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여성시대]이랜드 비정규직 사원의 외침
따가운 햇살만큼이나 뜨거운 하루하루가 계속되는 요즘입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올 해 스물 여섯의 대한민국 신체 건강한 청년입니다. 저는 정상적인 가정에서 정상적인 교육을 받았고,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이렇게 목이 메어오는 아픈 가슴을 억누르며 글을 쓰는 이유를 지금부터 얘기하도록 하겠습니다.
저희 가족은 아버지, 어머니, 여동생, 저를 포함하여 네 식구입니다. 다른 가정처럼 모두들 직장 생활을 하며 가정을 꾸려 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특별한 점이 있다면 네 식구 모두가 정상적인 직장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요즘 흔히들 언론에서 얘기하는 비정규직이란 얘기입니다. 그렇다고 당장 입에 풀칠하기 어려울 그런 경제적 어려움은 없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27년간 꾸려오신 가정이 하루아침에 무너질 일은 없겠지요. 하지만 아버지, 어머니께선 말씀하십니다. 언제 쫓겨날지 모르는 직장에서 얼마나 큰살림을 이룰 수 있겠냐고. 얼마전엔 병원에 다니는 여동생이 하루아침에 해고되는 일도 있었습니다. 의약분업 때문 이라나요.
아버지는 몇 년째 약 봉투를 가지고 사십니다. 제가 중학교 1학년이 되던 해에 쓰러지셔서 벌써 13년째 약을 드십니다. 그래도 돈 벌어 보시겠다고 새벽부터 나가십니다. 건축일로 밥벌이를 해 온지 벌써 30년이라고 당신께선 자랑스레 말씀하십니다.
단 한 번도, 쉬는 날 제 때 쉬어보지 못하고 하루일당이 아니면 살아가기가 어려운 생활 속에서 지금까지 살아 오셨습니다. 어머니 역시 생활이 넉넉하지 못하니 집에서 살림만 할 수는 없었습니다. 소규모 영세 사업장을 떠돌면서 퇴직금은 고사하고 명절날 그 흔한 떡값 한 번 제대로 받아보지 못하셨습니다.
그렇다고 좋은 직장을 다닐 수도 없었습니다. 당신들 모두 변변한 기술이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싫어도, 원치 않아도 일자리를 찾아 여기저기 나가야 했습니다. 안정적이지 못한 직장생활을 수십 년 하신 당신들께선 언제나 하루하루가 걱정이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뿐인 아들에게 언제나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좋은 대학 나와서 꼭 좋은 직장 잡으라고. 당신들처럼은 절대 살지 말라고 말입니다.
학교를 다니던 중 군입대로 휴학을 했습니다. 제대 후엔 용돈이나 벌어볼 생각으로 여기저기 직장을 잡아보려고 노력했지만, 쉽게 알맞은 직장을 구하기란 어려웠습니다. 원하는 일이 아니더라도 어쩔 수 없이 용돈이라도 벌어 볼 생각으로 일을 다녀야 했습니다. 그러던 중 의류회사인 이랜드 부곡물류센터에 친구 소개로 일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가 99년 11월이었습니다.
임금이 506.000원이란 사실과 도시락을 준비해서 다녀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선택에 여지가 없었습니다. 당장 한 푼에 돈이 아쉬울 때였으니까요. 회사에서는 '아르바이트' 라고 부르는 비정규직이었지만 하루 8시간 노동에 야근까지 해 가며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 곳 동료들도 저와 비슷한 또래가 많았고, 일은 힘들지만 오랫동안 다닌 친구들도 많았습니다. 열악하기 그지없는 작업환경이었습니다. 환기시설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창고 안에서 다 찢어져 가는 상의 한 벌만으로 냉동고 같은 창고에서 겨울을 보냈습니다. 정규직 사원들은 좀처럼 들어오려 하지 않는 창고에서 우린 무거운 옷 박스를 나르고 분배하고, 물건의 입출고 일을 했습니다. 현실적인 모든 일들을 직접 우리가 담당한 것입니다. 또한, 여름엔 오히려 30도를 웃도는 밖이 시원할 정도의 무더운 창고였습니다.
