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펌] 대선결과와 2002년 말 정세전망
〈대담〉남(한국)의 대선 결과와 2002년 후반기 정세에 대한 재검증
이 대담록은 일본 도쿄에 있는 서버연구기관 ‘통일코리아연구소’
(http://unikorea.cool.ne.jp/)의 요청에 따라 2002년 12월 23일, 조국평화통
일협회 강민화 홍보국장과 연합뉴스 강진욱 기자가 도쿄=서울간 이메일을 통
해서 진행한 대담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이번 대선 결과를 어떻게 볼 것인가
당선자 위주가 아니라 민심의 선택 위주로 보는 시각
강민화 : 강진욱 선생님은 2002년 12월11일 서울 명동성당에서 열린 천주교인
권위원회 주최 토론회에서 발표하신 <북 핵 파문과 한반도 통일정세 고찰 :
북-미 불가침조약 체결의 필연성과 16대 대통령선거>라는 글에서 이번 남(한
국)에서의 대선에서 노무현씨가 당선될 것이라는 취지의 전망을 제시하셨는데
대선 결과는 그 예상대로 되었습니다. 사실 대부분의 재일동포들은 선거 직전
에 북에서 핵 시설을 재가동하겠다는 의사표시를 한 것과, 특히는 정몽준씨가
노후보 지지를 갑자기 철회한 행동이 이회창 후보에게 유리하게 작용되지 않겠
는가고 우려하거나 비관시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개표작업이 진행되고 보니까
노무현씨가 당선되었습니다. 이에 대해서 ‘의외의 결과’라고 하는 사람도 있
는데 선생님은 이번 대선결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강진욱 : 저는 이번 16대 대통령 선거가 '국민의 승리'이며 냉전세력의 퇴출
을 열망하는 평화세력의 약진이라는 평가와 이를 기뻐하는 국민들의 환희에 전
적으로 공감합니다. 이번 대선은 이회창 정권 출범 저지를 위해 마지막 순간까
지 자신의 정력을 바친 유권자들의 승리임이 분명합니다. 참으로 기쁜 일이 아
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번 선거 결과를 '놀라운 일'이라거나 '의외의 결
과'라고 말하는데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노 후보의 당선은 예측은 아니더라도
한반도 정세 변화의 필연성이랄까, 남(한국)의 대통령이 지니는 지정학적 의미
랄까, 이런 정황에 비춰볼 때 노무현 후보의 당선을 어느 정도 낙관할 수 있었
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발표한 글도 그런 취지였습니다.
이번 대선의 의미는 비록, 세기가 바뀐 첫 번째 대통령 선거이고 TV와 인터
넷, 이동전화 등 소위 첨단미디어시대라는 창조적 공간에서 이뤄진 것이기는
하지만 이번 선거 역시 '한반도 분단 구조'라는 한계 상황 속에서 진행됐습니
다. 첨단미디어시대라는 공간이 한반도 분단구조라는 한계상황을 넘어설 수 있
는 것은 바로 남북의 연방(연합)제 통일이 이뤄지는 순간부터 가능한 일이며
이 때까지는 한반도 분단구조라는 한계상황을 항상 염두에 둬야 할 것입니다.
즉, 한반도 분단 구조를 틀어쥐고 남(한국)을 예속화한 미국의 영향력을 냉철
하게 가늠해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번 대선은 비록 새로운 공
간에서 치러지기는 했지만 과거 남(한국) 대통령 선거를 규정했던 한계상황을
도외시할 수는 없습니다.
'20-30대의 선거 혁명' 등의 표현이 나오고 있고 심지어 정몽준 씨가 노무현지
지 철회를 선언하자 노사모 회원들이 밤새 전화를 걸어 노 후보를 당선시킨 것
처럼 보도하는 경향이 있지만 20-30대 표가 노 후보 당선에 결정력을 행사한
것은 아닙니다.
"이번 대선에서 30대 유권자가 전체의 25.4%(889만명)로 가장 많았고 20대가
25.4%(822만명)으로 그 뒤를 이어 20-30대 유권자가 전체의 절반 가까이 차지
했다"고들 말하지만 20대 투표율은 고작 47.5%로 전체 투표율(70.2)을 훨씬 밑
돌았습니다. 20대와 30대의 노 후보 지지표는 고작 242만표와 363만표로 40대
311만표, 50대 327만표를 합친 것보다 적습니다. 젊은층이 노 후보를 지지해
서 당선됐다거나 여론 주도층이 교체됐다는 식의 설명은 틀린 것입니다. 이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이번 선거의 의미를 이 부분에 맞추기 위한 일종
의 '상징 조작'이라고 봅니다. 이번 선거의 축제분위기 속에서 이뤄진 것은 사
실이지만 일부 현상을 침소봉대하는 것은 이번 선거 결과를 낳게 한 '더 큰
틀'에서의 움직임을 간과하는 우를 범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실제로
노 후보가 당선된 것은 김종필 자민련 총재가 자칫 이회창 후보에게 쏠릴 표심
을 노 후보에게 유리하게 돌린 것이 주효했습니다. 부산과 경남 표도 15대 대
선 때 김대중 대통령이 얻었던 표수의 두 배에 이르렀습니다.
정몽준 후보와 노무현 후보의 단일화가 성사되기 이틀전 인 2002년 11월23일
자민련 의원 총회에서 김종필 총재는 "정몽준 후보를 지지한다"고 밝힙니다.
(중앙일보 2002.11.25) 당연히 이회창을 지지할 것으로 여겼던 당 내외에 적
지 않은 충격을 던졌습니다. 14대.15대 대선때 캐스팅보트를 행사했던 김종필
총재는 이번 16대 대선에서도 자신의 비토권을 행사해 이회창 후보에 쏠릴 뻔
했던 충청권 표심을 분산시키면서 노 후보를 민 것입니다. 김 총재는 1997년
15대 대선때의 DJP 연합은 아니지만 사실상 노 후보의 당선을 도운 것이고 15
대 대선때 이회창 후보의 표를 잠식했던 이인제씨가 자민련에 들어간 것도 마
찬가지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김종필 총재는 "나는 누구를 대통령으로 만들 수
는 없지만 누가 대통령이 못되게 할 수는 있다"고 공언한 바 있습니다. 이인제
씨는 이회창지지를 선언했지만 자민련에 합류한 뒤의 일이었고 이미 자민련
은 '대선 중립' 입장 속에 김 총재는 이회창 후보를 견제하는 상황에서 이인제
씨의 이회창지지 발언은 별 의미가 없었습니다. 미국의 적극적인 '후원' 속에
서 김대중 후보가 당선되는 과정과 이번 대선에서 노무현 후보 당선 과정이 흡
사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정몽준 신당의 창당과 정몽준-노무현의 후보단일
화 및 정씨의 극적인 이탈 등도 결과적으로 노무현 흔들기가 아니었습니다. 오
히려 노무현 대통령 만들기의 한 과정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강민화 : 아무튼 노무현 후보의 당선은 미국 부시 행정부의 대북강경책에 대해
서 “잘하고 있다”고 말하거나 6.15공동선언의 2항을 '철회' 혹은 '짚고 넘어
가야겠다'고 말하는 등 일관하게 대북강경자세를 취해온 이회창씨가 당선된 것
보다는 낳겠지요. 그런데 나는 이번 선거 결과를 보는데서 노무현씨가 이겼으
니 잘 되었다는 식의 노무현씨 개인에 대한 인물평보다도 그를 당선시켰고 이
회창씨를 패하게 만든 민심이 더 중요하다고 봅니다. 남(한국)의 신문과 TV 등
에서는 유권자들이 노무현씨가 주장한 ‘낡은 정치의 종식과 새 정치’를 지지
했고, 또 한(조선)반도 평화 문제와 대북관계가 쟁점이 되었던 이번 선거에서
김대중 정권의 대북정책을 계승하고 북핵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해야 된다고
한 노무현씨의 주장을 지지했다고 전했습니다.나는 이것이 최근에 급속히 앙양
되고 있는 반미항전과 오늘까지 남북간의 대화와 교류, 협력을 통해서 형성된
민족화해기운과 동족의식, 이것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고 보고 있으며 그런 의
미에서 6.15공동선언의 생활력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이번 선거 결과를 당선자위주가 아니라 민심위주로 봐야 한다고 보는 또
하나의 이유는 남(한국)의 대통령과 미국의 관계 때문입니다. 이남동포들에게
는 미안하지만, 거기서는 대통령의 선출과 그의 정책이라는 것이 아무래도 미
국의 대한(조선)반도정책에 구속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때문에 노무현씨가
경력으로 보나 평소의 주장으로 보나 긍정적인 인물로 볼 수도 있지만 그도 역
시 대통령 자리에 앉게 되면 정책과 행동에 한계가 있게 되지 않겠나, 아무래
도 이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점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십니까.
미국의 분단관리전략에 따르는 정권 창출
강진욱 : 미국은 남(한국)의 대통령을 미국의 분단관리 전략의 한 수행단위로
여기면서 소위 '동맹 관계'라는 미명하에 정치.군사적, 경제적 수단을 통해
한-미 예속 관계를 유지해왔습니다. 이는 친미 분단독재정권인 이승만 정권의
출범이나 이 정권 말기 미얀마(과거 비루마)식 군사정부 옹립 구상에 따른
5.16쿠데타와 박정희 정권 창출 과정을 통해 이미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박
정권 말기 12.12쿠데타와 광주사태를 배후 조종하면서 2기 군사정부를 출범시
킨 것이나 이후 군사정부와 민간 정치권의 야합(3당합당)을 통한 김영삼정권
창출 및 DJP연합을 통한 김대중 정부 출범 역시 미국의 입김과 무관하지 않았
습니다. 한 예로 김대중 정부 출범은 - 15대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가 당선된
것 역시 이번 노무현 후보 당선과 마찬가지로 '국민의 승리'임이 틀림없지만 -
미국의 한반도 분단관리 전략이 경착륙(침공 및 붕괴 전략)에서 연착륙(접촉
과 관여(engagement)를 통한 체제 변화 전략)으로 이행하는 과정과 일치했습니
다.
미국은 김영삼 정권 말기인 1997년 전후부터 남북대화와 이산가족 면회소 설
치 및 경제협력 등을 허용하는 '관여와 확장 전략'(일명 대북포용정
책/Engagement Policy)을 구상했고 이에 걸맞는 남(한국)의 대통령 후보인 김
대중씨를 밀었습니다. 1997년 김영삼 정부의 일관성 없는 대북정책으로 한-미
간 불협화음이 계속되는 가운데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남북정상회담 주
선 의지를 잇따라 표명한 것이나 돈 오버도퍼 등 미국의 내로라 하는 한반도
전문가들이 잇따라 방한해 김대중 후보의 '통일 구상'과 고난의 정치 역정 등
을 언급하며 한-미 우호 관계와 한반도 평화 및 IMF 극복을 통한 경제 발전 등
에 대한 장밋빛 전망을 내놨던 것 등은 바로 미국의 새 한반도 분단관리전략
의 반영이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김대중씨 역시 자신의 통일관을 연방제가
포함된 '3단계 통일방안'을 물리고 사실상 미국의 분단관리 방안을 수용하는
쪽으로 수정함으로써 미국의 신 대북정책의 적임자로 공인돼 온 터였습니
다. '국민의 정부'가 출범한 뒤 내건 소위 '햇볕정책'은 미국의 '북한 체제 변
화 전략'인 연착륙 정책이었을 뿐 결코 '김대중 대통령의 정책'은 아니었습니
다.
김대중정부의 대북포용정책이 없었더라면 한반도 전쟁 위기가 계속 고조됐을
것이라는 것이 민주당의 기본 입장이었고 그나마 남북간 화해를 지지하는 일반
인 또는 소위 '북한 전문가'들의 주장이지만 이는 본말전도(本末顚倒)입니다.
