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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한국전쟁과 레드 콤플렉스, 학문의 자유 - 김귀옥

작성일 2002.02.02 작성자 통일위원회 조회수 5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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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논문은 2000년 6월2일 학술단체협의회가 주최한 '한국전쟁 어떻게 끝낼 것인가' 제하의 학술토론회에서 발표된 내용입니다.


한국전쟁과 레드 콤플렉스, 학문의 자유

김 귀 옥*

1. 머리말

그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우리는 지난 일년 내내 새 천년을 노래하며 2000년 1월 1일에는 무언가 파격적인 새로운 일이 일어나기를 기대했다. 2000년 첫 날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밀레니엄 버그(millenium bug), Y2K에 대해 많은 세계인들은 집단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날이 되어도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은 것을 사람들은 오히려 이상하게 여길 정도였다. 전혀 새로운 일이 일어나기 바란 것은 사람들의 의식, 무의식 속에 들어와 있었던 20세기에 대한 환멸 때문이 아니었을까?

지난 극단의 시대, 20세기는 '악이 선을 이긴 시대'(조세희, 1997)였고 특히 한반도에서 그랬다. 그 악의 뿌리는 분단과 전쟁이었다. 악의 꽃은 50년이 넘도록 살아남아 있다. 악의 꽃이 만개했던 그 벌판은 금세기말 탈냉전과 새로운 경제전쟁의 바람으로 다 말라가고 있다. 그러나 그 꽃은 시들어 가면서도 독소를 풍기고 있다. 그 꽃의 이름은 '레드 콤플렉스'이다.

레드 콤플렉스는 이 땅의 수만의 사람들을 죽이고 생매장하고 내쫓고 바꾸기를 강요했다. 그것은 인류가 몇 백년이 걸려 만들고 지켜온 사상의 자유, 학문의 자유를 '빨갱이'라는 이름 하에 헌신짝처럼 버리도록 만들었다. 테일러(A. J. P. Taylor)의 지적대로 지난 냉전의 시대에는 서구에서조차 학문의 자유가 억압당했고 학문이 객관성을 잃었다. 평화라는 말조차도 냉전에 덫에 걸려 사형장에서 교수 당해야 했다. "김일성보다 지독한"이라는 말조차 국가보안법의 대상이었다. 반공주의 앞에서는 현장성을 제일의로 하는 기자정신도 실종되어 버렸다. 우리의 경제가 북한에 비해 남한이 월등하게 높아지기 시작한 1980년대이래(황의각, 1992)로도 레드 콤플렉스는 각종의 사건 한가운데 우뚝 서 있었다. 냉전을 대신하여 21세기를 평화의 시대로 맞이하기에 여념이 없는 즈음에도 한반도에서 사라지지 않은 레드 콤플렉스는 1993년 전직 통일부총리 한완상(현 상지대 총장)에 이어 1998년에는 대통령자문정책위원장 최장집(현 고려대 교수)을 현직에서 내쫓는 악행을 저질렀다. 1999년에는 소위 '서해교전'이라는 사건에 직면하였다. 이 또한 레드 콤플렉스를 무기로 한 극우 세력과 극우 보수 언론이 주도한 결과이다(강정구, 1999).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21세기도 낡은 악을 껴안은 채 시작하고 있다.

그러한 레드 콤플렉스는 언제 한반도에 뿌리를 내렸을까? 혹자는 그것이 일제 시대에 발화했다고 한다. 혹자는 해방되어 분단과 신탁통치 논쟁 속에서 좌익들이 찬탁하는 통에 생겼다고도 한다. 그러나 적어도 1950년 한국전쟁 이전까지만 해도 반공이데올로기는 있었더라도 민중들에게 전횡될 수 없었고 지배이데올로기로서 절대적 지위를 누릴 수는 없었다. 반공이데올로기가 지배이데올로기로서 공고화·제도화·내면화되어 온 것은 한국전쟁을 계기로 하면서였다(김동춘, 1997; 서중석, 1999; 김진균·조희연. 1985).

이 글에서는 한국전쟁이후 빚어진 레드 콤플렉스에 의해 또는 레드 콤플렉스에 저항함으로써 수난 당한 학문의 자유를 연대기별로 살펴보고 각 사건들의 함의와 쟁점을 짚어보기로 한다. 이 글은 특히 1987년 민주화항쟁 이후 빚어진 레드 콤플렉스에 걸린 학계를 중심으로 한 학문 탄압의 사건들에 주목한다. 단, 이 글은 한국전쟁이 어떤 과정과 계기를 통해 레드 콤플렉스를 생산 및 재생산하게 되는가에 대해 논의의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레드 콤플렉스에 걸린 학문이 진실한 연구, 학문의 자유를 지키고 나아가 레드 콤플렉스 자체를 해체시키기 위한 실천활동에 주목할 것이다. 또한 레드 콤플렉스에 걸린 수많은 일반 언론인이나 지식인, 정치인들의 필화사건이나 노동자나 각 사회운동세력들의 필화사건들에 대해서는 이 글에서 다루지 못했음을 밝혀두고자 한다.

2. 레드 콤플렉스와 학문의 자유

1) 한국전쟁의 기형아: 레드 콤플렉스

한국전쟁 이전까지 남한의 이데올로기 색채는 중도 좌에서 극좌까지의 좌 우위의 스펙트럼을 보였다. 이러한 색채가 완전히 역전하게 된 것은 한국전쟁을 계기로 해서이다(손호철, 1991).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남한의 어떠한 진보적인 세력도 좌절되고 심지어는 중도파나 온건우파가 좌파로서 정치적 위상으로 내몰리게 되는 상황이 되었다. 분단 또는 냉전을 거부할 세력이 사실상 이 땅에서 거세당하게 되었다(김진균·조희연, 1985).

이제 한국전쟁 이후 반공이데올로기는 공히 지배이데올로기로서 정당화되어 제도화 및 일상화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물론 여기서 한국전쟁이라는 변수 자체가 레드 콤플렉스를 지배이데올로기로 만드는데 유일한 변수인가에 대해서는 의문을 가져보아야 하고 심층적인 연구가 필요로 된다. 그럼에도 한국전쟁이 결과한 동족상잔의 비극은 레드 콤플렉스를 지속적으로 생산하는 원천 그 자체이다. 1999년 가을 미국 AP통신이 노근리사건은 미군에 의한 양민학살사건이라고 보도하기까지는 노근리사건뿐만 아니라 한국전쟁 당시 무수한 양민학살사건에 의해 희생당한 유가족의 신소·신원을 해도 '빨갱이'라는 말로 일축을 당했다. 오히려 당시 학살사건 관련 사진들은 대개 '괴뢰군의 천인공노할 학살' 현장의 사진으로 등장하여 반공교육의 자료로 사용되곤 했다. 미군 외에도 국군이나 서북청년회와 같은 반공청년단들의 무차별적인 학살 사건들에 대해서도 당사자나 유가족들은 반공 괘씸죄에 걸리지 않기 위해 진상에서 멀어져야 했을 뿐만 아니라 기억 자체를 왜곡시켜야 했다. 1980년 5.18 광주 항쟁조차도 남파간첩이 조정한 사건으로 탈바꿈하였다. 광주항쟁의 진상을 밝히려 했던 대학생들이나 언론사 기자들이 유언비어 유포혐의로 계엄사에 끌려가야 했다.