역시 냉방시설은 사치였습니다. 소금기 묻어나는 런닝을 입으면서도 우린 열심히 일했습니다. 우리 동료들은 IMF 때, 시급 3500원이던 임금이 세 차례에 걸쳐 삭감되어 채 2000원이 안되는 임금을 받으면서도 아무런 불평, 불만 없이 일을 하였습니다.
함께 일하는 동료가 좋았고, 땀흘리는 지금이 젊은 날의 좋은 추억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 그리고 회사가 나아지면 얼마든지 임금을 올려 받을 수 있을 것이란 믿음이 기독교 회사 이랜드를 다니는 우리에게 있었습니다.
저 역시 이런 동료들이 더 없이 소중했고 좋았기에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환경의 작업이었지만, 견딜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2000년 3월 1일부로 회사가 우리를 임금을 조금 더 주는 도급업체로 넘긴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도급업체에 넘기려는 회사의 입장이 너무도 황당한 것이었습니다. 임금을 회사에선 올려줄 수 없으니 도급업체로 보내 주겠다.
그런데 정작 도급업체에 지급하는 돈은 80만원이라고 하니 왜 우리월급은 올려줄수 없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이랜드란 회사를 좋아했고 그러기에 506,000원을 받으면서도 함께 일하는 동료들이 좋아 견딜 수 있었는데 하루아침에 일방적으로 도급으로 넘긴다는 사실이 배신당했다는, 인간적인 모멸감으로다가 왔습니다. 인원관리를 포기함으로써 모든 책임을 도급업체로 넘기고 회사는 우리를 단지 일하는 도구로만 여기겠다는 얘기로밖에 안 들렸던 우리는 아르바이트, 아니 비정규직이라는 설움을 참고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린, 3월 6일 노동조합에 가입해 비정규직 분회를 결성했습니다.
지금의 임금을 IMF 이전으로 원상회복 시켜서 726,000원으로 올려달라는 요구와 비인간적인 도급을 철폐하라는 요구를 했습니다. 또한 일방적으로 계약을 해지하는 일도 없게 해 달라는 요구와 함께 말입니다. 너무나 당연하고 정당한 요구였습니다. 회사에서 말하는 아르바이트가 아닌 똑같은 일을 하고 있는 노동자로서 당연한 요구이며 간절한 몸부림이었습니다. 생존권이 위협받는 상황을 그대로 방치할 수 없었습니다. 그 동안 단 한번도 당당하게 말할 수 없었던 우리의 목소릴 내었던 것입니다.
회사는 우리가 노동조합을 만들자 도급으로 넘기려던 계획을 멈추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정당한 요구에 대해선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도급으로 들어온 직원에겐 65만원의 임금을 주고, 이랜드 소속의 비정규직인 우리에겐 전과 똑같은 506,000원을 주었습니다. 왜 우린 506,000원밖에 주지 않느냐는 질문에 회사는 계약을 그렇게 하지 않았느냐, 싫으면 그만두든가 도급소속으로 가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렇습니다. 어쩜 도급업체로 가서 65만원을 받는게 나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회사가 행한 도급은 노동부로부터 불법파견 이라는 판정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는 일이 지속적인 업무이고 단기간 인원을 필요로 하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2000년 6월 16일. 우린 506,000원의 임금도 받지 못하게될지 모르는 파업이란걸 시작했습니다. 노동조합이 무엇인지 잘은 모르지만 우리의 정당한 요구와 생존권이 위협받는 상황에선 소리칠 수 밖에 없었고, 회사를 상대로 싸울 수 밖에 없었습니다.
2000년 7월 17일 제헌절 아침,
저희들은 무기한 파업 32일째를 맞고 있습니다. 수많은 회사의 회유와 억압, 차마 인간으로서 아니, 함께 일하던 동료로서 이랜드란 회사가 우리 힘없고 약한 노동자들에게, 비정규직들에게 던진 커다란 상처는 피눈물과 함께 한이 되었습니다. 한 달 급여 506,000원을 받지 못해가면서 우린 목청 높여 외칩니다.