김대중 정부 출범 이후 지난 5년간의 각종 남북대화 및 교류사업은 한반도 정
세 변화에 따라 미국이 마지못해 일정 정도 허용했다가 자신들의 의도를 벗어
나 남북 화해가 가속화되는 듯 하면 즉시 장애를 조성하는 과정의 연속이었습
니다. 2002년 말 경의선 철도 및 도로 연결을 위한 남북간 지뢰제거 검증단 교
환방문이 미 유엔사의 방해로 무산된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잘 나가던 남북화해협력이 부시정부 출범 이후 수없이 위기를 겪은 것은 바로
그네들의 북한 체제변화 전략(연착륙정책)이 소기의 목적을 거두지 못한 채 남
북이 통일로 급속 접근하는데 따른 것이었습니다.
물론 2000년 이후 한반도 정세는 미국의 분단관리전략우위에서 북(조선)의 연
방제통일전략이 우위를 점하면서 미국의 간섭과 방해 공작은 조금씩 후퇴하는
국면에 있지만 남(한국)에 대한, 특히 대북정책은 '미국의 우산' 아래 있다고
봐야 합니다. '국민의 정부'였던 김대중 정부의 출범 과정과 지난 5년간의 대
북정책이 이처럼 미국이 지탱하려는 분단구조에 속박돼 있었음이 명백한데
2002년 12월19일 치러진 16대 대통령선거는 이런 한반도 분단 구조와 무관했다
고 볼 수는 없습니다. 하루아침에 미국의 영향력이 제로(0)가 되면서 남(한국)
이 자주독립국가가 될 수는 없다는 뜻입니다. 인터넷 시대의 젊은 대통령 후보
의 당선 역시 정치와 경제, 군사 모든 분야 모든 영역에 걸쳐 미국의 영향력
이 미치는 가운데 이뤄진 것입니다. 미국이 이번 남(한국) 대선에 음으로 양으
로 관여했으며 2003년 노무현 정부 출범 이후에도 계속 영향력을 행사함으로
써 그네들의 한반도 분단 구조를 조금이라도 더 지속시키기 위해 갖은 수단을
다 쓸 것입니다.
미국의 전략상 가장 적임자였던 노무현 당선자
강민화 : 그렇다면 미국이 노무현씨를 밀어주었다는 결론이 도출됩니다. 여기
일본에서는 한때 미군철수를 주장했고 요즘도 미국과의 관계가 동등해야 한다
고 주장하는 노무현씨가 대통령이 되면 미국과 마찰이 생길 것이기 때문에 미
국이 겉으로는 노무현씨의 당선을 환영하지만 내심은 그렇지 않다고 보는 여론
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 좀더 자세히 말씀해주셨으면 합
니다.
강진욱 : 2002년말 현재까지도 남북 분단구조에서 연유하는 반통일 정서가 여
전하고 남(한국)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이 갑자기 없어지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저는 미국이 노무현 체제의 출범을 '용인'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서 그의 당선
을 은밀히 도운 것이라고 봅니다. 미국이 한반도 냉전구조를 근본적으로 해체
하고 냉전세력을 퇴조시킴으로써 남북주민의 열망대로 한반도의 재통일을 바
랄 리는 만무하지만 그네들의 대한반도 전략상 노무현 당선자가 가장 적임자였
기 때문입니다.
앞서 말씀드린대로 2000년 이후, 좀 더 멀리 보면 1994년 미국이 제네바기본합
의문에 서명한 이후, 한반도 정세는 미국의 분단관리전략 우위에서 북(조선)
의 연방제통일전략이 우위로 바뀌었습니다. 이런 정세 변화는 북-미 관계 뿐
아니라 미국에 예속된 남(한국)의 자생력을 크게 높여줬고 미국은 이런 한반
도 내외 정세 변화를 수용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서 노무현 후보의 당선을 용인
하면서 '노무현 체제'에 적합한 분단관리전술을 적용하려 한다고 봐야 할 것입
니다.
이승만 친미꼭두각시정권(노무현 대통령 당선자가 중학 2년때 이승만 대통령
에 관한 글짓기를 거부했다는 말에 용기를 내어 이런 '용공적' 표현을 쓰기로
했습니다)에 이어 박정희-전두환-노태우 군사정권을 출범시킨 미국이 1992년 3
당 야합을 통해 '문민정부'를 조작해 내고 같은 방식인 DJP연합을 통해 1997
년 다시 '국민의 정부'를 출범시켰다고 볼 때 '김대중정부' 다음은 '노무현 정
부'가 적합한 것입니다. 이회창 정부는 노태우 정부와 김영삼 정부 사이에 끼
워 넣으면 적합하겠지만 '김대중 이후'는 아닙니다. 한반도 정세가 2-4-6-8의
변화 과정에 있다면 8 다음에 올 수는 10이 맞습니다. 미국의 한반도 분단관
리 전략이 후퇴하면서 남(한국)의 민도가 조금씩 높아지고 평화통일 정세가 뿌
리를 내리는 과정을 '평화적으로 관리'하는 것이 미국의 국가이익을 유지하는
길이었기에 박정희-전두환-노태우 정부 이후 김영삼-김대중 정부가 나올 수 있
었던 것입니다. 만일 한반도 정세가 군사독재정권이 들어서 유혈 시위를 진압
하면서 미국의 국가이익을 보전할 수 있다면 미 군산복합체는 '문민정
부'와 '국민의 정부' 출범을 용인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1997년말 IMF체제 이후 한반도 남녘의 경제는 소위 신자유주의가 판치는 구조
로 급속 재편되면서 미 군산복합체의 금고를 불려주고 있고 IMF 진입과 때를
같이 하는 김대중 정부 출범 전후로 미국의 대북정책은 '접촉을 통한 체제변
화 전략'으로 연성화되면서 남북간 교류와 접촉을 확대해야 할 필요성이 높아
졌습니다. 비록 6.15남북공동선언과 같은 예기치 않은 결실로 한반도 정세는
미국 지배세력이 의도했던 '분단 관리'보다 '평화 통일'의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하루아침에 이런 흐름 전체를 허물어뜨릴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반통일 수구 정권'이 출범하는 것은 대세의 흐름을
역행하는 것입니다. 평화와 통일 정세가 하루아침에 반통일 정부가 주도하는
냉전체제로 뒤바뀐다면 연일 반정부시위와 유혈 진압이 계속되고 남북간 교류
와 협력의 틀은 다시 두절될지도 모릅니다. 이는 지난 10여 년 간 미국이 공
을 들인 한반도 분단관리 전략을 모두 원점으로 되돌리면서 북-미간 핵전쟁 위
기를 고조시킬 것은 불 보듯 뻔합니다.
북-미 관계로 보거나 남북관계로 보거나, 남(한국) 내부 정세로 보거나 남(한
국)에 대북대결론자가 들어서는 것은 미 군산복합체의 정치.경제.군사적 이익
에 부합하지 않는 결과가 초래된다고 하겠습니다. 이회창 후보 역시 이런 흐름
을 감지해 대통령이 되면 김정일 위원장도 만나겠다며 태도를 바꾸기는 했지
만 이미 늦었습니다. 미국이 남북관계를 10년전 혹은 김대중 정부 출범 전의
대결관계로 몰고갈 여력이 없는 한 이 후보가 대통령이 될 수는 없습니다. 역
사의 필연이라고 말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미국이 어떻게 노 후보를 도왔는지는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미
국 금융가 월 스트리트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세계적인 경제통신사인 블룸버
그가 선거 사흘전인 12월16일 이회창 후보와 노무현 후보를 대비시키며 노골적
으로 노 후보를 지지한 것이 한 예가 될 수 있습니다. 아시아금융담담 칼럼니
스트인 윌러엄 퍼섹 주니어(William Pesek jr.)는 <한국 경제 흥망 대선에 달
렸다>(Krean Election May or Break Economy)는 제목의 칼럼에서 "이회창 후보
가 당선되면 한국 투자가 위축되고 과거 재벌경제구조로 후퇴할 것"이라며 노
후보가 IMF 프로그램의 충실한 수행자였던 김대중 대통령이 직접 고른 후계자
임을 강조했습니다. 노 후보가 김대중 정부의 계승자로서 IMF체제의 개혁프로
그램을 지속하기를 바라는 것은 바로 미국 자본의 증식 욕구를 반영한 것입니
다. 같은날 영국의 경제전문지 파이낸셜 타임스도 똑같은 취지의 기사를 게제
하고 "재벌에 우호적인 이 후보의 정책이 재벌에게 다시 많은 권한을 되돌려
주는 결과를 가져오지 않을까 우려된다"고 밝혔습니다. 일부 서방 언론은 심지
어 '제2 IMF 위기감'을 거론하며 김대중정부 연장을 독촉하기도 합니다.
재무장관을 지냈고 94년 창립된 '한-미 21세기위원회' 핵심 멤버로 활약하면
서 남(한국)의 경제정책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공일씨는 11월25일 중
앙일보에 칼럼을 싣고 "제2환란을 우려하는 소리마저 들린다"면서 "아직도 미
진한 구조조정을 가속화해 우리 경제의 체질을 계속 강화해 나가야 한다"고 역
설했습니다. '한-미 21세기 위원회'는 경제분야의 '한-미 안보회의'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미국 자본의 이익에 충실하게 남(한국)의 경제 정책을 조정
하는 것이 주 임무로서 2002년 4월에도 워싱턴에서 회의를 연 바 있습니다.
이 때는 바로 노무현 당선자가 국민 경선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때입니
다. 마침 노 후보가 공보특보를 통해 "대북, 대미정책에서 김대중 대통령과 차
이가 없다"고 강조한 4월8일부터 이틀간 회의가 열린 것도 이채롭습니다. 사공
씨가 이사장으로 있는 세계경제연구원과 미국의 국제경제연구소(소장 프레드
버그스텐)가 공동 주최한 이 회의에는 한-미 양국의 정부와 의회, 재계, 학계
및 언론계 주요 인사 50여명이 참석해 한미 양국간 경제. 안보 현안과 남북관
계 및 한반도 정세 등을 중심으로 한-미간 협력관계 구축을 위한 심도 있는 논
의가 진행됐다고 합니다.
사공 씨의 칼럼이나 블룸버그 칼럼 등은 바로 IMF 프로그램 및 미 군산복합체
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김대중 정부는 반드시 연장되어야 하며 그러
기 위해서는 노무현씨가 당선돼야 함을 역설한 것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노무
현 당선자 또한 이런 신자유주의 논리에 조금씩 편승해 온 것이 사실입니다.
그가 외친 재벌개혁은 어쩌면 IMF와의 타협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질문에서 지적하신 반미시위와 주한미군 문제 등은 노무현 후보의 당선
을 돕는 하나의 카드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15대 대선때 김대중 후보가 'IMF와
의 재협상'을 주장해 굴욕감에 젖었던 남(한국) 민심을 자극하면서 지지율을
끌어올렸던 것과 같다고 저는 봅니다. 광화문의 미국 대사관 앞에서 연일 진행
됐던 촛불시위는 바로 노 당선자의 '대미 선명성'을 상징했고 이는 효순-미선
양 압살 사건으로 처절하게 짓밟힌 이곳 주민들의 자존심에 일순간 카타르시스
를 제공한 것이 사실입니다. 선거가 끝나자마자 곳곳에서 "이제 시위 그만해야
되지 않느냐"는 소리들이 들리고 있습니다. 선거 끝난 뒤 첫 시위였던 지난 21
일 강경진압 분위기가 되살아난 것도 이런 방향 전환이 아니가 생각합니다.
이회창 후보는 부시행정부의 닮은꼴이 아니었나?
강민화 : 지금까지 이회창씨가 부시 행정부의 대북강경책과 가장 가깝거나 그
에 충실한 인물이라는 것이 상식처럼 되어오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미국의 노
무현 지지론(論)'은 이런 상식과 맞지 않습니다. 이런 진단에 대해 혼란에 빠
질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어떻게 설득하시겠습니까.