심지어 한국에서 1987년 이전까지 노동운동이나 여타의 사회운동이 불온시되었던 데에도 한국전쟁의 영향이 지대하다. 해방 당시 60만 명의 전평(전국노동자평의회)이 한국전쟁으로 사라지자, 노동자계급을 사회 기본 세력으로 하는 공산주의나 북한에 대한 반격 공세는 노동운동 또는 노동조합을 곧바로 친공(용공)운동 또는 용공단체라는 발상을 심어놓았다. 그런 부정적 관념은 박정희 개발독재의 발전이데올로기와 결합되어 노동운동이나 사회운동의 합법공간을 극도로 축소하여 나아가 민중들의 양심의 자유는 고사하고 정당한 생존권 주장조차도 거의 불식시키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그렇다면 오랫동안 한국의 지배이데올로기의 최정점에 있었던 레드 콤플렉스 또는 반공이데올로기란 무엇인가? 반공이데올로기란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사상 이상으로 '주로 자본주의체제의 문제점과 이것이 빚어내는 체제변혁운동 및 사회적 갈등의 실상을 은폐, 왜곡시키면서 자본주의체제를 정당화시키는 효과를 낳는 이데올로기'(한국산업사회연구회 편, 1991: 32)로 볼 수 있다. 미국의 반공이데올로기로 표현되는 맥카시즘(McCarthyism)의 경우에도 맥카시 자신과 공화당의 정적을 숙청하기 위한 수단으로 그것이 이용되었다. 그것은 1950년대 미국의 정치·사회·문화 전반을 극단적이고 광신적인 반공주의로 몰고 나간 극우 반공·보수의 반동적 사상과 체제를 말한다. 이는 미국 민주주의의 기본이념인 양심과 사상의 자유·종교적 관용·언론의 자유·학문의 지성·개인의 가치와 제반 권리 등을 '반공'의 기치 하에 박탈할 수 있는 '반미행위처벌법'을 제도화하였다(리영희, 1999). 맥카시즘은 1950년대 중반 이후 미국에서 배척되었으나 그것은 국론을 분열하고 국민을 이간질해 상호 적대시하게끔 만드는 파괴적 우상(강준만 외, 1997)의 대명사로 기억되고 있다.

국가나 지배계급은 대략 네 가지 구성 요소로서 개인들에게 반공이데올로기를 내면화시켜 왔다.

첫째, 물리적 요소. 국가기구로서의 군대와 경찰, 준국가기구인 서청과 같은 반공단체 등의 폭력기구에 의한 인신구속, 고문, 투옥 등은 개인들에게 극도의 공포심을 유발하여 반공이데올로기를 강제적으로 수용하도록 만든다(박지동, 1996; 김귀옥, 1999). 현대사에서 전반적으로 폭력기구는 존재하지만 특히 정당성이 취약했던 1945년 이후 1950년대까지 국가는 주로 이러한 폭력기구를 통하여 반공이데올로기를 실현하였다. 제주도 4.3이나 한국전쟁 같은 시기에는 자신이 빨갱이가 아님을 입증하지 못한다면 생존 자체가 알 수 없는 형편이었다. 심지어 반공의 화신으로 등장하는 월남인의 많은 사람들은 1950년 12월 UN군과 국군의 북한지역 후퇴과정에서 자신이 빨갱이가 되지 않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월남해야 했던 일도 있었다(김귀옥, 1999).

둘째, 제도적 요소. 행정 명령, 지시, 집행, 각종 법규와 제도의 요소 또한 일상인들의 일상적인 삶을 지배하며 반공 이데올로기를 수용하게 하는 헤게모니적 요소로 된다(박지동, 1996). 반공의 제도 한가운데 국가보안법이 놓여 있었다. 1948년 12월에 만들어진 국가보안법에 이어 한국전시하 더욱 엄중하고 간편한 법률로 '비상사태하의 범죄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령'이 대통령 긴급명령 제1호로 공포되었다. 1961년 7월 3일, 박정희 혁명정부 하에서 '반공법'이 제정되었다. 1970년대 중반 만들어진 긴급조치9호는 두 법을 남용한 것이었다. 1961년부터 1980년까지 정치규제 관련 각종 법률에 의해 검거된 인원 총 11,384명 중 국가보안법과 반공법 해당자가 54%에 달했다(박원순, 1994). 죄형법정주의를 파괴하며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침해하는 강권으로서 존재해 왔던 국가보안법은 민중들의 일상적인 삶을 지배하며 인권을 탄압하는 도구이며 동시에 평화통일의 걸림돌로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학술단체협의회, 1999).
셋째, 경제적 요소. 이는 민중들의 경제적 생존권과 관련되어 레드 콤플렉스를 내면화시키는 요소라 할 수 있다. 한국의 산업화가 본격적으로 추진되기 시작한 1960년대 이후 한국의 발전이데올로기인 근대화론은 일찍이 로스토(W.W. Rostow)의 "반공산당선언"에 기반 하여 제3세계 국가들에 이식되었다. 미국, 일본에 종속적인 국제분업체계를 가진 박정희 정권 이래로 경제발전전략은 저곡가·저임금·장시간노동을 기본으로 하여 '선발전·후분배'정책을 기조로 하였다. 국가는 우선 경제성장이라는 목표 하에 노동자계급이나 노동조합이라는 말조차도 금기시할 정도로 노동운동에 대해 억압적이었다. 1970년 전태일분신사건 이후 노동자들의 의식이 각성되기 시작하였고 1980년대 '노학연대'는 노동자들의 의식화, 조직화를 급진전시킬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노동자와 그 조직이 국가보안법의 표적의 대상이 되었다. 1990년 현재 구속노동자 중 국가보안법 구속자의 비율이 23%에 달한다(박원순, 1994; 노중기, 1995).

넷째, 헤게모니적 요소. 그것의 대표적인 기구에는 교육기관, 언론기관, 종교단체 등으로서 이는 민중들에게 레드 콤플렉스를 교육 속에서 가장 자연스럽게 주입시키는 요소가 된다. 이것은 앞선 요소들의 폭력적인 방식보다는 헤게모니적으로 민중에게 지배이데올로기를 정당시하고 세뇌시키는 효과를 낳는다. 헤게모니적 기구는 두 가지 방향으로 민중에게 반공이데올로기를 주입시킨다. 하나는 직접적인 반공이데올로기 교육이나 선전이고 다른 하나는 자유민주주의이데올로기 교육이다. 전자는 정부 수립 후 정부나 준국가기구가 거의 강제적으로 실시해온 반공교육이다. 학도호국단, 반공윤리교육, 학문 연구, 반공웅변대회, 글짓기, 포스트, 체력장, 반공사진전, 광고, 뉴스, 각종 T.V. 프로그램, 교회 설교 등은 반공교육을 일상화하는 주요 프로그램으로 작동해왔다. 동시에 자유민주주의 이데올로기 교육은 사회주의에 대해 자본주의가 우월함을 입증하는 한편, 미국우월주의, 개인주의, 황금만능주의, 기능주의 이데올로기를 만연시킴으로서 반공이데올로기가 자연스럽게 수용되도록 하는 효과를 갖고 있다.

이상의 네 가지 요소는 혹은 분리되어 혹은 결합하여 반공 이데올로기를 강화시키고 사회적으로 확산시키고 일반인들에게 주입하고 사회화·내면화시켜 왔다. 뿐만 아니라 반공이데올로기를 사용하는 지배계급조차도 그것이 허위의식임을 의심치 않고 정당시하게 되었다. 한국의 반공이데올로기는 인적·물적 토대를 형성하여 무소불위의 위력을 갖춰 사회 모든 영역의 자유로운 활동을 억제하여 왔다.