"못살겠다 50만원, 먹고살자 70만원"이라고. 지난 6월 16일에 파업에 돌입한 이후 우린 정말 비정규직의 아픔을 몸으로 느껴야 했습니다. 돈 많이 주는데로 가지 왜 여기 와서 난리 치냐고 되묻는 회사 직원들, '아르바이트가 무슨 노동조합이냐, 너희 사업장으로 가라'며 입에 담지 못할 폭언과 욕설을 내 뱉는 기독교회사 이랜드 직원들.
사람답게 인간답게 대접해 달라고 외치는, 정당한 요구에 대해서 회사는 귀와 입을 막아 우릴 거리로 내 몰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 땅의 비정규직 노동자가 700만, 수치상으론 그렇지만 800만 가량 된다고 합니다. 1300만 노동자 중에 800만이 비정규직이라는 사실을 듣고 막연했던 불안함이 현실로 느껴졌습니다. 저희 집 가족들만 보아도 네 식구 모두가 비정규직이니까요. 아버지, 어머니, 동생이 강제로 해고될 때 아무 말 않고 그저 회사가 시키는 대로 해고 당해야 했습니다. 저까지 같은 길을 걸을 수가 없었습니다.
언제 해고될 지 모르는 비정규직사,. 여기엔 아르바이트, 도급직, 용역사원, 계약직 노동자들도 있습니다. 그 분들께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더 이상 우리의 권리를 외면하지 맙시다! 무엇 때문에 우리가 우리의 노동을 착취당하고 무엇 때문에 우리가 일한 만큼의 대가를 받지 못해야 합니까?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땀흘리는 우리가 무엇 때문에 하루아침에 직장에서 해고되어 거리로 내몰려야 합니까. 이젠 당당하게 소리쳐야 한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젠 당당하게 외쳐야 한다고 감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더 이상 이 땅에 비정규직이라는 멍에가 있어서는 결코 안 된다고 소리치고 외쳐야 합니다.
파업이후 일주일에 한두번 집에 갈 때마다 어머니는 말씀하십니다. 그만하고 집으로 돌아오라고. 다른 직장 알아보든가 학교 복학 준비나 하라고 말입니다. 그 때마다 전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학교는 포기해도 지금 하는 일은 포기할 수 없다고, 우리 네 식구가 비정규직인 것도 서러운데 내가 결혼해서 내 자식까지 비정규직으로 살아가야 한다면 차라리 지금 혀 깨물고 이 자리에서 쓰러지겠다고 감히 어머님 앞에서 눈물 흘리며 얘기합니다.
아직도 우리 부모님은 이해 못하십니다. 제가 왜 월급두 안나오는 파업이란걸 하는지, 왜 TV에선 데모하는 사람들은 다 나쁜 사람들이라고 말하는데
내 아들이 위험하게 그런 일을 하고 다니는지 말입니다.
하지만, 믿습니다. 언젠간 저희 부모님도 자랑스러워 하시리라는 것을. '내 아들 역시 다르구나' 라며 눈물 흘리실 날이 분명히 올 것이란 사실을 믿습니다.
이 땅에 비정규직 노동자가 사라지는 날, 정말 우리 나라가 선진국이 되는 날이라고 생각합니다. 열심히 싸울 것입니다. 비정규직이라서가 아니라 사람으로서 인간으로서 내 자신의 존엄한 가치를 확인받을 겁니다. 가진자의 오만과 만용 앞에서 말입니다.
하고 싶은 얘기는 많지만 이쯤에서 줄입니다. 더운 날씨인데 몸 건강하시고, 저희들이 승리하는 날, 또 하나의 편지를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그 때는 분명히 승리의 편지일 겁니다.
그 편지를 쓸 수 있는 날이 하루 빨리 오길 희망하면서..
2000년 7월17일 제헌절 아침...
이랜드 신촌본사 사옥 파업 농성장에서 올립니다.