강진욱 : 흔히들 부시행정부는 이회창 후보의 당선을 바라고 있다고들 말했습
니다만 그것은 대체로 한-미 수구 세력의 바램이었거나 선전전 차원이었을 뿐
부시행정부 파워엘리트의 전략은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앞서 밝힌 IMF 프로
그램을 앞세운 미 자본가집단의 한반도 정책과 마찬가지로 한반도전략을 입안
하고 집행하는 부시행정부내 핵심 전략 그룹은 김대중정부 다음으로 노무현 정
부를 허용할 수밖에 없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미국이 북 핵 문제를 본
격 이슈화(2002.10.16) 하면서 북(조선)을 압박하고 중유 공급을 중단하면서까
지 제네바합의를 깨뜨릴 듯한 분위기를 연출하기는 했지만 실질적으로 이런 압
박 전술을 계속 밀고 나갈 처지가 아닙니다. 북 핵 논란을 시작하면서부터 미
국은 "북한은 이라크와 다르다"거나 "평화적 해결 원칙"을 일관되게 외치고 있
습니다.
미 군산복합체의 한반도전략, 특히 북-미 관계 설정 방향은 관계 악화 또는 긴
장 격화가 아니라 '안정적 관리'를 통한 '분단의 현상 유지'라고 볼 때 이회창
씨는 그 적임자가 될 수 없습니다. 노무현 당선자가 일관되게 강조하고 있는
것이 바로 '북한 관리론'입니다. 이 말의 진의가 무엇인지 아직 정확히 알 수
없고, 노 당선자 또한 자신의 말이 무슨 뜻인지 충분히 알지 못할 것입니다
만, 모름지기 취임후 첫 미국 방문과 한-미 정상회담 이후 그가 말한 '북한 관
리론'은 곧 부시행정부의 긴장완화를 용인하는 '분단관리론'으로 귀착되지 않
나 우려가 됩니다.
노무현은 어떻게 선택됐나?
강민화 : 노무현씨는 어떻게 부시 행정부의 전략상 적임자로 선택되었는지,
이 점에 대해서 좀더 자세히 말씀해주십시오.
강진욱 : 저는 노 당선자가 21세기 남(한국)을 이끌 대통령으로서, 분단을 평
화통일로 이끌 지도자로서 손색이 없다고 생각하며 국민 다수의 판단 역시 그
러했지만 그는 국민의 선택을 받기에 앞서 미국의 선택을 받지 않았나 생각합
니다. 이런 관점에서 저는 노무현 당선자가 김대중 대통령의 후계자로 등장하
는 과정을 다음과 같이 추적해 봤습니다. 이런 추론은, 누구보다 정정당당하
고 소신에 찬 정치행로를 걸어왔고 과거 어느 대통령보다 훌륭한 지도자가 될
것으로 기대되는 노 당선자를 폄하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미국에 예속
돼 있는 분단국의 한 지도자에게 씌워져 있는 '태생적 굴레'를 제대로 인식하
고 그와 우리 국민들이 함께 이 굴레를 벗어 내던질 방도를 찾기 위한 것입니
다. 우리는 '김대중 대통령'을 뽑았지만 국민들이 '역사적 첫 수평적 정권교
체'라는 환희에 들떠 있는 사이 어느새 김대중 대통령은 '신자유주의' '한반
도 분단관리론'을 앞세운 미국의 품으로 가버린 쓰라린 기억을 갖고 있습니
다. 남(한국) 주민들은 분명 노무현 대통령을 '뽑았지만', 앞서 말씀드린대로
이번 대통령선거가 미국의 '절대적 영향력'하에서 치뤄졌다면 우리가 넋을 놓
고 있는 사이에 노 당선자는 어느새 미국의 품으로 가버릴지 모릅니다.
노 당선자는 선거 기간 내내 '자질 시비'에 휘말렸습니다. 국회의원 두 번
(13.15대)에 장관(해양수산부) 한 번 한 경력으로 무슨 대통령이 되느냐는 것
이 바로 '자질론'의 출발점이었습니다. 물론 이런 시비는 그야말로 시비를 위
한 시비였을 뿐이지만 실제로 노 당선자는 2000년 8월 해양수산부 장관에 임명
된 것은 그가 대통령 후보로서의 입지를 구축하는 첫 걸음이었습니다. '노무현
을 사랑하는 모임'(노사모)가 탄생한 것은 이보다 약 두 달 전인 2000년 6월이
었습니다. 그는 해양수산부장관 임명 당시 "정치인집단을 조직화하고 세력으
로 엮어 이끌어 나가는 조직적 리더십을 한번도 실험해 보지 않았다"고 스스
로 토로했듯이 이는 자신의 약점을 보완할 기회였습니다.(한겨레신문
2002.12.20 5면)
실제로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는 해양수산부장관으로 재직하면서 대중적 이미지
를 획득하게 됩니다. 부산과 인천 등 주요 항만 관련 사업을 관장하면서 정치
적 기반을 넓혔고 마침내 2000년 12월 처음으로 대통령 후보 경선 출마 의사
를 밝힙니다.(연합뉴스 2000.12.8 <노무현장관, '정치발언'>) 그리고 2001년
3.26 개각때 장관직을 그만두면서 "오는 10월께 대선주자 '3각 구도'의 하나
로 뛰어오르는게 정치적 목표였는데 시기가 빨라졌다"고 밝힙니다.
6.15공동선언후 시작된 ‘김대중 이후’구상
그가 해양수산부 장관에 임명된 2000년 8월은 남북 정상이 6.15공동선언을 발
표해 미국의 대한반도전략에 일대 충격파를 던진 뒤 미국과 남(한국)내 우익세
력들이 "6.15남북공동선언에 평화조항이 빠졌다"며 이 선언의 의미를 평가절하
하기 위해 온갖 억지논리를 동원할 때였습니다. 미 군산복합체의 생리상 이때
쯤 김대중 이후 남(한국)측 지도부를 구상하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가 경선 출마 의사를 밝힌 2000년 12월은 미 공화당 권력이 부
시정권 출범을 준비하면서 클린턴정부의 대북 평화프로세스가 중단되면서 잘
나가던 남북대화(4차 장관급회담)가 일탈조짐을 보일 때였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이 부시행정부 출범 이후 처음으로 미국을 방문(2001.3.6)한 뒤
2주만에 단행된 3.26 개각은 또한 남북대화 3부 장관인 통일, 외교통상, 국방
부장관이 모두 교체됐다는 점에서 미 지배세력의 대한반도 전략 변화를 시사했
습니다. 미국의 당초 의도와 달리 진행됐던 남북대화 구도를 본래 의도였
던 '남북 긴장 유지 속 교류와 접촉 증대'의 방향으로 끌고 가겠다는 의도라
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김 대통령 방미 전후로 '2차 정상회담' '김정일위원장
서울 답방'을 외치는 목소리가 높았던 것은 곧 1차 남북정상회담의 결실인
6.15공동선언 무효화 기도의 또다른 표현이었습니다. 부시행정부가 남북 화해
협력 및 통일 프로세스의 가속화를 위해 2차 남북정상회담을 강조할리는 만무
했구요. 미국의 입김에 따라 남(한국)의 장관이 교체되느냐는 반론을 제기한다
면 저는 2002년 7월 이태복 보건복지부장관이 미 제약회사의 입김에 의해 교체
됐던 사실을 지적합니다. 미 한반도전략의 제약 속에서 제대로 운신하지 못하
는 남녘 현실에서 대북정책 관련 3부 장관들이 일제히 옷을 벗은 것은 미국의
남북대화 구도가 달라졌음을 의미한다고 봐야 합니다. 당시 이정빈 외교통상부
장관은 "미국 언론이 동으로 가면 한국 언론도 동으로 가고 미국 언론이 서로
가면 한국 언론도 서로 간다"는 유명한 말을 남기고 떠났습니다.
바로 이런 배경 속에서 이뤄진 3.26 개각 때 노무현 당선자는 해양수산부장관
을 그만두고 '민주당 고문' 대열에 합류하면서 본격적인 대권 후보 반열에 오
르게 된 것입니다. 3.26 개각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40대 인사가 4명이나 장
관 또는 장관급에 발탁됐다는 것이었습니다. 16대 대선의 주요 쟁점이었
던 '신-구 세대교체론'은 바로 이때부터 태동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 3.26개각과 관련해 한나라당 정형근 의원이 한 말 또한 16대 대선에서 노무
현씨가 당선된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한 번 되새겨 볼 만한 것이었습니다.
정 의원은 한나라당내 정보통으로 통하며 국가정보원 인맥을 앞세워 온갖 도청
의혹 등 밀실정치의 내막을 폭로하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는 3.26개각 직
후 '제3후보론'을 거론하며 여권 내에서 '예상을 뛰어넘는 새로운 대권주
자'가 부상하고 있다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당시 언론은 그의 발언에 대
해 "국민적 검증을 거치지 않은 후보가 갑자기 부각된다고 해서 국민들의 광범
위한 지지를 이끌어낼 수 있을지 미지수"라며 정 의원의 주장을 근거없는 것으
로 일축하는 분위기였지만 돌이켜 보면 당시 여권 내부에서 새 인물(노 당선
자)을 내세우기 위한 움직임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로부터 일주일
여 뒤인 2001년 4월8일 노무현 당시 민주당 고문은 일단의 정치부 기자들과 만
나 "차차기는 정동영-김민석 의원 등의 몫이며 나는 이번이 아니면 다시는 도
전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노 당선자가 이처럼 대권 후보로 성장하는 모든 과정은 무엇보다 노 후보 자신
의 성실성과 정치적 선명성이 주효했음을 부인해서는 안되지만 그렇다고 그와
그를 지원하는 몇몇 정치권 인사들 또는 7만명의 노사모 회원들만의 힘에 의
한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더 큰 힘이 작용했다고 저는 생각합니
다. 끊임없이 '청와대 배후설'이 나왔던 것도 이런 움직임의 한 표현이 아니었
나 생각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미국이 노무현 정부 출범을 용인 또는 지
원했다는 사실이 아니라 노 체제 출범이 미 군산복합체가 지탱하는 한반도 지
배구조의 한계 속에서 이뤄졌다는 문제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의식을 가질 때에라야 비로소 노무현 정부는 대미 예속 정부가 아닌 진정
한 '국민의 정부'로 거듭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문제의식 없이는 '국민의
정부'라는 미명하에 김대중 정부가 범했던 대미 예속과 그로 인한 온 국민의
기대와 환멸의 악순환이 되풀이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2002년 후반기 정세를 다시 돌이켜본다
강민화 : 우리가 2003년, 2003년 해왔는데 드디어 그 해가 눈앞에 다가왔습니
다. ‘2003년 위기설’도 있습니다만, 어쨌든 조미관계에서 하나의 결정적인
해가 되는 것만은 틀림없겠지요. 문제는 이 2003년의 결전이 어떤 양상을 띠
고 벌어지겠는가, 이것입니다. 이렇게 내년을 내다보기 위해서도 다시한번 이
시점에서 2002년 정세를 잘 돌이켜봐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지금 한(조
선)반도정세의 초점이 되어 있는 ‘북의 핵문제’에 대해서 다시 정리해볼 필
요가 있다고 봅니다. 또 하나는 조-일 관계입니다. 어리석기 그지없는 고이즈
미 정권은 ‘납치문제’라는 것을 지나치게 부각시켜서 국내의 반북여론을 고
취시킨 바람에 오히려 그 여론에 자기들이 구속됨으로써 조-일 관계를 한 걸음
도 진전시키지 못하게됐습니다. 이런 의미로 지난번 고이즈미 수상의 평양방문
과 그후 조일관계에 대해서도 다시 돌이켜보는 것이 어떻습니까.