2) 학문의 자유

학문의 자유는 근대 사상과 법, 제도에서 국민의 기본권에 해당하는 권리이다. 헌법 제 22조 1항은 "모든 국민은 학문과 예술의 자유를 가진다"고 규정하여 학문의 자유를 국민의 기본권으로 밝혀두고 있다. 학문의 자유라 함은 네 가지 내용을 가진다.

(?) 연구의 자유: 연구라 함은 사색, 독서, 조사, 실험 등에 의하여 진리를 탐구하는 행위를 보장하는 자유

(遁) 연구결과발표의 자유: 연구결과를 외부에 공표 하는 자유. 대학의 강의실 이외의 집회에서 발표하거나 학술지, 또는 저서로써 발표하는 경우.

(?) 강학의 자유: 연구의 자유의 연장선상에 있다. 대학이나 고등교육기관(한국과학원 등)에 종사하는 교육자가 자유로이 교수하거나 강의하는 자유.

(?) 학문적 집회·결사의 자유: 학문을 공동으로 연구하거나 발표하기 위하여 집회를 개최하거나 단체를 결정하는 자유(권녕성, 1999: 362-363).

이러한 학문의 자유도 제한의 대상이 되는가? 법학자 권녕성에 따르면 연구의 자유는 외부와의 연계성이 비교적 희박하므로 사상의 자유에 준할 정도로 고도로 헌법적 보장을 받는다. 반면 연구결과발표나 강학, 집회·결사의 자유는 헌법 37조 2항에 의하여 최소한의 제한을 받는다고 보고 있다. 그럼에도 학문의 자유는 다원성, 개방성, 자율성을 특징으로 하기 때문에 학문적 활동이 헌법적 질서를 부정하는 내용일지라도 그것이 이론적 탐구의 단계에 머물러 있는 한 학문의 자유로서 보장된다(권녕성, 1999).

한국의 자유로운 학문을 수호하는 움직임은 레드 콤플렉스로서 현저하게 위축되었거나 왜곡된 사회현실을 객관적으로 연구하고 그 결과물을 강의하며 발표하는 데로부터 출발하고 있다. 학문적 성과가 학문적 논쟁이 아닌 공안당국에 의해 재단되고 침해되어서는 안 된다는 기초적인 인식에서부터 출발하고 있다.

이제 남한 사회에서 레드 콤플렉스가 학문의 자유를 어떻게 억압하였는가, 또는 학문은 레드 콤플렉스에 어떻게 저항하였는가를 살펴보기로 하자.

3. 레드 콤플렉스와 학문의 자유의 투쟁사

1) 전사

한국 현대사에서 레드 콤플렉스와 학문의 자유가 양립할 수 있을까? 반공이데올로기가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졌던 시대, 자유로운 학문과 지식인, 학생들이 있을 수 있었을까? 일제시대 이래로 학문의 자유는 없었고 해방후 (단독)정부가 수립되고 한국전쟁을 겪은 후 학문의 자유는 여전히 보장된 바 없었다.

관변 지식인은 시기마다 지배권력과 결탁하여 지배권력을 정당화시키고 지속시키는 일마저 서슴지 않았다. 일제시대 수많은 지식인들은 일제 권력에 기생하여 민족개조론, 황국신민론 등을 부르짖었다(임헌영, 1993; 반민족문제연구소 엮음, 1993; 김삼웅 외, 1990). 유신의 독재치하에서나 신군부독재정권의 등장에서도 지식인들은 독재권력에 무릎꿇어 권력의 시녀 노릇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에 반해 어둠을 밝히고자 했던 지식인들의 학문의 자유를 향한 투쟁은 어떤 시대에도 그친 적이 없었다. 해방 공간에서 지식인들의 자주, 민주, 통일의 새로운 나라 건설을 위한 각종의 활동, 1960년대 이후 각종 민주화항쟁, 1960년 4월혁명, 6.3 항쟁, 1970년대 반유신투쟁 때에 지식인들은 각종 성명서를 발표하거나 집회를 개최하는 등과 같은 활동을 하였다(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 1997).

본격적인 학문의 자유라는 기치를 내건 사건으로 1977년 해직교수들이 중심이 되어 발표한 『민주교육선언』과 1978년 전남대 교수 11인과 성래운 교수가 발표한 <우리의 교육지표> 사건을 들 수 있다. 그 무렵 한양대 리영희 교수가 쓴 『우상과 이성』과 『8억인의 대화』가 공안당국에 구속 기소되는 사건이 생겼다. 1979년의 크리스챤 아카데미 사건도 빼놓을 수 없다. 사건 결과 아카데미의 교육간사 6인은 '불법 지하용공서클을 구성했다'는 혐의로 연행되어 불법 장기구금, 무자비한 고문을 겪고 반공법 위반혐의로 기소 당했다(서울대학교교수민주화운동50년사발간위원회, 1996;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 1997).

1980년 서울의 봄으로 해직교수들이 학교로 돌아오고 잠시 학문의 자유가 만개한 듯 했다. 그러나 제비가 너무 일찍 날아온 것일까? 그 해 봄이 가기도 전에 1980년 5.17 서울대의 한완상 교수가 예비검속으로 구속되었고 7월 30일에는 서울대의 김진균, 변형윤, 이명현 교수가 강제 사직서를 제출해야 했다. 그때 전무후무한 전국에 걸쳐 수 십명의 교수가 대량 해직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5.18광주민주화항쟁이 좌경용공의 선동에 의해 일어난 소요사태로서 규정되었던 1980년, 약 4개월간의 휴교령에서 풀려나 개강을 준비하던 8월 26일 서울대학교 당국은 700여 교수들을 모아둔 자리에서 "교수들이 확고한 국가안보의식과 시국관을 가지고 대학의 건강을 회복하는데 밑거름이 되어달라", "학원사태의 악순환은 국력과 학문의 발전을 크게 저해하는 요인으로써 작용함을 누차 경험해온 우리로서는 이 같은 악순환이 단절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을 결의를 했다. 학교와 학문은 죽었다. 적어도 1987년 민주화항쟁으로 신군부독재정권이 항복을 선언하기까지.

진정한 의미에서 한국사회에서 학문의 자유를 논할 수 있는 것은 1980년대 후반부터이며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반공 이데올로기, 레드 콤플렉스와의 치열한 싸움이 전개되어 왔다.

2) 레드 콤플렉스와 학문의 자유의 투쟁사

1945년 8·15 이래로 1987년, 실로 거의 40년만에 민족·민중적 학문은 르네상스기를 맞이했다. 비로소 오랫동안 민중의 알 수 있는 자유를 질식시켜온 레드 콤플렉스에 '학문의 자유'로서 저항하고 왜곡되고 비틀린 역사를 바로잡고 우리 사회가 나아가 길을 자유롭게 모색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도 반공 이데올로기 국가기구와 관련 기구들은 학문의 자유를 탄압하고자 부심하였다. 그로 인해 탄압 받은 사례는 적지 않다. 이 글에서는 대표적인 사건으로 8건을 선정하였다.

첫째, 1988년 서관모사건(일명 김동길사건)
둘째, 1989년 이재화(실명 이승환) 사건
셋째, 1991년 서사연 사건
넷째, 1993년 한완상 사건. 일명 『한국전쟁과 한국사회의 변동』(풀빛, 1992) 사건
다섯째, 1994년 경상대 『한국사회의 이해』 사건
여섯째, 1997년 이장희 사건
일곱째, 1997년 박지동 사건
여덟째, 1998년 최장집 사건

이하의 글은 위 사건의 배경, 전개과정, 사건 발단의 주체 문제, 문제의 초점 등을 중심으로 짚어보겠다.