따가운 햇살만큼이나 뜨거운 하루하루가 계속되는 요즘입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올 해 스물 여섯의 대한민국 신체 건강한 청년입니다. 저는 정상적인 가정에서 정상적인 교육을 받았고,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이렇게 목이 메어오는 아픈 가슴을 억누르며 글을 쓰는 이유를 지금부터 얘기하도록 하겠습니다.
저희 가족은 아버지, 어머니, 여동생, 저를 포함하여 네 식구입니다. 다른 가정처럼 모두들 직장 생활을 하며 가정을 꾸려 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특별한 점이 있다면 네 식구 모두가 정상적인 직장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요즘 흔히들 언론에서 얘기하는 비정규직이란 얘기입니다. 그렇다고 당장 입에 풀칠하기 어려울 그런 경제적 어려움은 없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27년간 꾸려오신 가정이 하루아침에 무너질 일은 없겠지요. 하지만 아버지, 어머니께선 말씀하십니다. 언제 쫓겨날지 모르는 직장에서 얼마나 큰살림을 이룰 수 있겠냐고. 얼마전엔 병원에 다니는 여동생이 하루아침에 해고되는 일도 있었습니다. 의약분업 때문 이라나요.
아버지는 몇 년째 약 봉투를 가지고 사십니다. 제가 중학교 1학년이 되던 해에 쓰러지셔서 벌써 13년째 약을 드십니다. 그래도 돈 벌어 보시겠다고 새벽부터 나가십니다. 건축일로 밥벌이를 해 온지 벌써 30년이라고 당신께선 자랑스레 말씀하십니다.
단 한 번도, 쉬는 날 제 때 쉬어보지 못하고 하루일당이 아니면 살아가기가 어려운 생활 속에서 지금까지 살아 오셨습니다. 어머니 역시 생활이 넉넉하지 못하니 집에서 살림만 할 수는 없었습니다. 소규모 영세 사업장을 떠돌면서 퇴직금은 고사하고 명절날 그 흔한 떡값 한 번 제대로 받아보지 못하셨습니다.
그렇다고 좋은 직장을 다닐 수도 없었습니다. 당신들 모두 변변한 기술이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싫어도, 원치 않아도 일자리를 찾아 여기저기 나가야 했습니다. 안정적이지 못한 직장생활을 수십 년 하신 당신들께선 언제나 하루하루가 걱정이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뿐인 아들에게 언제나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좋은 대학 나와서 꼭 좋은 직장 잡으라고. 당신들처럼은 절대 살지 말라고 말입니다.
학교를 다니던 중 군입대로 휴학을 했습니다. 제대 후엔 용돈이나 벌어볼 생각으로 여기저기 직장을 잡아보려고 노력했지만, 쉽게 알맞은 직장을 구하기란 어려웠습니다. 원하는 일이 아니더라도 어쩔 수 없이 용돈이라도 벌어 볼 생각으로 일을 다녀야 했습니다. 그러던 중 의류회사인 이랜드 부곡물류센터에 친구 소개로 일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가 99년 11월이었습니다.
임금이 506.000원이란 사실과 도시락을 준비해서 다녀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선택에 여지가 없었습니다. 당장 한 푼에 돈이 아쉬울 때였으니까요. 회사에서는 '아르바이트' 라고 부르는 비정규직이었지만 하루 8시간 노동에 야근까지 해 가며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 곳 동료들도 저와 비슷한 또래가 많았고, 일은 힘들지만 오랫동안 다닌 친구들도 많았습니다. 열악하기 그지없는 작업환경이었습니다. 환기시설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창고 안에서 다 찢어져 가는 상의 한 벌만으로 냉동고 같은 창고에서 겨울을 보냈습니다. 정규직 사원들은 좀처럼 들어오려 하지 않는 창고에서 우린 무거운 옷 박스를 나르고 분배하고, 물건의 입출고 일을 했습니다. 현실적인 모든 일들을 직접 우리가 담당한 것입니다. 또한, 여름엔 오히려 30도를 웃도는 밖이 시원할 정도의 무더운 창고였습니다.