미국이 종용했던 고이즈미 방북
강진욱 : 미국이 북 핵 문제를 제기한 것은 북(조선)과의 극한 대결 구도로 회
귀하기보다는 북(조선)에 일본의 식민지보상금을 들이밀고 평화공존의 관계를
맺어서라도 북(조선)이 보유한 핵무기 및 탄도미사일 개발 능력을 제어하기 위
한 것이었습니다. 애초부터 극한 대립은 미국의 선택 범위에 포함돼 있지 않았
습니다. 미국이 북 핵 문제를 제기하기로 결정한 것은 남북경제협력추진위원
회 2차 회담과 평양에서의 북-일 당국간 회담이 연쇄적으로 진행되면서 고이즈
미 일본 총리의 평양 방문이 결정되는 시점과 동시였습니다. 한 때 고이즈미
총리 방북이 일본의 독자적 결정이냐 아니냐를 둘러싼 논란이 있었지만 미국
은 북 핵 위협을 해소하고 제네바기본합의 불이행에 따른 손실 보상을 모면하
려는 속셈에서 북-미 간 대타협의 '미끼'로 고이즈미 총리의 평양행을 결정한
것이었습니다.
서울에서 2차 경제협력추진위원회 회의가 진행중이던 2002년 8월28일 존 볼튼
미 국무차관이 서울을 방문해 북 핵 개발 재개 의혹을 강력히 제기했고 같은
시기 볼튼의 상급자인 리처드 아미티지 국무부 부장관은 동경을 방문해 고이즈
미 총리와 만나 역시 북 핵 의혹 문제를 거론하면서 평양 방문을 종용했습니
다. 그리고 8월31일 고이즈미 총리의 평양 방문이 발표됐던 것입니다.(시사저
널 2002.9.12) 물론 고이즈미 총리의 평양방문이 역사적인 '북-일 평양선
언'(9.17)을 통해 미국의 의도대로 북 핵 압박 카드라기보다는 일본의 식민지
배상과 북-일 수교 교섭 약속이라는 모양새로 바뀝니다. 2000년 6월 미국의 남
북 직접대화 시나리오에 따라 남북정상회담을 '허용'했지만 그 결과는 미국
의 '남북 분단 관리'라는 본래 의도를 벗어나 '남북 평화 통일' 구도로 격상
된 것과 같습니다. 모두 미국의 영향력이 미치지 못하는 북(조선)내 '자율 공
간'인 평양에서 이뤄진 사건들이었습니다. 고이즈미 총리의 방북 카드가 미국
의 의도와 다른 방향으로 진전되면서 미국은 당황했고 급히 제임스 켈리를 미
대통령 특사를 평양에 보냈던(2002.10.3-5) 것입니다. 그리고 10월16일 "북한
이 핵무기 개발을 재개했다"고 일방적으로 떠벌리기 시작했습니다. 북 핵 논란
의 전말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즉 미국은 북-일 수교 및 식민지 배상이라는 엄청나게 큰 보따리를 주고서라
도 북(조선)의 핵 개발을 원천 봉쇄하고 모든 핵시설을 동결시키려 했던 것입
니다. 물론 북측은 이에 응하지 않았고 미국은 다시 북-일 수교 교섭을 중단시
키면서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를 급정거시켰지만 이후 대책이 없어 부심하고 있
습니다.
‘제네바합의 무효화’싸움에서 완패한 미국
결국 미국은 2003년 시한의 제네바기본합의에 이어 또다른 합의서에 서명하지
않고서는 북(조선)의 핵 시설 재가동을 멈출 수 없는 처지에 몰리고 있습니
다.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를 종용해 중유 공급을 중단시켰지만 "미국이
제네바합의 파기 의도를 행동으로 보여줬다"는 북(조선)의 반격에 후속 조치
가 궁해졌습니다. 미국의 조치에 대해 북(조선)이 '제네바합의 파기'를 선언하
기를 바랬지만 북측은 미국에 "제네바합의를 준수하라"고 촉구하면서 세계 여
론은 미국의 '제네바합의 파기 시도'에 눈총을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제네바합
의 무효화를 둘러싼 북-미간 명분 싸움에서 미국은 사실상 완패했습니다. 러시
아의소리방송은 11월29일 "미국이 북 핵 개발 문제를 왜곡함으로써 전 세계를
혼란에 빠뜨렸다"고 지적한 것은 미국의 완패를 웅변합니다.
2002년 12월9일 북(조선) 미사일 운반선 '서산호'를 인도양에서 무단 점거하
고 예인했다 하루만에 풀어줘 국제적 망신을 당하는 등 도무지 전후 상황으로
설명되지 않는 실수를 연발하고 있는데 이는 바로 대북 관계에서 보이는 미국
의 '취약성'이라 하겠습니다. 이 사건에 대해서는 전 세계 언론이 미국의 외교
력 부재와 대량파괴무기 억제 정책의 일관성 결여를 질책하고 있고 미국 내에
서조차 이런 정책 결정이 이뤄진 배경에 대한 조사를 촉구하고 있는 실정입니
다. 도무지 북(조선)과의 관계 개선을 위한 실마리를 찾지 못하자 외교적 타협
점을 찾기 위해 이런 실수를 고의로 저지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
입니다. 국제적 망신을 감수하고서라도 초강대국으로서의 위용을 한 차례 과시
하고 이에 대한 피해를 보상하는 '자비'를 보이면서 북(조선)과의 대화에 나서
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불가침협정 외에 다른 방도가 없다
강민화 : 미국이 어차피 북과의 협상에 나서지 않을 수 없다는 선생님의 견해
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런데 요즘 북이 전력생산을 위해서 핵시설을 재가
동하겠다고 발표하고 핵시설에 대한 감시카메라나 봉인을 제거하는 것으로 그
를 실천하자 이른바 ‘이라크 이후’의 조-미 군사적 대결을 우려 또는 예견하
는 여론이 높아가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강진욱 : 12월22일 북(조선)은 마침내 미국의 중유공급 중단 조치에 대응해
핵 동력 재개를 위한 IAEA 감시카메라 제거 및 방사화학실험실의 폐연료봉 봉
인 해제에 들어갔습니다. 미국의 어설픈 대응에 북(조선)은 적절히 강도를 높
이면서 미국을 압박하고 있고 미국은 이에 뾰족한 대책 없이 속을 태우는 형편
입니다. 아직 양국간 긴장이 최고조에 이르지 않았다는 점에서 미국이 좀 더
버틸 여지는 있습니다만, 어차피 미국이 북-미 파국을 용인할 처지가 못됩니
다. 북-미 불가침 조약에 서명하는 도리 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으며 미국도 이
를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물론 항간에 나도는 '2003년 위기설'이 현실화될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는 없을 것입니다. 럼즈펠드 미 국방장관이 23일 "이라크전과 한반도 사태를
동시에 다룰 수 있다"고 호언하기도 했습니다. 1990년대 10년간 견지했던 '두
개 전쟁 동시 승리 전략'인 소위 '윈-윈(Win-Win) 전략'을 다시 복구시키겠다
는 뜻입니다만, 미 부시행정부는 출범과 동시에 '윈-윈'을 폐기하고 아프가니
스탄 침공을 시작으로 이라크와 중앙아시아 일대를 장악하는 '한 개 전쟁 승
리 전략'인 '원-플러스(One-Plus) 전략'을 수립하고 이에 따라 현재 군사전략
을 운용하고 있습니다. 다시 '윈-윈'으로 회귀할 수는 없습니다. 즉 북-미 긴
장이 일순간 고조되더라도 이는 과거와 마찬가지로 미국이 극한의 대결적 자세
를 포기하는 마지막 수순으로 봐야 할 것입니다.
극한의 상황을 상정한다면 미국이 계속 북(조선)의 불가침조약 제의를 거부하
면서 '경제 제재' 조치를 취하거나 UN 안보리 이사회에 대북 제재 결의안 따위
를 상정하는 상황도 올 수 있습니다. 미국의 현재 처지상 이런 행동에 나설 것
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극한 상황'을 상정해 볼 수는 있겠습니다. 이렇게 되
면 북(조선)은 마땅히 북 핵 시설을 재가동할 것이고 2003년까지 유예키로 한
탄도미사일 발사 시험을 재개할 것임은 누구나 다 예상하고 있습니다. 미국은
이미 1993년 5월과 1998년 8월 두 번에 걸친 북(조선)의 탄도미사일 시험 발사
가 1994년 제네바합의와 1999년 페리보고서 및 2000년 북-미 공동코뮈니케로
귀결됐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초강대국으로서의 오만을 만방에 떨치는 지금
과거의 망신을 되풀이하기 전에 북(조선)과의 관계를 개선할 것이라고 확신합
니다. 두 차례 경험에 의한 따끔한 '학습효과'를 미국이 또 잊었으리라고는 생
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미국 대통령 부시가 노무현 당선자에게 전화를 걸어 '조기 방미'를 요청
한 것은 바로 이번 북 핵 문제에 대한 '한국 정부의 중재'를 요청한 것이라고
봅니다. 저들 스스로 벌려 놓은 북 핵 파문에 대해 스스로 잘못했다고 물러서
기는 싫고 남(한국)의 새 대통령이 한반도 긴장 완화를 강력히 요청하므로 이
에 응한다는 식으로 북(조선)과의 관계 개선에 나설 것이라고 봅니다. 수가 궁
할 때 미국이 항상 내세우는 것이 바로 '한국 당사자론'입니다. 남북화해에 간
섭하고 훼방을 놓을 때는 안중에도 없다가 북측과의 대결에서 더 이상 물러설
길이 없을 때면 남측을 중재자로 내세워 '남북 직접 대화'를 허락하는 것과 같
습니다.
최근 고이즈미 총리가 러시아를 방문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다시 만날 것이라
는 보도가 나오고 있는 것도 바로 미국의 화해 전술이 아닌가 여겨집니다. 그
네들의 대북 협상의 지렛대로 이용하려다 뜻대로 안되자 뒤로 밀쳐 놓은 '북-
일 수교 교섭' 카드를 다시 꺼내는 것입니다. 미국의 심통 때문에 일본은 자
못 신사다운 태도로 대북 관계 개선에 나설 기회를 놓쳤고 다시 미국이 떼밀
자 대북 화해에 나서는 꼴입니다. 외교적 합의를 깨고 '일시귀국자'들을 억류
한 것이나 미국의 강박에 못이겨 핵 문제를 제기한 것 등 일본이 이들 '과
오'를 어떻게 수습할지 자못 궁금합니다. 일본이 이처럼 갈팡질팡 하는 사이
에 동포 사회가 감내하기 힘든 고통을 겪은 것으로 듣고 있습니다. 너무 안된
일입니다.
이런 일련의 흐름은 바로 앞서 말씀드린 '미국의 취약성'을 드러내는 것으로
현재 북-미 관계상 남(한국)의 대통령이 '대북 대결론자'가 아니라 '화해협력
론자'여야 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현재 북-미 대립은 미국이 한반
도 정책을 냉전시대로 회귀시키려 하기보다는 어떻게든 북(조선)의 핵 및 미사
일 개발을 억제하면서 긴장을 완화해야 하며 다른 경제적 이익 측면에서도 차
기 남(한국) 지도자는 반북대결론여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강민화 : 선생님의 말씀을 흥미 있게 들었습니다. 좋은 말씀을 해주신데 대해
서 감사합니다. 마지막에 머지 않아 맞이하는 새해 2003년에 즈음해서 재일동
포들에게 메시지를 보내주시면 감사합니다.
강진욱 : 메시지라기보다 그저 신년 연하장을 대신해 기원의 말씀을 올립니
다.
"분단 조국의 백성으로 사는 고통의 길은
압제와 억압의 역사를 헤치고 문명의 새 시대를 여는 창조의 길이라고
믿습니다.
분단의 공간 끝자락에서
남북 두 조국의 자존심을 올곧게 지켜내는
동포 여러분들께 경의를 표합니다.