① 학문의 자유 지킴을 위한 싸움의 시작: 1988년 서관모사건(일명 김동길사건)

1988년 6월 3, 4일의 한양대학교, 3,000 여명의 연구자, 학생, 시민들이 한 자리에 모인 것은 얼마만의 일이었던가. 학술단체연합이 개최한 제1회 학술단체연합심포지엄에서 김진균(서울대 교수)은 학문의 종속화를 반성하고, 우리의 역사현실에 뿌리박은 '민족적 민중적 학문'을 지향함을 제창하였다. 이 자리에서는 민주화와 새로운 사회, 민족적 민중적 학문에 대한 열망을 실은 논문들이 쏟아져 나왔다. 3, 4일 이틀간 20시간에 달하는 토론의 백미는 서관모(충북대 교수)의 "중간 제계층의 구성과 민주변혁에서의 지위" 발표논문과 한상진(당시 서울대 교수, 현 한국정신문제연구원 원장)의 토론이었다. 또 다른 토론자인 박형준(현 동아대 교수)이 권투글러브와 골프채의 싸움이라고 표현했던 그들의 좁혀지지 않는 토론은 다른 관점을 가진 학자가 서로 어떻게 토론하며 공존해야 하는가를 시사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가졌다. 또한 서관모의 연구는 1980년대 말 사회구조와 그 성격을 분석적으로 설명했고 1970년대 이래 일어나고 있는 사회변혁의 흐름을 '민족해방 민중민주주의론'으로 명명했다. 나아가 학술 연구에서도 사라졌던 노동자계급을 최초로 학문적 용어로서 복원 및 정식화시켰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가지고 있었다.

문제는 전혀 다른 곳에서 발생했다. 1988년 6월 8일 『조선일보』의 김동길 칼럼.
자유민주주의가 국시가 되는 것도 힘에 겨워서 허덕이는 이 나라에서 「부르좌적 자유주의는 싹이 노랗다. 이제는 노동자계급이 헤게모니를 잡는 민족해방 민중민주주의 변혁이 될 수밖에 없다」는 주장을 어느 국립대학의 젊은 교수가 들고 나와 토론장의 열기를 더욱 뜨겁게 하였다는 것이다. (……) 나를 정말 놀라게 한 것은, 대학교수가 북한당국의 「혁명노선」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이론을 공공연하게 내세워도 잡혀가지 않는 그런 세상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드디어 새 시대는 왔는가. 진정 새시대가 온 것이라면 말도 하고 글도 쓰고 행진도 하자. 누울 자리 보면서 다리를 뻗지 않고는 지키지 못할 것이 자유민주주의다. 귀 있는 자여, 들으라.

김동길(당시 연세대 교수)의 칼럼은 서관모의 논문을 제대로 인용했는가하는 문제는 둘째로 치더라도 논문자체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음을 보여주었다. 그는 서관모의 논문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신문 기사에 난 용어만을 놓고 북한의 혁명노선을 따라 혁명을 선동한 것이라고 억측했다. 김동길이 피워 올린 불길은 서울시검 공안부가 서관모에게 검찰출두를 요청하는 사태로 번져나갔다. 이에 10개 학술단체들과 민교협이 합동으로 벌린 서명작업에 300여명의 교수들이 동참하였다. 또한 토론자였던 한상진마저 서관모의 논문은 한국사회가 후진국 중 특이한 자본주의 발전을 이루는 과정에서 노동자, 자본가 등 다양한 계급분화가 고도로 진척되었음을 분석하고 있는 박사학위논문의 논지를 발전시킨 것임을 주장했다. 진보학계의 빠른 대응과 민주화 운동의 영향을 입은 여러 언론들이 이 사건을 냉철하게 보도함으로써 학문의 자유를 보장하라는 여론이 드세어 졌다. 사면초가에 몰린 검찰은 결국 소환 대신 서관모의 견해서를 우편으로 제출 받은 뒤 사건을 무혐의 처리하고 말았다.

이 사건은 자유로운 연구와 학술 발표에 대해 김동길과 조선일보라는 극우 언론이 여론몰이에 나서고 그에 부화뇌동한 공안당국의 국가보안법 잣대로 들이대려 했던 데 따른 결과이었다. 결국 학문의 자유를 압살하려 했던 매카시즘이 스스로 낡은 발상인 것으로 자인된 것이었다. 이후 그의 연구는 노동자계급연구나 사회구성체 연구, 맑스주의적 사회과학 연구방법론을 사회과학계의 주요 파라다임이자 방법론의 하나로서 자리매김해 나가는 기폭제로 평가받게 된다.

② 국가보안법을 정면으로 돌파하려 했던 사건: 1989년 이재화(실명 이승환) 사건

민주화운동과 더불어 활발하게 전개된 1988년 통일운동으로 학생들과 연구자, 시민들 사이에 '북한바로알기운동'이 급속도로 퍼지고 있었다. 또한 당시 노태우정권은 북방정책으로 구 소련이나 중국, 헝가리 등 사회주의 나라와 관계개선을 하려고 했다. 또한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을 북한에 제의하여 북한을 '선의의 동반자'로 불러 기존의 북한 인식에 전향적인 사고를 보여주었다. 그럼에도 북한을 반국가단체로 규정해두고 있는 국가보안법을 철폐하지 못한 상태이다.

그러한 가운데 김일성이 주도적으로 활약했던 일제시대 만주지역 항일독립운동사를 연구한 국내 연구물이 발표되었다. 몇 년의 연구로 맺은 결과물인 『한국근현대 민족해방운동사』(백산서당, 1989)를 집필한 이재화(실명 이승환, 당시 남서울민청련위원장)는 1989년 12월 1일 국가안전기획부에 구속되었다. 그 직전 대검 공안부는 '좌익출판물·유인물 단속지침'과 함께 '좌익출판물' 103종을 발표하여 사회적 파장을 일으키고 있는 와중이었다. 당시 최병모 변호사는 "검찰의 출판물 단속은 위헌요소가 다분히 있다. 언론과 학문의 자유에 대한 탄압의 일환"이라고 못박았다(한겨레신문 89년 12월 1일자). 한국출판문화운동협의회도 출판계에 대한 공안조치에 맞서 "제6공화국과 출판탄압"백서를 발표하고 집단대응에 나섰다.

그의 연구에 대한 공안당국의 쟁점은 김일성이 동만주 일대에서 항일운동을 벌였던 사실이 있는가, 즉 김일성 가짜설 여부에 맞춰져 있었다. 당시 형사지법은 한국역사연구회장 앞으로 그와 관련된 사실조회를 요청하였다. 그 답변서는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에 대한 다양한 견해를 소개하되 '북한의 최고지도자 김일성이 동만 일대에서 항일투쟁을 벌였던 사실에 대해서는 부정하는 학자가 거의 없다'고 답변하여 김일성의 독립운동을 '비적행위와 같다'고 보는 이명영, 허동찬의 주장은 그 근거가 희박한 것으로 설명하였다(역사비평사 엮음, 1990: 399).

사법 당국은 이재화에게 국가보안법 위반을 이유로 징역 및 자격정지 각 1년을 선고했다. 국가보안법의 틀 내에서는 결코 객관적이거나 자유로운 김일성 연구나 일제 항일무장투쟁사를 연구할 수 없다고 결론 내린 것이다. 오히려 그러한 행위는 이적 행위이자 고무찬양행위로 판정되었다. 북한을 반국가단체로 규정하고 있는 국가보안법을 적용한 사법부의 판결은 당시 6공화국 정부가 추진하고 있던 북방정책이나 '한민족공동체방안'의 한 축인 실체로서의 북한과의 관계 개선정책과 관련지어 볼 때 자가당착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연구는 일제시대사 연구에서 김일성이 갖는 위상을 무시할 수 없는 것으로 연구의 지평을 넓히는 선봉장이 되었다.

