이 일어난 직후 투항자들을 모두 학살하였다.
"자수하여 남조선정부조직에 침투하라"고 하였던 박헌영의 지시는 이렇게 남측의 사회변혁운동을 완전히 무너뜨렸다.
그 무렵 미군정이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새로 세워질 나라의 사회체제가‘사회주의체제로 되어야 한다.’고 응답한 사람은 70%였고‘공산주의체제로 되어야 한다.’고 응답한 사람은 7%였다.
불과 14%의 응답자만이 새로 세워질 나라의 사회체제가‘자본주의체제로 되어야 한다.’고 응답하였다.
일제식민지체제가 해체되어 해방의 새날을 맞이한 조국에 사회주의체제가 세워지기를 바랐던 70%의 정치적 요구는 무참히 짓밟히고 말았다.
3. 분당파의 미필적 고의
남측의 사회변혁운동이 미국 정보기관의 와해공작과 이승만 정권의 탄압으로, 그리고 전쟁시기 대량학살로 좌절한 때로부터 어느덧 50년 세월이 흘러갔다.
시대가 바뀌었고 세대가 교체되었다.
영원한 불모지처럼 보였던 땅에서도 어느덧 사회변혁운동의 자생적 움직임이 싹트기 시작하였다.
1990년대 중반에는 민주노총과 전농을 비롯한 진보적 근로대중조직들이 새로 일어섰고, 2000년대에 들어와서는 진보정당이 창당되었고 연대전선도 형성되었다.
이로써 사회변혁운동은 좌절한지 반세기만에 전략거점과 투쟁진지를 다시 갖추게 된 것이다.
그런데 주목하는 것은, 50여 년 전에 이 땅의 사회변혁운동을 분열공작과 와해공작으로 교살하였던 제국주의 정보기관이 여전히‘중앙정보국 한국지부’라는 이름으로 암약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남측언론은‘미국 중앙정보국이 2007년 12월에 실시된 대선기간에 수많은 공작원들을 추가로 파견하였다.’는 소식을 전하였다.
그들에게 맡겨진 중대한 임무는, 반세기 전에 그들의 선배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남측의 사회변혁운동이 더 장성하기 전에 분열, 와해시키는 것이다. 그들의 분열공작, 와해공작이 노리는 첫 번째 목표는 민주노동당일 것이다.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진보정당들은 언제나 미국 중앙정보국이 노리는 첫 번째 공작목표로 되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지금 공교롭게도, 민주노동당이 분당위기에 휘말려 들었다.
대선에서 패배한 후유증으로 그렇지 않아도 위기감이 감돌고 있는 상황에서 분당파가 들고일어난 것이다.
대선패배와 분당위기는 민주노동당을 창당 이후 가장 커다란 시련으로 몰아넣었다.
중앙정보국 한국지부는 민주노동당이 겪는 분당위기를 지켜보면서 속으로 쾌재를 부를 것이다.
민주노동당이 망하기를 바라는 한나라당을 비롯한 수구우파세력들 모두가 분당파의 출현을 기뻐하며 반기고 있을 것이다.
자기들이 해야 할 일을 분당파가 대신 해주고 있으니 어찌 그렇지 아니하겠는가.
성장단계에 있는 생물유기체를 인위적으로 갈라놓으면 생명력을 잃게 된다. 이것은 생물학의 법칙이자 진보정치의 법칙이기도 하다.
아직 성장단계에 있는 진보정치운동에게 분열은 그 자체가 쇠퇴와 몰락의 전주곡으로 들린다.
진보정치운동이 단결과 통합과 연대를 자기의 생명처럼 소중하게 여겨야 하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분당파는 진보정치운동을 둘로 쪼개놓음으로써 중앙정보국 한국지부가 추진하려는 분열공작을 앞질러 대행해주고 있으며, 한나라당과 수구우파세력에게 만족과 기쁨을 주고 있다.
분당파는‘진보정치운동을 쇄신하고 혁신하기 위해서 진보신당을 창당하는 길을 선택하였다.’는 어처구니없는 말장난을 늘어놓았지만, 네덜란드 국가안보국이 좌파정치운동을 분열시키기 위하여 좌파신당을 창당할 때도 아마 그런 말장난을 늘어놓으며 거짓명분을 찾았을 것이다.
그러나 분당은 어디까지나 분열이다.
명백하게도, 분당은 성장단계에 있는 생물유기체를 인위적으로 갈라놓아 생명력을 조금씩 앗아가는 잔인한 정치적 살상이다.
분당은 절대로 신당창당이 될 수 없다.
미필적 고의에 의한 범행이라는 법률용어는 분당파의 분열소동에 정확하게 들어맞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