2003년 새 해 영광이
통일 조국의 미래를 비출 때
동포 여러분들의 고통이 사라지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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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담〉남(한국)의 대선 결과와 2002년 후반기 정세에 대한 재검증
이 대담록은 일본 도쿄에 있는 서버연구기관 ‘통일코리아연구소’
(http://unikorea.cool.ne.jp/)의 요청에 따라 2002년 12월 23일, 조국평화통
일협회 강민화 홍보국장과 연합뉴스 강진욱 기자가 도쿄=서울간 이메일을 통
해서 진행한 대담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이번 대선 결과를 어떻게 볼 것인가
당선자 위주가 아니라 민심의 선택 위주로 보는 시각
강민화 : 강진욱 선생님은 2002년 12월11일 서울 명동성당에서 열린 천주교인
권위원회 주최 토론회에서 발표하신 <북 핵 파문과 한반도 통일정세 고찰 :
북-미 불가침조약 체결의 필연성과 16대 대통령선거>라는 글에서 이번 남(한
국)에서의 대선에서 노무현씨가 당선될 것이라는 취지의 전망을 제시하셨는데
대선 결과는 그 예상대로 되었습니다. 사실 대부분의 재일동포들은 선거 직전
에 북에서 핵 시설을 재가동하겠다는 의사표시를 한 것과, 특히는 정몽준씨가
노후보 지지를 갑자기 철회한 행동이 이회창 후보에게 유리하게 작용되지 않겠
는가고 우려하거나 비관시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개표작업이 진행되고 보니까
노무현씨가 당선되었습니다. 이에 대해서 ‘의외의 결과’라고 하는 사람도 있
는데 선생님은 이번 대선결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강진욱 : 저는 이번 16대 대통령 선거가 '국민의 승리'이며 냉전세력의 퇴출
을 열망하는 평화세력의 약진이라는 평가와 이를 기뻐하는 국민들의 환희에 전
적으로 공감합니다. 이번 대선은 이회창 정권 출범 저지를 위해 마지막 순간까
지 자신의 정력을 바친 유권자들의 승리임이 분명합니다. 참으로 기쁜 일이 아
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번 선거 결과를 '놀라운 일'이라거나 '의외의 결
과'라고 말하는데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노 후보의 당선은 예측은 아니더라도
한반도 정세 변화의 필연성이랄까, 남(한국)의 대통령이 지니는 지정학적 의미
랄까, 이런 정황에 비춰볼 때 노무현 후보의 당선을 어느 정도 낙관할 수 있었
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발표한 글도 그런 취지였습니다.
이번 대선의 의미는 비록, 세기가 바뀐 첫 번째 대통령 선거이고 TV와 인터
넷, 이동전화 등 소위 첨단미디어시대라는 창조적 공간에서 이뤄진 것이기는
하지만 이번 선거 역시 '한반도 분단 구조'라는 한계 상황 속에서 진행됐습니
다. 첨단미디어시대라는 공간이 한반도 분단구조라는 한계상황을 넘어설 수 있
는 것은 바로 남북의 연방(연합)제 통일이 이뤄지는 순간부터 가능한 일이며
이 때까지는 한반도 분단구조라는 한계상황을 항상 염두에 둬야 할 것입니다.
즉, 한반도 분단 구조를 틀어쥐고 남(한국)을 예속화한 미국의 영향력을 냉철
하게 가늠해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번 대선은 비록 새로운 공
간에서 치러지기는 했지만 과거 남(한국) 대통령 선거를 규정했던 한계상황을
도외시할 수는 없습니다.
'20-30대의 선거 혁명' 등의 표현이 나오고 있고 심지어 정몽준 씨가 노무현지
지 철회를 선언하자 노사모 회원들이 밤새 전화를 걸어 노 후보를 당선시킨 것
처럼 보도하는 경향이 있지만 20-30대 표가 노 후보 당선에 결정력을 행사한
것은 아닙니다.
"이번 대선에서 30대 유권자가 전체의 25.4%(889만명)로 가장 많았고 20대가
25.4%(822만명)으로 그 뒤를 이어 20-30대 유권자가 전체의 절반 가까이 차지
했다"고들 말하지만 20대 투표율은 고작 47.5%로 전체 투표율(70.2)을 훨씬 밑
돌았습니다. 20대와 30대의 노 후보 지지표는 고작 242만표와 363만표로 40대
311만표, 50대 327만표를 합친 것보다 적습니다. 젊은층이 노 후보를 지지해
서 당선됐다거나 여론 주도층이 교체됐다는 식의 설명은 틀린 것입니다. 이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이번 선거의 의미를 이 부분에 맞추기 위한 일종
의 '상징 조작'이라고 봅니다. 이번 선거의 축제분위기 속에서 이뤄진 것은 사
실이지만 일부 현상을 침소봉대하는 것은 이번 선거 결과를 낳게 한 '더 큰
틀'에서의 움직임을 간과하는 우를 범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실제로
노 후보가 당선된 것은 김종필 자민련 총재가 자칫 이회창 후보에게 쏠릴 표심
을 노 후보에게 유리하게 돌린 것이 주효했습니다. 부산과 경남 표도 15대 대
선 때 김대중 대통령이 얻었던 표수의 두 배에 이르렀습니다.
정몽준 후보와 노무현 후보의 단일화가 성사되기 이틀전 인 2002년 11월23일
자민련 의원 총회에서 김종필 총재는 "정몽준 후보를 지지한다"고 밝힙니다.
(중앙일보 2002.11.25) 당연히 이회창을 지지할 것으로 여겼던 당 내외에 적
지 않은 충격을 던졌습니다. 14대.15대 대선때 캐스팅보트를 행사했던 김종필
총재는 이번 16대 대선에서도 자신의 비토권을 행사해 이회창 후보에 쏠릴 뻔
했던 충청권 표심을 분산시키면서 노 후보를 민 것입니다. 김 총재는 1997년
15대 대선때의 DJP 연합은 아니지만 사실상 노 후보의 당선을 도운 것이고 15
대 대선때 이회창 후보의 표를 잠식했던 이인제씨가 자민련에 들어간 것도 마
찬가지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김종필 총재는 "나는 누구를 대통령으로 만들 수
는 없지만 누가 대통령이 못되게 할 수는 있다"고 공언한 바 있습니다. 이인제
씨는 이회창지지를 선언했지만 자민련에 합류한 뒤의 일이었고 이미 자민련
은 '대선 중립' 입장 속에 김 총재는 이회창 후보를 견제하는 상황에서 이인제
씨의 이회창지지 발언은 별 의미가 없었습니다. 미국의 적극적인 '후원' 속에
서 김대중 후보가 당선되는 과정과 이번 대선에서 노무현 후보 당선 과정이 흡
사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정몽준 신당의 창당과 정몽준-노무현의 후보단일
화 및 정씨의 극적인 이탈 등도 결과적으로 노무현 흔들기가 아니었습니다. 오
히려 노무현 대통령 만들기의 한 과정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강민화 : 아무튼 노무현 후보의 당선은 미국 부시 행정부의 대북강경책에 대해
서 “잘하고 있다”고 말하거나 6.15공동선언의 2항을 '철회' 혹은 '짚고 넘어
가야겠다'고 말하는 등 일관하게 대북강경자세를 취해온 이회창씨가 당선된 것
보다는 낳겠지요. 그런데 나는 이번 선거 결과를 보는데서 노무현씨가 이겼으
니 잘 되었다는 식의 노무현씨 개인에 대한 인물평보다도 그를 당선시켰고 이
회창씨를 패하게 만든 민심이 더 중요하다고 봅니다. 남(한국)의 신문과 TV 등
에서는 유권자들이 노무현씨가 주장한 ‘낡은 정치의 종식과 새 정치’를 지지
했고, 또 한(조선)반도 평화 문제와 대북관계가 쟁점이 되었던 이번 선거에서
김대중 정권의 대북정책을 계승하고 북핵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해야 된다고
한 노무현씨의 주장을 지지했다고 전했습니다.나는 이것이 최근에 급속히 앙양
되고 있는 반미항전과 오늘까지 남북간의 대화와 교류, 협력을 통해서 형성된
민족화해기운과 동족의식, 이것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고 보고 있으며 그런 의
미에서 6.15공동선언의 생활력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이번 선거 결과를 당선자위주가 아니라 민심위주로 봐야 한다고 보는 또
하나의 이유는 남(한국)의 대통령과 미국의 관계 때문입니다. 이남동포들에게
는 미안하지만, 거기서는 대통령의 선출과 그의 정책이라는 것이 아무래도 미
국의 대한(조선)반도정책에 구속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때문에 노무현씨가
경력으로 보나 평소의 주장으로 보나 긍정적인 인물로 볼 수도 있지만 그도 역
시 대통령 자리에 앉게 되면 정책과 행동에 한계가 있게 되지 않겠나, 아무래
도 이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점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십니까.
미국의 분단관리전략에 따르는 정권 창출
강진욱 : 미국은 남(한국)의 대통령을 미국의 분단관리 전략의 한 수행단위로
여기면서 소위 '동맹 관계'라는 미명하에 정치.군사적, 경제적 수단을 통해
한-미 예속 관계를 유지해왔습니다. 이는 친미 분단독재정권인 이승만 정권의
출범이나 이 정권 말기 미얀마(과거 비루마)식 군사정부 옹립 구상에 따른
5.16쿠데타와 박정희 정권 창출 과정을 통해 이미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박
정권 말기 12.12쿠데타와 광주사태를 배후 조종하면서 2기 군사정부를 출범시
킨 것이나 이후 군사정부와 민간 정치권의 야합(3당합당)을 통한 김영삼정권
창출 및 DJP연합을 통한 김대중 정부 출범 역시 미국의 입김과 무관하지 않았
습니다. 한 예로 김대중 정부 출범은 - 15대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가 당선된
것 역시 이번 노무현 후보 당선과 마찬가지로 '국민의 승리'임이 틀림없지만 -
미국의 한반도 분단관리 전략이 경착륙(침공 및 붕괴 전략)에서 연착륙(접촉
과 관여(engagement)를 통한 체제 변화 전략)으로 이행하는 과정과 일치했습니
다.
미국은 김영삼 정권 말기인 1997년 전후부터 남북대화와 이산가족 면회소 설
치 및 경제협력 등을 허용하는 '관여와 확장 전략'(일명 대북포용정
책/Engagement Policy)을 구상했고 이에 걸맞는 남(한국)의 대통령 후보인 김
대중씨를 밀었습니다. 1997년 김영삼 정부의 일관성 없는 대북정책으로 한-미
간 불협화음이 계속되는 가운데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남북정상회담 주
선 의지를 잇따라 표명한 것이나 돈 오버도퍼 등 미국의 내로라 하는 한반도
전문가들이 잇따라 방한해 김대중 후보의 '통일 구상'과 고난의 정치 역정 등
을 언급하며 한-미 우호 관계와 한반도 평화 및 IMF 극복을 통한 경제 발전 등
에 대한 장밋빛 전망을 내놨던 것 등은 바로 미국의 새 한반도 분단관리전략
의 반영이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김대중씨 역시 자신의 통일관을 연방제가
포함된 '3단계 통일방안'을 물리고 사실상 미국의 분단관리 방안을 수용하는
쪽으로 수정함으로써 미국의 신 대북정책의 적임자로 공인돼 온 터였습니
다. '국민의 정부'가 출범한 뒤 내건 소위 '햇볕정책'은 미국의 '북한 체제 변
화 전략'인 연착륙 정책이었을 뿐 결코 '김대중 대통령의 정책'은 아니었습니
다.
김대중정부의 대북포용정책이 없었더라면 한반도 전쟁 위기가 계속 고조됐을
것이라는 것이 민주당의 기본 입장이었고 그나마 남북간 화해를 지지하는 일반
인 또는 소위 '북한 전문가'들의 주장이지만 이는 본말전도(本末顚倒)입니다.