③ 학문의 페레스트로이카 주창으로 반공의 덫에 걸린 연구: 1991년 서사연 사건

1991년 6월 27일, 국군기무사령부 및 검찰 요원에 의해 서울사회과학연구소 연구원들의 연행, 구속으로 시작된 청년 연구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사태가 발생했다(학문과 사상의 자유 탄압 및 학술연구자 불법연행·구속에 대한 공동대책위원회, 1992). 1987년 이래로 고양된 학문의 르네상스와 사회주의의 개혁·개방 분위기에서 새로운 사회주의 진보 이념 모색을 위해 공동 집필한 저작인 『사회주의의 이론, 역사, 현실』(민맥, 1991)이 공안당국의 철퇴를 맞은 사건이었다.

서사연 연구원인 신현준(서울대 경제학과 박사과정, 경기대 강사), 권현정(서울대 경제학과 석사과정), 이창휘(서울대 사회학과 박사과정, 사건 당시 육군 방위병 복무중), 송주명(서울대 정치학과 박사과정, 당시 육군 방위병 복무중), 한준(서울대 사회학과 석사졸업, 당시 육군 방위병 복무중), 홍성태(서울대 사회학과 석사과정, 당시 육군 방위병 복무중) 등이 치안본부와 국군기무사에 강제 연행되었다. 6명 중 4명이 구속되었다. 그 과정에서 연구소의 세미나 자료 및 운영관계자료, 각종 장비 일체를 수색, 압수 당하기까지 했다. 학문의 자유가 무자비하게 짓밟히는 순간이었다.

공안당국은 연구원들의 연구 및 저작활동내용이 '남한 현실을 미제국주의와 파쇼권력, 독점자본가계급에 의하여 노동자계급 등 민중이 착취당하고 있는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사회로 규정하고 (……) 계급동맹을 형성하여 민중민주주의혁명으로 파쇼정권을 타도'하는데 있다고 보아 북한의 주장과 동일하다고 주장하였다. 검사와 검찰측 증인 김영학(당시 공안문제연구소 소장)의 문답을 보자.

문: 1991. 7. 3.자 한국일보 기사를 보면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론"은 "친북한이 아니라 반북한"이라고 보도하였는데 증인의 견해는 다른가요.

답: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론은 주사파가 아니고 레닌파에 속하고 공산주의 지향적이고 반북한도 아니다. (……)

문: 여정동교수(서울대 국제정치학)는 신식민지주의란 "자본주의 세계체제에서 종속을 초래하는 자본주의 열강의 정책이나 체제"라고 규정하였는데 그런 사실을 아는가요.

답: 모릅니다.(이하 생략)(신현준 1심 공판기록 중에서)


이들의 주장내용이 '반북이 아니라'는 지적 외에는 어떠한 학문적인 진상 규명을 요하는 대답에 대해 모른다로 일관하는 김영학측의 답변은 지극히 비전문적이어서 그의 증언의 의도를 쉽게 드러내고 있다. 공안당국은 이들의 어떠한 연구활동내용도 반공이데올로기의 잣대를 대어 '반북이 아니다', 즉 '친북적이다'는 점에 초점을 맞춰 국가보안법을 적용하는데 급급했다.

직후 '학문과 사상의 자유 탄압 및 학술연구자 불법연행·구속에 대한 공동대책위원회'(공대위 공동대표 최장집·하일민)가 결정되었다. 공대위에 25개 학술관련연구단체들이 참여했고 서명작업에 착수했다. 연구원들의 소속 대학과 학과에서도 탄원서를 제출하였다. 신현준은 징역과 자격정지, 각 1년, 집행유예 2년, 권현정 징역 8개월 자격정지 1년, 집행유예 2년, 이창휘와 송주명 징역 8개월, 자격정지 1년이라는 실형을 선고받았다.

이 사건은 앞서 이승환의 사건과 유사하게 반북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어떠한 연구의 성과도 억압당하였고 남북기본합의서에 서명한 정부의 자가당착을 보여준 전형적인 사건이다. 이후 모든 학문의 자유 투쟁에서 국가보안법의 '반국가단체' 규정 문제가 쟁점으로 되었다. 또한 앞서 서관모의 연구와 마찬가지로 이 연구가 보여준 맑스주의 연구방법론은 학계의 주요 파라다임을 구축해 나가게 된다.

④ 극우 언론의 마녀 사냥: 1993년 한완상 사건. 일명 『한국전쟁과 한국사회의 변동』(풀빛, 1992) 사건

1993년 2월 문민정부의 출범. "어느 동맹국도 민족보다 나을 수 없다"는 김영삼의 대통령취임사는 국민들로 하여금 남북관계에 있어서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환이 올 것이라는 기대를 하도록 하였다. 그러한 문민정부의 견인차는 한완상, 전 서울대 교수이자 1993년 김영삼정부 1기 통일원 장관이었다. 1970년대와 1980년 진보의 상징이었던 한완상이 정부 고위 관리가 된 것은 세인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그는 취임 직후 3월 19일, 비전향장기수인 이인모씨가 고향인 북한으로 송환되는 데 주역을 맡았다. 정말 세상은 바뀐 것일까?

1993년 『월간조선』8월호.

- 통일원 장관께서는 한국전쟁의 성격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며 한국전쟁 개전 책임은 누구에게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한 장관은 "한국 전쟁을 북한이 일으켰다고 하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건 건전한 상식입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니까 그 점은 염려하지 마세요."

작년 말 대통령 선거가 있기 직전(12월 5일)에 한국사회학회 이름으로 한 권의 책이 출간됐다. (……) 한완상 장관의 대북관, 6·25 전쟁관, 통일관이 '민족은 영원하다'는 감상적 민족주의에서 나온 것인지, 아니면 실제로 수정주의 철학에서 북한을 바라보고 나온 '위험한 통일관'인지는 한 장관 스스로가 밝혀야 할 것 같다.

8월호는 이어 강정구(동국대 교수)를 인터뷰하여 그의 대북관을 "충격적"이며 그의 한국전쟁관련 논문을 "논문이 아니라 고발 대상"이라고 일축하였다. 8월 18일, 41명의 사회학자들은 월간조선의 기사를 학문·사상의 자유를 정면으로 도전하는 행위로 규정하며 명예손상 사과 요구를 했다. 이에 월간조선측은 서명학자들에게 "한국전쟁관과 대북관, 이념적 좌표를 양심적으로 공개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서명 학자들을 "쟁점을 피하고 있으며 비과학적이라"고 반박했다.

그 해 내내 한완상은 "청와대에 '빨갱이'가 있다"고 주장하는 극우 세력 및 언론과 직면해야 했다. 월간조선은 그해 12월호에 양동안(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을 인터뷰하여 "공직자 사상공개제도가 필요하다"는 기사를 실었다. 직후 한완상은 김영삼정부에 토사구팽 당하는 격으로 현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비록 한완상은 사법적 대상이 되지는 않았지만 극우 언론이 주도하는 여론몰이식 레드 콤플렉스, 마녀 사냥의 희생양으로 되고 말았다. 진보는 맹목의 보수에 또 패배당하였다.