역시 냉방시설은 사치였습니다. 소금기 묻어나는 런닝을 입으면서도 우린 열심히 일했습니다. 우리 동료들은 IMF 때, 시급 3500원이던 임금이 세 차례에 걸쳐 삭감되어 채 2000원이 안되는 임금을 받으면서도 아무런 불평, 불만 없이 일을 하였습니다.
함께 일하는 동료가 좋았고, 땀흘리는 지금이 젊은 날의 좋은 추억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 그리고 회사가 나아지면 얼마든지 임금을 올려 받을 수 있을 것이란 믿음이 기독교 회사 이랜드를 다니는 우리에게 있었습니다.
저 역시 이런 동료들이 더 없이 소중했고 좋았기에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환경의 작업이었지만, 견딜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2000년 3월 1일부로 회사가 우리를 임금을 조금 더 주는 도급업체로 넘긴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도급업체에 넘기려는 회사의 입장이 너무도 황당한 것이었습니다. 임금을 회사에선 올려줄 수 없으니 도급업체로 보내 주겠다.
그런데 정작 도급업체에 지급하는 돈은 80만원이라고 하니 왜 우리월급은 올려줄수 없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이랜드란 회사를 좋아했고 그러기에 506,000원을 받으면서도 함께 일하는 동료들이 좋아 견딜 수 있었는데 하루아침에 일방적으로 도급으로 넘긴다는 사실이 배신당했다는, 인간적인 모멸감으로다가 왔습니다. 인원관리를 포기함으로써 모든 책임을 도급업체로 넘기고 회사는 우리를 단지 일하는 도구로만 여기겠다는 얘기로밖에 안 들렸던 우리는 아르바이트, 아니 비정규직이라는 설움을 참고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린, 3월 6일 노동조합에 가입해 비정규직 분회를 결성했습니다.
지금의 임금을 IMF 이전으로 원상회복 시켜서 726,000원으로 올려달라는 요구와 비인간적인 도급을 철폐하라는 요구를 했습니다. 또한 일방적으로 계약을 해지하는 일도 없게 해 달라는 요구와 함께 말입니다. 너무나 당연하고 정당한 요구였습니다. 회사에서 말하는 아르바이트가 아닌 똑같은 일을 하고 있는 노동자로서 당연한 요구이며 간절한 몸부림이었습니다. 생존권이 위협받는 상황을 그대로 방치할 수 없었습니다. 그 동안 단 한번도 당당하게 말할 수 없었던 우리의 목소릴 내었던 것입니다.
회사는 우리가 노동조합을 만들자 도급으로 넘기려던 계획을 멈추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정당한 요구에 대해선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도급으로 들어온 직원에겐 65만원의 임금을 주고, 이랜드 소속의 비정규직인 우리에겐 전과 똑같은 506,000원을 주었습니다. 왜 우린 506,000원밖에 주지 않느냐는 질문에 회사는 계약을 그렇게 하지 않았느냐, 싫으면 그만두든가 도급소속으로 가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렇습니다. 어쩜 도급업체로 가서 65만원을 받는게 나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회사가 행한 도급은 노동부로부터 불법파견 이라는 판정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는 일이 지속적인 업무이고 단기간 인원을 필요로 하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2000년 6월 16일. 우린 506,000원의 임금도 받지 못하게될지 모르는 파업이란걸 시작했습니다. 노동조합이 무엇인지 잘은 모르지만 우리의 정당한 요구와 생존권이 위협받는 상황에선 소리칠 수 밖에 없었고, 회사를 상대로 싸울 수 밖에 없었습니다.
2000년 7월 17일 제헌절 아침,
저희들은 무기한 파업 32일째를 맞고 있습니다. 수많은 회사의 회유와 억압, 차마 인간으로서 아니, 함께 일하던 동료로서 이랜드란 회사가 우리 힘없고 약한 노동자들에게, 비정규직들에게 던진 커다란 상처는 피눈물과 함께 한이 되었습니다. 한 달 급여 506,000원을 받지 못해가면서 우린 목청 높여 외칩니다.