김대중 정부 출범 이후 지난 5년간의 각종 남북대화 및 교류사업은 한반도 정
세 변화에 따라 미국이 마지못해 일정 정도 허용했다가 자신들의 의도를 벗어
나 남북 화해가 가속화되는 듯 하면 즉시 장애를 조성하는 과정의 연속이었습
니다. 2002년 말 경의선 철도 및 도로 연결을 위한 남북간 지뢰제거 검증단 교
환방문이 미 유엔사의 방해로 무산된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잘 나가던 남북화해협력이 부시정부 출범 이후 수없이 위기를 겪은 것은 바로
그네들의 북한 체제변화 전략(연착륙정책)이 소기의 목적을 거두지 못한 채 남
북이 통일로 급속 접근하는데 따른 것이었습니다.
물론 2000년 이후 한반도 정세는 미국의 분단관리전략우위에서 북(조선)의 연
방제통일전략이 우위를 점하면서 미국의 간섭과 방해 공작은 조금씩 후퇴하는
국면에 있지만 남(한국)에 대한, 특히 대북정책은 '미국의 우산' 아래 있다고
봐야 합니다. '국민의 정부'였던 김대중 정부의 출범 과정과 지난 5년간의 대
북정책이 이처럼 미국이 지탱하려는 분단구조에 속박돼 있었음이 명백한데
2002년 12월19일 치러진 16대 대통령선거는 이런 한반도 분단 구조와 무관했다
고 볼 수는 없습니다. 하루아침에 미국의 영향력이 제로(0)가 되면서 남(한국)
이 자주독립국가가 될 수는 없다는 뜻입니다. 인터넷 시대의 젊은 대통령 후보
의 당선 역시 정치와 경제, 군사 모든 분야 모든 영역에 걸쳐 미국의 영향력
이 미치는 가운데 이뤄진 것입니다. 미국이 이번 남(한국) 대선에 음으로 양으
로 관여했으며 2003년 노무현 정부 출범 이후에도 계속 영향력을 행사함으로
써 그네들의 한반도 분단 구조를 조금이라도 더 지속시키기 위해 갖은 수단을
다 쓸 것입니다.
미국의 전략상 가장 적임자였던 노무현 당선자
강민화 : 그렇다면 미국이 노무현씨를 밀어주었다는 결론이 도출됩니다. 여기
일본에서는 한때 미군철수를 주장했고 요즘도 미국과의 관계가 동등해야 한다
고 주장하는 노무현씨가 대통령이 되면 미국과 마찰이 생길 것이기 때문에 미
국이 겉으로는 노무현씨의 당선을 환영하지만 내심은 그렇지 않다고 보는 여론
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 좀더 자세히 말씀해주셨으면 합
니다.
강진욱 : 2002년말 현재까지도 남북 분단구조에서 연유하는 반통일 정서가 여
전하고 남(한국)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이 갑자기 없어지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저는 미국이 노무현 체제의 출범을 '용인'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서 그의 당선
을 은밀히 도운 것이라고 봅니다. 미국이 한반도 냉전구조를 근본적으로 해체
하고 냉전세력을 퇴조시킴으로써 남북주민의 열망대로 한반도의 재통일을 바
랄 리는 만무하지만 그네들의 대한반도 전략상 노무현 당선자가 가장 적임자였
기 때문입니다.
앞서 말씀드린대로 2000년 이후, 좀 더 멀리 보면 1994년 미국이 제네바기본합
의문에 서명한 이후, 한반도 정세는 미국의 분단관리전략 우위에서 북(조선)
의 연방제통일전략이 우위로 바뀌었습니다. 이런 정세 변화는 북-미 관계 뿐
아니라 미국에 예속된 남(한국)의 자생력을 크게 높여줬고 미국은 이런 한반
도 내외 정세 변화를 수용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서 노무현 후보의 당선을 용인
하면서 '노무현 체제'에 적합한 분단관리전술을 적용하려 한다고 봐야 할 것입
니다.
이승만 친미꼭두각시정권(노무현 대통령 당선자가 중학 2년때 이승만 대통령
에 관한 글짓기를 거부했다는 말에 용기를 내어 이런 '용공적' 표현을 쓰기로
했습니다)에 이어 박정희-전두환-노태우 군사정권을 출범시킨 미국이 1992년 3
당 야합을 통해 '문민정부'를 조작해 내고 같은 방식인 DJP연합을 통해 1997
년 다시 '국민의 정부'를 출범시켰다고 볼 때 '김대중정부' 다음은 '노무현 정
부'가 적합한 것입니다. 이회창 정부는 노태우 정부와 김영삼 정부 사이에 끼
워 넣으면 적합하겠지만 '김대중 이후'는 아닙니다. 한반도 정세가 2-4-6-8의
변화 과정에 있다면 8 다음에 올 수는 10이 맞습니다. 미국의 한반도 분단관
리 전략이 후퇴하면서 남(한국)의 민도가 조금씩 높아지고 평화통일 정세가 뿌
리를 내리는 과정을 '평화적으로 관리'하는 것이 미국의 국가이익을 유지하는
길이었기에 박정희-전두환-노태우 정부 이후 김영삼-김대중 정부가 나올 수 있
었던 것입니다. 만일 한반도 정세가 군사독재정권이 들어서 유혈 시위를 진압
하면서 미국의 국가이익을 보전할 수 있다면 미 군산복합체는 '문민정
부'와 '국민의 정부' 출범을 용인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1997년말 IMF체제 이후 한반도 남녘의 경제는 소위 신자유주의가 판치는 구조
로 급속 재편되면서 미 군산복합체의 금고를 불려주고 있고 IMF 진입과 때를
같이 하는 김대중 정부 출범 전후로 미국의 대북정책은 '접촉을 통한 체제변
화 전략'으로 연성화되면서 남북간 교류와 접촉을 확대해야 할 필요성이 높아
졌습니다. 비록 6.15남북공동선언과 같은 예기치 않은 결실로 한반도 정세는
미국 지배세력이 의도했던 '분단 관리'보다 '평화 통일'의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하루아침에 이런 흐름 전체를 허물어뜨릴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반통일 수구 정권'이 출범하는 것은 대세의 흐름을
역행하는 것입니다. 평화와 통일 정세가 하루아침에 반통일 정부가 주도하는
냉전체제로 뒤바뀐다면 연일 반정부시위와 유혈 진압이 계속되고 남북간 교류
와 협력의 틀은 다시 두절될지도 모릅니다. 이는 지난 10여 년 간 미국이 공
을 들인 한반도 분단관리 전략을 모두 원점으로 되돌리면서 북-미간 핵전쟁 위
기를 고조시킬 것은 불 보듯 뻔합니다.
북-미 관계로 보거나 남북관계로 보거나, 남(한국) 내부 정세로 보거나 남(한
국)에 대북대결론자가 들어서는 것은 미 군산복합체의 정치.경제.군사적 이익
에 부합하지 않는 결과가 초래된다고 하겠습니다. 이회창 후보 역시 이런 흐름
을 감지해 대통령이 되면 김정일 위원장도 만나겠다며 태도를 바꾸기는 했지
만 이미 늦었습니다. 미국이 남북관계를 10년전 혹은 김대중 정부 출범 전의
대결관계로 몰고갈 여력이 없는 한 이 후보가 대통령이 될 수는 없습니다. 역
사의 필연이라고 말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미국이 어떻게 노 후보를 도왔는지는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미
국 금융가 월 스트리트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세계적인 경제통신사인 블룸버
그가 선거 사흘전인 12월16일 이회창 후보와 노무현 후보를 대비시키며 노골적
으로 노 후보를 지지한 것이 한 예가 될 수 있습니다. 아시아금융담담 칼럼니
스트인 윌러엄 퍼섹 주니어(William Pesek jr.)는 <한국 경제 흥망 대선에 달
렸다>(Krean Election May or Break Economy)는 제목의 칼럼에서 "이회창 후보
가 당선되면 한국 투자가 위축되고 과거 재벌경제구조로 후퇴할 것"이라며 노
후보가 IMF 프로그램의 충실한 수행자였던 김대중 대통령이 직접 고른 후계자
임을 강조했습니다. 노 후보가 김대중 정부의 계승자로서 IMF체제의 개혁프로
그램을 지속하기를 바라는 것은 바로 미국 자본의 증식 욕구를 반영한 것입니
다. 같은날 영국의 경제전문지 파이낸셜 타임스도 똑같은 취지의 기사를 게제
하고 "재벌에 우호적인 이 후보의 정책이 재벌에게 다시 많은 권한을 되돌려
주는 결과를 가져오지 않을까 우려된다"고 밝혔습니다. 일부 서방 언론은 심지
어 '제2 IMF 위기감'을 거론하며 김대중정부 연장을 독촉하기도 합니다.
재무장관을 지냈고 94년 창립된 '한-미 21세기위원회' 핵심 멤버로 활약하면
서 남(한국)의 경제정책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공일씨는 11월25일 중
앙일보에 칼럼을 싣고 "제2환란을 우려하는 소리마저 들린다"면서 "아직도 미
진한 구조조정을 가속화해 우리 경제의 체질을 계속 강화해 나가야 한다"고 역
설했습니다. '한-미 21세기 위원회'는 경제분야의 '한-미 안보회의'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미국 자본의 이익에 충실하게 남(한국)의 경제 정책을 조정
하는 것이 주 임무로서 2002년 4월에도 워싱턴에서 회의를 연 바 있습니다.
이 때는 바로 노무현 당선자가 국민 경선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때입니
다. 마침 노 후보가 공보특보를 통해 "대북, 대미정책에서 김대중 대통령과 차
이가 없다"고 강조한 4월8일부터 이틀간 회의가 열린 것도 이채롭습니다. 사공
씨가 이사장으로 있는 세계경제연구원과 미국의 국제경제연구소(소장 프레드
버그스텐)가 공동 주최한 이 회의에는 한-미 양국의 정부와 의회, 재계, 학계
및 언론계 주요 인사 50여명이 참석해 한미 양국간 경제. 안보 현안과 남북관
계 및 한반도 정세 등을 중심으로 한-미간 협력관계 구축을 위한 심도 있는 논
의가 진행됐다고 합니다.
사공 씨의 칼럼이나 블룸버그 칼럼 등은 바로 IMF 프로그램 및 미 군산복합체
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김대중 정부는 반드시 연장되어야 하며 그러
기 위해서는 노무현씨가 당선돼야 함을 역설한 것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노무
현 당선자 또한 이런 신자유주의 논리에 조금씩 편승해 온 것이 사실입니다.
그가 외친 재벌개혁은 어쩌면 IMF와의 타협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질문에서 지적하신 반미시위와 주한미군 문제 등은 노무현 후보의 당선
을 돕는 하나의 카드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15대 대선때 김대중 후보가 'IMF와
의 재협상'을 주장해 굴욕감에 젖었던 남(한국) 민심을 자극하면서 지지율을
끌어올렸던 것과 같다고 저는 봅니다. 광화문의 미국 대사관 앞에서 연일 진행
됐던 촛불시위는 바로 노 당선자의 '대미 선명성'을 상징했고 이는 효순-미선
양 압살 사건으로 처절하게 짓밟힌 이곳 주민들의 자존심에 일순간 카타르시스
를 제공한 것이 사실입니다. 선거가 끝나자마자 곳곳에서 "이제 시위 그만해야
되지 않느냐"는 소리들이 들리고 있습니다. 선거 끝난 뒤 첫 시위였던 지난 21
일 강경진압 분위기가 되살아난 것도 이런 방향 전환이 아니가 생각합니다.
이회창 후보는 부시행정부의 닮은꼴이 아니었나?
강민화 : 지금까지 이회창씨가 부시 행정부의 대북강경책과 가장 가깝거나 그
에 충실한 인물이라는 것이 상식처럼 되어오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미국의 노
무현 지지론(論)'은 이런 상식과 맞지 않습니다. 이런 진단에 대해 혼란에 빠
질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어떻게 설득하시겠습니까.