⑤ 박홍총장의 지휘하에 자행된 학문의 자유 탄압: 1994년 경상대 『한국사회의 이해』 사건

"학생 운동권을 주사파가 지도하고, 그 뒤에는 사노맹이, 그 뒤에는 사로청이, 그리고 그 뒤에는 김정일이 있다." 김일성 북한 주석의 사망 직후인 1994년 7월 18일, 전국 4년제 대학 총장 모임인 한국대학교육협의회가 김영삼 대통령을 만나는 자리에서 박홍 총장이 던진 말이다. 박홍과 '대학과 나라를 걱정하는 한 교수'라는 익명의 사람이 장상환과 정진상 등의 교수를 빨갱이로 매도함으로써 학문의 자유가 또 탄압 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경상대학교의 『한국사회의 이해』 사건은 박홍총장의 지휘를 받은 안기부, 검찰, 사법부, 정체 불명 연구소의 합작품이었다.

『한국사회의 이해』(대학교양교재) 사건은 1994년 7월 27일 몇 십년만의 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한 여름에 시작되었다. 서점에 깔린 그 교양교재가 다른 책들과 함께 압수되고 '지이출판사' 대표에게 검찰 출두요구서가 날아왔다. 급기야 대검공안부장이 대학교양교재 내사를 발표하자 방송·언론사에서는 박홍 총장의 '빨갱이설'과 관련지어 『한국사회의 이해』의 집필자들을 거론했다. 또한 검찰측은 공안문제연구소의 본 교재에 대한 분석을 토대로 여론 재판을 전개했다. 그들은 그 교재가 '한국의 자본주의 발전을 폄하하는 북한의 입장'과 같은 것이다, 또는 '저자들은 주사파'라는 식의 억측을 했다.

이에 집필 교수 8명은 "학문적 성과에 대한 평가는 학문적 논쟁을 통하여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지, 공안당국에 의해 재단되어서도 안되고, 될 수도 없다"는 원칙에 따라 경찰의 출석 요구에 불응할 것을 밝혔다. 같은 무렵 전국 각지, 각 대학과 연구 단체들은 학문의 자유를 말살하려는 공안당국을 비판하는 성명서, 항의서한을 잇달아 발표했다. 8월 31일, 담당 판사(최인석)는 학문의 자유를 이유로 구속영장 청구를 기각하였다. 양심의 쾌재였다. 그것도 잠시. 11월 30일 검찰은 장상환과 정진상을 국가보안법 7조 등의 위반혐의로 창원지법에 기소하여 현재까지 공판이 진행중이다.


영장청구를 기각시켰던 담당 판사의 사유서를 보자.

(……)피의자들은, 자신들은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사회과학적 분석방법으로서 마르크스주의를 택하고 있을 뿐이지, 자신들의 사상이 마르크스주의적인 것은 아니며, 자신들은 북한의 체제 및 사회에 대하여 비판적인 시각을 갖고 있으며, (……) 법이 보호하여야 할 중요한 국민의 기본권인 점 등에 비추어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이 존재한다고 보기 어려운 이 건과 같은 경우, (……) 국가공권력의 개입보다는 대학자신의 자율적 조절 기능에 맡기는 것이 여러모로 낫다

반면 당시 공소문을 보면,

(……) 반국가단체인 북한공산집단의 활동에 동조하여 이를 이롭게 할 목적으로 표현물을 제작, 반포하고, 1994년 3월부터 같은 해 7월까지 1학기동안 경상대학교에서 동대학 수강생 950여명에게 위와 같은 내용으로 강의를 함으로써 국가의 존립, 안전이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한다는 정을 알면서 반국가단체인 북한공산집단의 활동에 동조한 것이다.

최소한이나마 학문의 자유를 지키려는 양심적인 판사의 사유서에 비해 볼 때 공안기관의 공소문은 극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그 공소문은 현 사회를 비판적인 관점에서 보는 것 자체를 친북적인 이적활동으로 몰아나가는 매카시의 광기를 뿜고 있다. 박홍을 비롯한 우익 지식인, 공안문제연구소와 같은 정체불명의 극우 연구소 등이 반공이라는 파시즘의 광기를 뿜어내며 여론을 조작하여 공안 사법 당국을 움직인 것은 앞서 서관모사건과 유사한 바 있다. 다른 사건들과 달리 이 사건은 교수들이 공동 집필한 교양교재와 강의, 시험자체가 공안당국의 대상이 되었다는 점에서 학문의 자유는 보다 심각한 상처를 입었다.

⑥ 통일 1세대의 꿈을 좌절시킨 레드 콤플렉스: 1997년 이장희 사건

1994년 '조문파동' 이후 남북간에는 침묵이 흘렀다. 김영삼정부는 '흡수통일론'만 반복할 뿐 더 이상은 남북 문제를 풀지 못했다. 1995년부터 몇 년간 북한은 최대의 물난리를 겪었다. 1997년에야 비로소 남한에서도 북한에 대한 식량지원운동이 전개될 수 있었다. 그러나 조선일보와 같은 극우 언론이나 이북5도청 기관지인 『월간 동화』 및 극우 단체들은 식량을 주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이유는 군량미로 사용된다는 것. 경색된 분위기에서 1997년 『월간조선』7월호의 "통일원의 이상한 통일 캠페인" 제하의 기사.

통일원이 MBC라디오와 텔레비전을 통해 4개월간 광고한 '통일 캠페인'이 북한의 연방제 통일을 연상케 하고 있어 논란이 일고 있다. 통일원 교육홍보국, 대학교수, 출판사와 광고회사가 합작한 캠페인은 '우리가 마음을 열어야 통일이 된다'며 '수도와 나라꽃, 그리고 공휴일도 바뀔 수 있다'는 내용으로 통일원 장관의 계인까지 찍혀 있었다. (……)

1995년 10월에 발행된 이 책[『나는야, 통일1세대』(천재출판사)]는 표지에 '어린이들이 정말 알아야 할 27가지 통일이야기'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이장희교수의 설명이 끝날 때마다 '북한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27편의 북한 실상을 소개해 놓았다.
월간조선사측은 이장희(외국어대 법학과 교수)가 이 책을 통하여 북한을 고무 찬양하고 이적행위를 했다며 학자의 저서에 대해 공개 고발했다. 이건개 의원도 이장희의 책을 연방제 통일을 조장하는 내용이라며 현행법 위반상황을 조사 보고하라고 통일부에 지시를 했다. 계속 되는 극우 언론과 단체들의 여론 재판이 잇달았다. 책이 발간된 지 2년이 다 될 때였다.

1997년 8월 25일, 경실련 통일협회는 월간조선을 상대로 법적 소송을 제기했다. 같은 해 10월 월간조선이 이장희를 고발하여 서울지검에 소환하여 조사를 실시했다. 12월 29일 이장희는 3개월간 출국금지 및 불구속 기소를 당했다. 1997년 12월 29일 서울지검은 이장희를 '반국가단체인 북한공산집단의 활동을 찬양·선전하거나 이에 동조하는 행위를 목적으로 하는 표현물을 제작·반포한 것'이라 하여 국가보안법 7조 5항과 1항을 적용시켰다. 반면 이동욱과 오제도는 무혐의로 처리되었다. 1998년 2월 11일 1심 공판이 시작되어 현재까지 진행되고 있다.

이 사건 역시 반공주의를 기치로 세운 극우들이 주도하는 구태의연한 여론몰이 재판사건이다. 극우세력들은 집단 히스테리증을 보이면서 남북의 상호 적대감을 부추겼고 약화되어가고 있는 반공이데올로기에 집착했다. 이장희 사건의 특징은 국가기구가 하청·용역 하여 우수도서로까지 선정된 저서가 극우세력에 의해 마녀 사냥을 당했다는 점이다.