"못살겠다 50만원, 먹고살자 70만원"이라고. 지난 6월 16일에 파업에 돌입한 이후 우린 정말 비정규직의 아픔을 몸으로 느껴야 했습니다. 돈 많이 주는데로 가지 왜 여기 와서 난리 치냐고 되묻는 회사 직원들, '아르바이트가 무슨 노동조합이냐, 너희 사업장으로 가라'며 입에 담지 못할 폭언과 욕설을 내 뱉는 기독교회사 이랜드 직원들.
사람답게 인간답게 대접해 달라고 외치는, 정당한 요구에 대해서 회사는 귀와 입을 막아 우릴 거리로 내 몰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 땅의 비정규직 노동자가 700만, 수치상으론 그렇지만 800만 가량 된다고 합니다. 1300만 노동자 중에 800만이 비정규직이라는 사실을 듣고 막연했던 불안함이 현실로 느껴졌습니다. 저희 집 가족들만 보아도 네 식구 모두가 비정규직이니까요. 아버지, 어머니, 동생이 강제로 해고될 때 아무 말 않고 그저 회사가 시키는 대로 해고 당해야 했습니다. 저까지 같은 길을 걸을 수가 없었습니다.
언제 해고될 지 모르는 비정규직사,. 여기엔 아르바이트, 도급직, 용역사원, 계약직 노동자들도 있습니다. 그 분들께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더 이상 우리의 권리를 외면하지 맙시다! 무엇 때문에 우리가 우리의 노동을 착취당하고 무엇 때문에 우리가 일한 만큼의 대가를 받지 못해야 합니까?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땀흘리는 우리가 무엇 때문에 하루아침에 직장에서 해고되어 거리로 내몰려야 합니까. 이젠 당당하게 소리쳐야 한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젠 당당하게 외쳐야 한다고 감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더 이상 이 땅에 비정규직이라는 멍에가 있어서는 결코 안 된다고 소리치고 외쳐야 합니다.
파업이후 일주일에 한두번 집에 갈 때마다 어머니는 말씀하십니다. 그만하고 집으로 돌아오라고. 다른 직장 알아보든가 학교 복학 준비나 하라고 말입니다. 그 때마다 전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학교는 포기해도 지금 하는 일은 포기할 수 없다고, 우리 네 식구가 비정규직인 것도 서러운데 내가 결혼해서 내 자식까지 비정규직으로 살아가야 한다면 차라리 지금 혀 깨물고 이 자리에서 쓰러지겠다고 감히 어머님 앞에서 눈물 흘리며 얘기합니다.
아직도 우리 부모님은 이해 못하십니다. 제가 왜 월급두 안나오는 파업이란걸 하는지, 왜 TV에선 데모하는 사람들은 다 나쁜 사람들이라고 말하는데
내 아들이 위험하게 그런 일을 하고 다니는지 말입니다.
하지만, 믿습니다. 언젠간 저희 부모님도 자랑스러워 하시리라는 것을. '내 아들 역시 다르구나' 라며 눈물 흘리실 날이 분명히 올 것이란 사실을 믿습니다.
이 땅에 비정규직 노동자가 사라지는 날, 정말 우리 나라가 선진국이 되는 날이라고 생각합니다. 열심히 싸울 것입니다. 비정규직이라서가 아니라 사람으로서 인간으로서 내 자신의 존엄한 가치를 확인받을 겁니다. 가진자의 오만과 만용 앞에서 말입니다.
하고 싶은 얘기는 많지만 이쯤에서 줄입니다. 더운 날씨인데 몸 건강하시고, 저희들이 승리하는 날, 또 하나의 편지를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그 때는 분명히 승리의 편지일 겁니다.
그 편지를 쓸 수 있는 날이 하루 빨리 오길 희망하면서..
2000년 7월17일 제헌절 아침...
이랜드 신촌본사 사옥 파업 농성장에서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