강진욱 : 흔히들 부시행정부는 이회창 후보의 당선을 바라고 있다고들 말했습
니다만 그것은 대체로 한-미 수구 세력의 바램이었거나 선전전 차원이었을 뿐
부시행정부 파워엘리트의 전략은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앞서 밝힌 IMF 프로
그램을 앞세운 미 자본가집단의 한반도 정책과 마찬가지로 한반도전략을 입안
하고 집행하는 부시행정부내 핵심 전략 그룹은 김대중정부 다음으로 노무현 정
부를 허용할 수밖에 없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미국이 북 핵 문제를 본
격 이슈화(2002.10.16) 하면서 북(조선)을 압박하고 중유 공급을 중단하면서까
지 제네바합의를 깨뜨릴 듯한 분위기를 연출하기는 했지만 실질적으로 이런 압
박 전술을 계속 밀고 나갈 처지가 아닙니다. 북 핵 논란을 시작하면서부터 미
국은 "북한은 이라크와 다르다"거나 "평화적 해결 원칙"을 일관되게 외치고 있
습니다.
미 군산복합체의 한반도전략, 특히 북-미 관계 설정 방향은 관계 악화 또는 긴
장 격화가 아니라 '안정적 관리'를 통한 '분단의 현상 유지'라고 볼 때 이회창
씨는 그 적임자가 될 수 없습니다. 노무현 당선자가 일관되게 강조하고 있는
것이 바로 '북한 관리론'입니다. 이 말의 진의가 무엇인지 아직 정확히 알 수
없고, 노 당선자 또한 자신의 말이 무슨 뜻인지 충분히 알지 못할 것입니다
만, 모름지기 취임후 첫 미국 방문과 한-미 정상회담 이후 그가 말한 '북한 관
리론'은 곧 부시행정부의 긴장완화를 용인하는 '분단관리론'으로 귀착되지 않
나 우려가 됩니다.
노무현은 어떻게 선택됐나?
강민화 : 노무현씨는 어떻게 부시 행정부의 전략상 적임자로 선택되었는지,
이 점에 대해서 좀더 자세히 말씀해주십시오.
강진욱 : 저는 노 당선자가 21세기 남(한국)을 이끌 대통령으로서, 분단을 평
화통일로 이끌 지도자로서 손색이 없다고 생각하며 국민 다수의 판단 역시 그
러했지만 그는 국민의 선택을 받기에 앞서 미국의 선택을 받지 않았나 생각합
니다. 이런 관점에서 저는 노무현 당선자가 김대중 대통령의 후계자로 등장하
는 과정을 다음과 같이 추적해 봤습니다. 이런 추론은, 누구보다 정정당당하
고 소신에 찬 정치행로를 걸어왔고 과거 어느 대통령보다 훌륭한 지도자가 될
것으로 기대되는 노 당선자를 폄하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미국에 예속
돼 있는 분단국의 한 지도자에게 씌워져 있는 '태생적 굴레'를 제대로 인식하
고 그와 우리 국민들이 함께 이 굴레를 벗어 내던질 방도를 찾기 위한 것입니
다. 우리는 '김대중 대통령'을 뽑았지만 국민들이 '역사적 첫 수평적 정권교
체'라는 환희에 들떠 있는 사이 어느새 김대중 대통령은 '신자유주의' '한반
도 분단관리론'을 앞세운 미국의 품으로 가버린 쓰라린 기억을 갖고 있습니
다. 남(한국) 주민들은 분명 노무현 대통령을 '뽑았지만', 앞서 말씀드린대로
이번 대통령선거가 미국의 '절대적 영향력'하에서 치뤄졌다면 우리가 넋을 놓
고 있는 사이에 노 당선자는 어느새 미국의 품으로 가버릴지 모릅니다.
노 당선자는 선거 기간 내내 '자질 시비'에 휘말렸습니다. 국회의원 두 번
(13.15대)에 장관(해양수산부) 한 번 한 경력으로 무슨 대통령이 되느냐는 것
이 바로 '자질론'의 출발점이었습니다. 물론 이런 시비는 그야말로 시비를 위
한 시비였을 뿐이지만 실제로 노 당선자는 2000년 8월 해양수산부 장관에 임명
된 것은 그가 대통령 후보로서의 입지를 구축하는 첫 걸음이었습니다. '노무현
을 사랑하는 모임'(노사모)가 탄생한 것은 이보다 약 두 달 전인 2000년 6월이
었습니다. 그는 해양수산부장관 임명 당시 "정치인집단을 조직화하고 세력으
로 엮어 이끌어 나가는 조직적 리더십을 한번도 실험해 보지 않았다"고 스스
로 토로했듯이 이는 자신의 약점을 보완할 기회였습니다.(한겨레신문
2002.12.20 5면)
실제로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는 해양수산부장관으로 재직하면서 대중적 이미지
를 획득하게 됩니다. 부산과 인천 등 주요 항만 관련 사업을 관장하면서 정치
적 기반을 넓혔고 마침내 2000년 12월 처음으로 대통령 후보 경선 출마 의사
를 밝힙니다.(연합뉴스 2000.12.8 <노무현장관, '정치발언'>) 그리고 2001년
3.26 개각때 장관직을 그만두면서 "오는 10월께 대선주자 '3각 구도'의 하나
로 뛰어오르는게 정치적 목표였는데 시기가 빨라졌다"고 밝힙니다.
6.15공동선언후 시작된 ‘김대중 이후’구상
그가 해양수산부 장관에 임명된 2000년 8월은 남북 정상이 6.15공동선언을 발
표해 미국의 대한반도전략에 일대 충격파를 던진 뒤 미국과 남(한국)내 우익세
력들이 "6.15남북공동선언에 평화조항이 빠졌다"며 이 선언의 의미를 평가절하
하기 위해 온갖 억지논리를 동원할 때였습니다. 미 군산복합체의 생리상 이때
쯤 김대중 이후 남(한국)측 지도부를 구상하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가 경선 출마 의사를 밝힌 2000년 12월은 미 공화당 권력이 부
시정권 출범을 준비하면서 클린턴정부의 대북 평화프로세스가 중단되면서 잘
나가던 남북대화(4차 장관급회담)가 일탈조짐을 보일 때였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이 부시행정부 출범 이후 처음으로 미국을 방문(2001.3.6)한 뒤
2주만에 단행된 3.26 개각은 또한 남북대화 3부 장관인 통일, 외교통상, 국방
부장관이 모두 교체됐다는 점에서 미 지배세력의 대한반도 전략 변화를 시사했
습니다. 미국의 당초 의도와 달리 진행됐던 남북대화 구도를 본래 의도였
던 '남북 긴장 유지 속 교류와 접촉 증대'의 방향으로 끌고 가겠다는 의도라
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김 대통령 방미 전후로 '2차 정상회담' '김정일위원장
서울 답방'을 외치는 목소리가 높았던 것은 곧 1차 남북정상회담의 결실인
6.15공동선언 무효화 기도의 또다른 표현이었습니다. 부시행정부가 남북 화해
협력 및 통일 프로세스의 가속화를 위해 2차 남북정상회담을 강조할리는 만무
했구요. 미국의 입김에 따라 남(한국)의 장관이 교체되느냐는 반론을 제기한다
면 저는 2002년 7월 이태복 보건복지부장관이 미 제약회사의 입김에 의해 교체
됐던 사실을 지적합니다. 미 한반도전략의 제약 속에서 제대로 운신하지 못하
는 남녘 현실에서 대북정책 관련 3부 장관들이 일제히 옷을 벗은 것은 미국의
남북대화 구도가 달라졌음을 의미한다고 봐야 합니다. 당시 이정빈 외교통상부
장관은 "미국 언론이 동으로 가면 한국 언론도 동으로 가고 미국 언론이 서로
가면 한국 언론도 서로 간다"는 유명한 말을 남기고 떠났습니다.
바로 이런 배경 속에서 이뤄진 3.26 개각 때 노무현 당선자는 해양수산부장관
을 그만두고 '민주당 고문' 대열에 합류하면서 본격적인 대권 후보 반열에 오
르게 된 것입니다. 3.26 개각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40대 인사가 4명이나 장
관 또는 장관급에 발탁됐다는 것이었습니다. 16대 대선의 주요 쟁점이었
던 '신-구 세대교체론'은 바로 이때부터 태동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 3.26개각과 관련해 한나라당 정형근 의원이 한 말 또한 16대 대선에서 노무
현씨가 당선된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한 번 되새겨 볼 만한 것이었습니다.
정 의원은 한나라당내 정보통으로 통하며 국가정보원 인맥을 앞세워 온갖 도청
의혹 등 밀실정치의 내막을 폭로하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는 3.26개각 직
후 '제3후보론'을 거론하며 여권 내에서 '예상을 뛰어넘는 새로운 대권주
자'가 부상하고 있다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당시 언론은 그의 발언에 대
해 "국민적 검증을 거치지 않은 후보가 갑자기 부각된다고 해서 국민들의 광범
위한 지지를 이끌어낼 수 있을지 미지수"라며 정 의원의 주장을 근거없는 것으
로 일축하는 분위기였지만 돌이켜 보면 당시 여권 내부에서 새 인물(노 당선
자)을 내세우기 위한 움직임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로부터 일주일
여 뒤인 2001년 4월8일 노무현 당시 민주당 고문은 일단의 정치부 기자들과 만
나 "차차기는 정동영-김민석 의원 등의 몫이며 나는 이번이 아니면 다시는 도
전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노 당선자가 이처럼 대권 후보로 성장하는 모든 과정은 무엇보다 노 후보 자신
의 성실성과 정치적 선명성이 주효했음을 부인해서는 안되지만 그렇다고 그와
그를 지원하는 몇몇 정치권 인사들 또는 7만명의 노사모 회원들만의 힘에 의
한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더 큰 힘이 작용했다고 저는 생각합니
다. 끊임없이 '청와대 배후설'이 나왔던 것도 이런 움직임의 한 표현이 아니었
나 생각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미국이 노무현 정부 출범을 용인 또는 지
원했다는 사실이 아니라 노 체제 출범이 미 군산복합체가 지탱하는 한반도 지
배구조의 한계 속에서 이뤄졌다는 문제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의식을 가질 때에라야 비로소 노무현 정부는 대미 예속 정부가 아닌 진정
한 '국민의 정부'로 거듭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문제의식 없이는 '국민의
정부'라는 미명하에 김대중 정부가 범했던 대미 예속과 그로 인한 온 국민의
기대와 환멸의 악순환이 되풀이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2002년 후반기 정세를 다시 돌이켜본다
강민화 : 우리가 2003년, 2003년 해왔는데 드디어 그 해가 눈앞에 다가왔습니
다. ‘2003년 위기설’도 있습니다만, 어쨌든 조미관계에서 하나의 결정적인
해가 되는 것만은 틀림없겠지요. 문제는 이 2003년의 결전이 어떤 양상을 띠
고 벌어지겠는가, 이것입니다. 이렇게 내년을 내다보기 위해서도 다시한번 이
시점에서 2002년 정세를 잘 돌이켜봐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지금 한(조
선)반도정세의 초점이 되어 있는 ‘북의 핵문제’에 대해서 다시 정리해볼 필
요가 있다고 봅니다. 또 하나는 조-일 관계입니다. 어리석기 그지없는 고이즈
미 정권은 ‘납치문제’라는 것을 지나치게 부각시켜서 국내의 반북여론을 고
취시킨 바람에 오히려 그 여론에 자기들이 구속됨으로써 조-일 관계를 한 걸음
도 진전시키지 못하게됐습니다. 이런 의미로 지난번 고이즈미 수상의 평양방문
과 그후 조일관계에 대해서도 다시 돌이켜보는 것이 어떻습니까.