⑦ 대선의 볼모: 1997년 박지동 사건

같은 시기에 학문의 자유가 또 반공의 덫에 걸렸다. 광주대학교 언론대학원장 박지동(신문방송학과 교수)과 자신의 오랜 연구의 결실인 『진실 인식과 논술방법』(일월서각, 1996)이 그랬다. 1997년 11월 28일 공안당국은 국가보안법 위반 피의사건으로 박지동을 인치구금하였다. 공안당국의 공소장을 보면, "북한공산집단은 정부를 참칭하고 국가를 변란한 목적으로 조직된 반국가단체로서 (……)" 시작하여 "국가의 존립안전이나 자유민주적 기본 질서를 위태롭게 한다는 정을 알면서 반국가단체인 북한의 활동을 찬양 선전 또는 이에 동조하여 이들의 활동을 이롭게 할 목적으로 위와 같이 제작, 반포한 것이다"로 끝난다. 이는 앞에서 인용한 한국사회의 이해 사건이나 이장희 사건, 서사연 사건의 공소문과 유사하게 시작하여 거의 똑같이 맺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사실여부와 상관없이 국가보안법 7조 5항 또는 1항을 적용시키기 위한 절차이다.

공안당국은 그의 책이 북한의 주체사상을 고무 찬양했고 피지배계급에 의한 사회주의 혁명을 정당화했으며, 이승만을 친미앞잡이로 격하시키는 반면 김일성의 항일투쟁을 올바른 투쟁이라고 주장하는 북한의 역사관을 찬양하였고 미국은 남북 분단의 주범이자 영구 분단을 획책하여 북한정권의 정통성만을 인정하였다고 공소를 제기하였다.

박지동은 출간 목적을 "불행하게도 이 사회의 청소년들은 외세와 못난 지배계층의 진실은폐 의도에 의해 어릴 때부터 진실추구를 위한 사고·사색과 행동의 습관이 붙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인식의 방법과 가치관의 방향정립에 다소 혼돈이 뒤따를 수도 있겠으나 진실 되게 써놓은 책들을 통해서나마 차근차근 풀어나가다 보면 선배들의 의식과 실천력을 뛰어넘어 지혜와 용기도 솟아날 것이며, 그리하여 갈등과 증오로 뒤얽힌 공동체의 무질서도 화합의 대로와 광장에로 인도해 낼 수 있을 것으로 믿어 마지않는다"라고 서문에 밝히고 있다.

유일상(건국대 신문방송학과 교수)은 그의 책이 '올바른 논리 전개를 위한 안내서로서 논술자가 오류에 빠지지 않고 객관성, 전체성, 심층성을 고려하면서 논술할 수 있게 하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대선 직전 레드 콤플렉스를 자극하려던 공안당국과 극우 언론들은 연구 및 학문발표의 자유를 전혀 보장하지 않았다. 심지어 학자가 독서하는 책들조차도 무차별적으로 압수하는 야만성을 보였다. 1998년 국민의 정부 들어 박지동은 보석으로 풀려나 불구속 기소상태에 있다.

⑧ 20세기 마지막 레드 헌트: 1998년 최장집 사건

대통령자문 정책기획위원회 위원장이 된 교수, 최장집은 1998년 김대중 개혁의 키잡이가 되었을 때 누군가는 그를 제갈공명에 비유했다. 그가 위원장이 되어 참여민주주의와 시민단체의 제한 없는 정치 참여를 위한 대통령의 정치철학을 모색 및 개발하고 나설 무렵. 『월간조선』98년 11월호에 "'6·25는 김일성의 역사적 결단', 최장집 교수의 충격적 6·25전쟁관"이라는 작문기사가 발표되었다.

그렇다면 월간조선측의 인용문과 그가 문제시하고 있는 최장집의 『한국민주주의의 조건과 전망』(최장집 저, 나남, 1996)원문을 대조해 볼 필요가 있다. 수많은 왜곡 인용가운데 최장집을 친북인사로 내몰기 위한 전형을 보자.

월간조선
원문:『한국민주주의의 조건과 전망』

이어지는 글에서 그는 <전쟁 초기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인민군에 가담하거나 북한군의 南進에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던 것도 사실이다(210쪽).
전쟁 초기 북한군이 남진할 때 많은 사람들이 북한통치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피난길에 올랐지만 동시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인민군에 가담하거나 북한군 남진에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미군의 개입과 무차별 공격에 따른 전환의 급박한 변화에 따라 점령정책은 더욱 강압적으로 변질되었다. 처음 북한은 토지개혁과 노동법 실시와 같은 사회경제적 개혁 그리고 당조직, 인민위원회, 대중단체의 조직과 참여기구를 확대하면서 전쟁목표의 달성과 남한주민의 지지를 확보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미곡의 강제공출, 주민통제가 강화되고 점령말기에는 의용군과 노력대원으로 징발되어 전선으로 강제동원이 수행되었다. 나아가 반혁명분자 또는 친일민족반역자라는 명목으로 많은 주민이 유혈적 처단의 희생물이 되었다. 이러한 점령지역에서의 북한통치는 전후 공산주의 공포증의 하나의 계기를 만들게 되었다(136쪽).

최장집 저서의 원문은 머리 떼고 꽁지 떼고 앙상한 뼈 한 조각만으로 형해화된 채 위의 인용문으로 탈바꿈되었다. 당시 조선일보사는 보도기사, 사설, 칼럼, 만평, 가십, 독자투고 등 모든 지면을 동원하여 최장집을 공격하였다. 당시 여당의 우당이었던 자민련 마저 최장집의 연구에 대해 "대한민국뿌리와 국체를 부정하는 위험한 시각"이라는 시비를 걸었다. 그러나 학계, 연구 단체, 사회 시민 단체, 정치계, 심지어 언론사들도 나서서 "마녀 사냥, 이제 그만!"을 주장하였다. 물론 최장집은 1993년 한완상에 이어 현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레드 콤플렉스는 개인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혔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 사건을 통해 레드 콤플렉스는 죽은 자식 붙들고 살리려는 낡은 시대의 부산물임을 웅변하였다는 점에서 최장집의 희생은 더 이상 학문의 자유의 패배만은 아니었다. 또한 1993년 한완상 사건 때와는 달리 학술단체, 학계, 사회단체들에게 연대하여 극우언론 및 극우세력들에 저항하며 학문의 자유를 지키려 하였다.

4. 문제와 쟁점

학문의 자유, 국민의 기본권을 헌신짝처럼 내던진 반공 이데올로기. 레드 콤플렉스에 대항하여 비틀리고 왜곡된 역사와 현실을 올바로 자리매김하려는 결연한 학문의 자유의 선언. 그런 과정에서 발생한 숱한 사건들 가운데 몇 가지 사건을 연대기순으로 정리해 보았다. 이제 사건들을 몇 가지 주제에 맞춰 짚어봄으로써 그 성격을 분명히 하자.

첫째, 여덟 사건을 일으키는데 공안당국보다 극우 언론이나 단체가 더욱 적극적이었다. 특히 서관모, 한완상, 한국사회의 이해, 이장희, 최장집 사건을 먼저 일으킨 것은 조선일보사나 한국논단 등과 같은 언론이나 박홍, 오제도 등과 같은 극우세력들이었다. 여기에 공안문제연구소나 통일문제포럼과 같은 연구단체가 등장하였다. 그들은 전문적인 연구물을 심사할 어떠한 자격도 갖추었다고 보기 힘들다. 사법당국은 사건의 연구물을 감정한 전문 학자들의 소견서를 그저 형식적 절차로 갖출 뿐 전혀 고려하지 않는 몰상식적인 태도는 세간의 빈축을 샀다. 이는 사법당국조차도 레드 콤플렉스의 덫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음으로 입증할 뿐이다.

둘째, 사건의 초반 분위기와 결과는 상당한 거리를 보이고 있다. 여덟 건 중 실형을 받은 사건은 이승환과 서사연 사건의 경우뿐이다. 사법 당국은 국가보안법 7조가 규정하는 반국가단체를 이롭게 하고 고무·찬양했다는 흉악범들(?)에게 1년 징역(서사연의 경우 모두 집행유예) 이하의 실형을 선고하였다. 여기서 당국조차도 자가당착에 빠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서관모, 한국사회의 이해나 이장희, 박지동 사건들 중에는 재판이 진행인 것도 있지만 사실은 모두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한완상과 최장집 사건의 경우, 사법당국의 재판에 오르지는 않았으나 어떤 의미에서는 피해자들이 현직에서 쫓겨나는 것과 같은 치명적인 결과를 낳았다. 사건을 만들 당시 극우 언론과 단체들은 자유로운 학문, 연구, 발표가 국정을 뒤흔든 중죄 사건인양 과민 반응을 보였다. 그들은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반공 이데올로기의 척도를 제시하여 국민들의 레드 콤플렉스를 무조건 자극하려 했다는 점을 여실히 보여 준다.

셋째, 사건의 내용 자체는 모두 조금씩 다르지만 대개 사건의 핵심에는 '북한 없는 북한'이 관련되어 있다. 공판에 오른 사건들에 있어 그 공소장이 모두 비슷하게 시작하고 끝나, 북한과 관련지어 국가보안법 7조의 적용을 정당화하는데 급급했다. 여기서 서사연이나 한국사회의 이해, 한완상, 최장집처럼, 보다 적극적으로 북한에 대해 비판적인 연구물이나 입장에 대해서도 '반북적이지 않고' 반국가단체인 북한을 이롭게 하였다고 결론을 내렸다. 서관모의 경우는 자신의 연구가 북한의 주장과는 어떻게 다른가를 규명해야 했다. 그러나 이승환이나 서사연 사건 이후 모든 사건들의 피해자들은 '다름'을 규명하는데 그치지 않고 북한과의 교류를 적극 추진하고 있는 남한 정부가 반국가단체인 북한을 정당한 자기 동반자로서 인정하는 모순적인 문제를 적극 비판하는 데로 발전하였다.

넷째, 이 사건들을 통해 우리는 피해자가 또 피해를 입는 결과를 목격했다. 헌법이 규정한 학문의 자유를 지킨 사람들이 가해자들에 의해 사법 또는 여론 재판의 희생자가 되었다. 이는 마치나 성폭력의 희생자들이 자신의 피해를 입증해야 하는 것과 유사하다. 1990년대 중반 이래로 분위기가 바뀌어 사법 당국이 가해자, 즉 학문의 자유의 범법자들에게 처벌을 내린 사례도 있었다. 사과문을 게재하게 하거나 벌금형 정도이지만. 더 이상 피해자가 희생되는 일은 막아야 한다.

다섯째, 각 사건을 통해 공안 당국과 극우 언론 및 단체에 저항하는 사회적인 움직임이 활발하게 일어나게 되었다. 극우 세력들의 시대착오적인 학문의 자유 탄압 사례가 발표될 때마다 반공이데올로기가 강화되기는커녕, 학술단체, 학계, 사회 시민단체, 시민들 속에서는 반공이데올로기가 허위의식임을 깨닫는 인식이 확산되었다. 1997년 12월 대선 직전, 극우 세력들이 아무리 반공 소동을 벌여도 대선에 별로 영향력을 미치지 않았던 것이 그 증거라 할 수 있다. 물론 1999년 서해교전에서 보았듯이 한반도에 분단이 남아 있는 한 분단과 냉전을 획책하는 세력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지지기반이 커져가고 있는 시민사회와 그에 따라 고양되고 있는 시민의식은 과거와 같은 반공 공세에 적절히 대응하며 이성적인 반응을 보일 수 있는 세력과 의식을 갖추어가고 있다.

5. 맺음말

이상과 같이 협소한 의미에서 학문의 자유 탄압 사건들을 살펴보았다. 해방 이후 최근까지 언론·출판의 자유(헌법 21조 규정) 또는 양심의 자유(헌법 19조 규정), 예술의 자유(22조 규정)가 침탈 당한 사례는 수 없이 많다. 분명 학문의 자유는 이러한 자유와 긴밀히 관련지어져 있다. 이번 글에서는 범위를 좁혀 잣구 대로의 학계를 중심으로 한 학문의 자유에 한정시켜 예술의 자유나 출판 또는 출판사 침탈 사건은 논외로 했다. 그러나 머지 않아 언론·출판의 자유나 양심의 자유, 예술의 자유문제와 더불어 학문의 자유를 다루어야 할 것이다.

지난 20세기 반공이데올로기는 파시즘의 모습으로 나타나 국민의 모든 기본권을 억압하고 통제했다. 1990년대 사회주의 사회가 동요하고 좌절을 겪은 후, 미국이나 유럽에 나타나고 있는 스킨헤드와 같은 신인종차별주의자, 신나치즘, 파시즘 신봉자들은 새로운 냉전을 획책하고 있다. 일본의 자유주의 사관도 무관심한 대중들을 향해 군국주의를 조장하고 있다. 프랑스의 파시스트 바르데쉬(Maurice Bardeche)는 이미 예언한 바 있다. "또 다른 이름으로 또 다른 면모로, 그리고 명백히 과거의 어떠한 투영도 없이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린이의 모습으로 젊은 메두사의 머리, 스파르타의 질서(파시즘)는 다시 출현할 것이다"(김용우, 1997: 655).

여전히 레드 콤플렉스는 두려움의 대상이다. 한반도 레드 콤플렉스의 생산자를 자처하고 있는 현재까지도 극우 세력이나 극우 보수 언론은 각종의 꼭두각시를 내세운 채 여전히 기득권력을 장악하고 있다. 그로 인해 20세기 현대사에서 한반도를 할퀸 분단과 전쟁의 상처는 나을 겨를이 없었다. 학문의 자유는 상처투성이가 되었다. 우리는 여덟 건의 사건을 얘기하지 않아도 한국전쟁과 반공이데올로기가 저지른 범죄를 이미 잘 알고 있다. 한반도에서 자유민주주의는 오로지 반공이데올로기의 치장에 불과했다. 그러한 과정에서도 레드 콤플렉스에 갇힌 진실을 구해내기 위한 각종의 사회적·집단적 움직임이 있었고 진보적 지식인들 역시 그 움직임과 함께 했다.

학문의 자유나 기타의 국민의 기본권은 헌법에 이미 규정이 되어 있다. 헌법이 지켜지기 위해서는 헌법 위에 군림하고 있는 법이나 제도, 이데올로기가 사라져야 한다. 국가보안법이나 반공이데올로기가 이 땅의 주인들을 상대로 걸어온 마법의 주문을 풀어야 한다. 우리 무의식에까지 내면화되어 있는 냉전과 반공의 코드를 평화와 통일의 코드로 바꾸기 위해서는 아무리 학문의 자유가 많아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나아가 결국 모든 기본권 또는 인권이 지켜지기 위해서는 분단의 최종 원인인 분단구조 자체가 한반도에서 철거되고, 통일과 평화의 체제로 바뀌어야 한다. 비로소 우리는 21세기를 선이 악을 이기고 평화롭고 평등한 시대로 만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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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논문은 2000년 6월2일 학술단체협의회가 주최한 '한국전쟁 어떻게 끝낼 것인가' 제하의 학술토론회에서 발표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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