미국이 종용했던 고이즈미 방북
강진욱 : 미국이 북 핵 문제를 제기한 것은 북(조선)과의 극한 대결 구도로 회
귀하기보다는 북(조선)에 일본의 식민지보상금을 들이밀고 평화공존의 관계를
맺어서라도 북(조선)이 보유한 핵무기 및 탄도미사일 개발 능력을 제어하기 위
한 것이었습니다. 애초부터 극한 대립은 미국의 선택 범위에 포함돼 있지 않았
습니다. 미국이 북 핵 문제를 제기하기로 결정한 것은 남북경제협력추진위원
회 2차 회담과 평양에서의 북-일 당국간 회담이 연쇄적으로 진행되면서 고이즈
미 일본 총리의 평양 방문이 결정되는 시점과 동시였습니다. 한 때 고이즈미
총리 방북이 일본의 독자적 결정이냐 아니냐를 둘러싼 논란이 있었지만 미국
은 북 핵 위협을 해소하고 제네바기본합의 불이행에 따른 손실 보상을 모면하
려는 속셈에서 북-미 간 대타협의 '미끼'로 고이즈미 총리의 평양행을 결정한
것이었습니다.
서울에서 2차 경제협력추진위원회 회의가 진행중이던 2002년 8월28일 존 볼튼
미 국무차관이 서울을 방문해 북 핵 개발 재개 의혹을 강력히 제기했고 같은
시기 볼튼의 상급자인 리처드 아미티지 국무부 부장관은 동경을 방문해 고이즈
미 총리와 만나 역시 북 핵 의혹 문제를 거론하면서 평양 방문을 종용했습니
다. 그리고 8월31일 고이즈미 총리의 평양 방문이 발표됐던 것입니다.(시사저
널 2002.9.12) 물론 고이즈미 총리의 평양방문이 역사적인 '북-일 평양선
언'(9.17)을 통해 미국의 의도대로 북 핵 압박 카드라기보다는 일본의 식민지
배상과 북-일 수교 교섭 약속이라는 모양새로 바뀝니다. 2000년 6월 미국의 남
북 직접대화 시나리오에 따라 남북정상회담을 '허용'했지만 그 결과는 미국
의 '남북 분단 관리'라는 본래 의도를 벗어나 '남북 평화 통일' 구도로 격상
된 것과 같습니다. 모두 미국의 영향력이 미치지 못하는 북(조선)내 '자율 공
간'인 평양에서 이뤄진 사건들이었습니다. 고이즈미 총리의 방북 카드가 미국
의 의도와 다른 방향으로 진전되면서 미국은 당황했고 급히 제임스 켈리를 미
대통령 특사를 평양에 보냈던(2002.10.3-5) 것입니다. 그리고 10월16일 "북한
이 핵무기 개발을 재개했다"고 일방적으로 떠벌리기 시작했습니다. 북 핵 논란
의 전말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즉 미국은 북-일 수교 및 식민지 배상이라는 엄청나게 큰 보따리를 주고서라
도 북(조선)의 핵 개발을 원천 봉쇄하고 모든 핵시설을 동결시키려 했던 것입
니다. 물론 북측은 이에 응하지 않았고 미국은 다시 북-일 수교 교섭을 중단시
키면서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를 급정거시켰지만 이후 대책이 없어 부심하고 있
습니다.
‘제네바합의 무효화’싸움에서 완패한 미국
결국 미국은 2003년 시한의 제네바기본합의에 이어 또다른 합의서에 서명하지
않고서는 북(조선)의 핵 시설 재가동을 멈출 수 없는 처지에 몰리고 있습니
다.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를 종용해 중유 공급을 중단시켰지만 "미국이
제네바합의 파기 의도를 행동으로 보여줬다"는 북(조선)의 반격에 후속 조치
가 궁해졌습니다. 미국의 조치에 대해 북(조선)이 '제네바합의 파기'를 선언하
기를 바랬지만 북측은 미국에 "제네바합의를 준수하라"고 촉구하면서 세계 여
론은 미국의 '제네바합의 파기 시도'에 눈총을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제네바합
의 무효화를 둘러싼 북-미간 명분 싸움에서 미국은 사실상 완패했습니다. 러시
아의소리방송은 11월29일 "미국이 북 핵 개발 문제를 왜곡함으로써 전 세계를
혼란에 빠뜨렸다"고 지적한 것은 미국의 완패를 웅변합니다.
2002년 12월9일 북(조선) 미사일 운반선 '서산호'를 인도양에서 무단 점거하
고 예인했다 하루만에 풀어줘 국제적 망신을 당하는 등 도무지 전후 상황으로
설명되지 않는 실수를 연발하고 있는데 이는 바로 대북 관계에서 보이는 미국
의 '취약성'이라 하겠습니다. 이 사건에 대해서는 전 세계 언론이 미국의 외교
력 부재와 대량파괴무기 억제 정책의 일관성 결여를 질책하고 있고 미국 내에
서조차 이런 정책 결정이 이뤄진 배경에 대한 조사를 촉구하고 있는 실정입니
다. 도무지 북(조선)과의 관계 개선을 위한 실마리를 찾지 못하자 외교적 타협
점을 찾기 위해 이런 실수를 고의로 저지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
입니다. 국제적 망신을 감수하고서라도 초강대국으로서의 위용을 한 차례 과시
하고 이에 대한 피해를 보상하는 '자비'를 보이면서 북(조선)과의 대화에 나서
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불가침협정 외에 다른 방도가 없다
강민화 : 미국이 어차피 북과의 협상에 나서지 않을 수 없다는 선생님의 견해
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런데 요즘 북이 전력생산을 위해서 핵시설을 재가
동하겠다고 발표하고 핵시설에 대한 감시카메라나 봉인을 제거하는 것으로 그
를 실천하자 이른바 ‘이라크 이후’의 조-미 군사적 대결을 우려 또는 예견하
는 여론이 높아가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강진욱 : 12월22일 북(조선)은 마침내 미국의 중유공급 중단 조치에 대응해
핵 동력 재개를 위한 IAEA 감시카메라 제거 및 방사화학실험실의 폐연료봉 봉
인 해제에 들어갔습니다. 미국의 어설픈 대응에 북(조선)은 적절히 강도를 높
이면서 미국을 압박하고 있고 미국은 이에 뾰족한 대책 없이 속을 태우는 형편
입니다. 아직 양국간 긴장이 최고조에 이르지 않았다는 점에서 미국이 좀 더
버틸 여지는 있습니다만, 어차피 미국이 북-미 파국을 용인할 처지가 못됩니
다. 북-미 불가침 조약에 서명하는 도리 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으며 미국도 이
를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물론 항간에 나도는 '2003년 위기설'이 현실화될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는 없을 것입니다. 럼즈펠드 미 국방장관이 23일 "이라크전과 한반도 사태를
동시에 다룰 수 있다"고 호언하기도 했습니다. 1990년대 10년간 견지했던 '두
개 전쟁 동시 승리 전략'인 소위 '윈-윈(Win-Win) 전략'을 다시 복구시키겠다
는 뜻입니다만, 미 부시행정부는 출범과 동시에 '윈-윈'을 폐기하고 아프가니
스탄 침공을 시작으로 이라크와 중앙아시아 일대를 장악하는 '한 개 전쟁 승
리 전략'인 '원-플러스(One-Plus) 전략'을 수립하고 이에 따라 현재 군사전략
을 운용하고 있습니다. 다시 '윈-윈'으로 회귀할 수는 없습니다. 즉 북-미 긴
장이 일순간 고조되더라도 이는 과거와 마찬가지로 미국이 극한의 대결적 자세
를 포기하는 마지막 수순으로 봐야 할 것입니다.
극한의 상황을 상정한다면 미국이 계속 북(조선)의 불가침조약 제의를 거부하
면서 '경제 제재' 조치를 취하거나 UN 안보리 이사회에 대북 제재 결의안 따위
를 상정하는 상황도 올 수 있습니다. 미국의 현재 처지상 이런 행동에 나설 것
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극한 상황'을 상정해 볼 수는 있겠습니다. 이렇게 되
면 북(조선)은 마땅히 북 핵 시설을 재가동할 것이고 2003년까지 유예키로 한
탄도미사일 발사 시험을 재개할 것임은 누구나 다 예상하고 있습니다. 미국은
이미 1993년 5월과 1998년 8월 두 번에 걸친 북(조선)의 탄도미사일 시험 발사
가 1994년 제네바합의와 1999년 페리보고서 및 2000년 북-미 공동코뮈니케로
귀결됐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초강대국으로서의 오만을 만방에 떨치는 지금
과거의 망신을 되풀이하기 전에 북(조선)과의 관계를 개선할 것이라고 확신합
니다. 두 차례 경험에 의한 따끔한 '학습효과'를 미국이 또 잊었으리라고는 생
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미국 대통령 부시가 노무현 당선자에게 전화를 걸어 '조기 방미'를 요청
한 것은 바로 이번 북 핵 문제에 대한 '한국 정부의 중재'를 요청한 것이라고
봅니다. 저들 스스로 벌려 놓은 북 핵 파문에 대해 스스로 잘못했다고 물러서
기는 싫고 남(한국)의 새 대통령이 한반도 긴장 완화를 강력히 요청하므로 이
에 응한다는 식으로 북(조선)과의 관계 개선에 나설 것이라고 봅니다. 수가 궁
할 때 미국이 항상 내세우는 것이 바로 '한국 당사자론'입니다. 남북화해에 간
섭하고 훼방을 놓을 때는 안중에도 없다가 북측과의 대결에서 더 이상 물러설
길이 없을 때면 남측을 중재자로 내세워 '남북 직접 대화'를 허락하는 것과 같
습니다.
최근 고이즈미 총리가 러시아를 방문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다시 만날 것이라
는 보도가 나오고 있는 것도 바로 미국의 화해 전술이 아닌가 여겨집니다. 그
네들의 대북 협상의 지렛대로 이용하려다 뜻대로 안되자 뒤로 밀쳐 놓은 '북-
일 수교 교섭' 카드를 다시 꺼내는 것입니다. 미국의 심통 때문에 일본은 자
못 신사다운 태도로 대북 관계 개선에 나설 기회를 놓쳤고 다시 미국이 떼밀
자 대북 화해에 나서는 꼴입니다. 외교적 합의를 깨고 '일시귀국자'들을 억류
한 것이나 미국의 강박에 못이겨 핵 문제를 제기한 것 등 일본이 이들 '과
오'를 어떻게 수습할지 자못 궁금합니다. 일본이 이처럼 갈팡질팡 하는 사이
에 동포 사회가 감내하기 힘든 고통을 겪은 것으로 듣고 있습니다. 너무 안된
일입니다.
이런 일련의 흐름은 바로 앞서 말씀드린 '미국의 취약성'을 드러내는 것으로
현재 북-미 관계상 남(한국)의 대통령이 '대북 대결론자'가 아니라 '화해협력
론자'여야 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현재 북-미 대립은 미국이 한반
도 정책을 냉전시대로 회귀시키려 하기보다는 어떻게든 북(조선)의 핵 및 미사
일 개발을 억제하면서 긴장을 완화해야 하며 다른 경제적 이익 측면에서도 차
기 남(한국) 지도자는 반북대결론여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강민화 : 선생님의 말씀을 흥미 있게 들었습니다. 좋은 말씀을 해주신데 대해
서 감사합니다. 마지막에 머지 않아 맞이하는 새해 2003년에 즈음해서 재일동
포들에게 메시지를 보내주시면 감사합니다.
강진욱 : 메시지라기보다 그저 신년 연하장을 대신해 기원의 말씀을 올립니
다.
"분단 조국의 백성으로 사는 고통의 길은
압제와 억압의 역사를 헤치고 문명의 새 시대를 여는 창조의 길이라고
믿습니다.
분단의 공간 끝자락에서
남북 두 조국의 자존심을 올곧게 지켜내는
동포 여러분들께 경의를 표합니다.
2003년 새 해 영광이
통일 조국의 미래를 비출 때
동포 여러분들의 고통이 사라지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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