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E Login

가맹산하조직별로 발급한 아이디로만 접속 가능하며, 개인 아이디는 사용 불가합니다.

search

문서자료

[펌]새로운 대미관계의 모색 - 강정구

작성일 2003.10.07 작성자 통일위원회 조회수 8178
Atachment
첨부파일 다운로드
새로운 대미관계의 모색 - 강정구

1. 머리말

올해로 이곳 남한 땅을 정치-군사적인 신식민지로 만든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된 지 50년이 된다. 근 50년이 되어서야 햇볕정책으로 이들 신식민지적 제약을 거둬내고 민족이 민족다워지려는 6․15공동선언이라는 민족대장전을 일구어 내었다. 또한 미선이와 효순이를 학살한 사건을 계기로 미국제국주의에 의해 태생적으로 또 구조적으로 상실된 주권을 되찾고, 한반도에 또 다시 엄습하는 전쟁위기를 극복하려는 광화문 촛불행진이 지속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주체적인 민족사를 쟁취하려는 자주적인 역사행로를 파행시키고 노예의 역사를 지속하려는 일부 기독교 근본주의 광신자, 전쟁이란 칼부림에 이력이 난 군인퇴물, 그리고 분단과 전쟁 및 미국의 신식민지적 지배 덕분에 잘먹고 잘 살게 된 맹목적 숭미 예속주의 무리들이 서울 시청 앞 광장에서 야단법석을 떨었다. 그것도 일제의 조선식민지 지배를 물리치기 위해 분연히 조선인들이 일어났던 3․1절 기념일에 주한미군철수반대, 북핵반대, 한미공조 훼손 반대 등을 외치면서 성조기를 앞세우고 ‘우리는 미국의 충실한 노예가 되기를 원합니다’ 라는 식의 노예선언을 한 셈이다.

이들의 노예를 향한 행군이야말로 우리 민족사에서 원나라라는 외세가 고려를 식민지 지배할 때도 김부식 같은 무리들이, 명나라가 조선을 속국 다루듯이 할 때인 광해군 때 반역의 무리들이, 일본제국주의의 악랄한 조선지배인 일제시대 친일파민족반역자 무리 등도 이와 같은 노예주의를 외치면서 외세에 의존한 그들의 기득권을 수호하기 위한 반역사와 반민족의 극치를 보였던 것을 연상케 한다.

이들이 그렇게 짝사랑하는 미국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미국은 1945년 조선이 해방되자말자 38선을 임의로 그어 우리 민족을 지리적으로 분단시키고 이 결과 전쟁을 불가피하게 조건지으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우리 민족사에 개입하기 시작하여 최근 남한의 IMF관리체제와 북한의 핵개발 및 미사일문제에 까지 이르고 있다. 이 같이 미국은 우리 민족의 결정적인 역사적 계기인 해방공간에 발생적 결정요인으로서 우리의 역사를 분단과 전쟁으로 왜곡시켰고, 그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구조적으로 엄청난 강제력을 행사하고 있는 사회적 실재(social fact)이다.

이러한 발생적 및 구조적 결정요인인 미국은 최근 김대중대통령의 햇볕정책으로 남북 간의 진정한 화해와 협력을 통해 평화통일로 나아가려는 움직임에 노골적인 제동을 걸고 있다. 곧 북핵문제를 제기해 한반도 전쟁위협을 강요하는 식민지적 ‘악의 제국’을 연출하는 국면적 결정요인의 역을 가차없이 행하고 있다. 평화와 통일로 나아가는 우리 민족앞길을 또 다시 가로막는 주범인 셈이다.

지금 우리는 미국이라는 외세의 주도에 의해 강제로 분단된 조국을 우리 스스로 재통일해야 하는 과제를 띤 통일시대라는 민족사적 전환기에 살고 있다. 이 민족사적 전환기에 그 핵심과제인 민족통일을 위해서는 해방공간 이후 지금까지 우리 민족사에 결정적 영향력을 행사해 온 미국의 참모습을 제대로 파헤치고 그 대안을 모색할 것이 요구된다.

이에 이 글은 해방 이후 지금까지 우리 민족사에 가장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해 온 외세인 미국과 남․북한과의 관계를 고찰하고자 한다. 이를 통하여 장기적 민족사를 위한 올바른 미국에 대한 인식의 토대를 마련하고 민족통일의 밑거름을 형성하는데 도움이 되고자 한다. 첫째는 우리에게 분단과 전쟁을 강요한 발생적 결정요인으로서 미국을, 둘째는 5․18에서 2003년 한반도 전쟁위기까지 구조적 결정요인으로서 미국을, 셋째는 햇볕정책을 통해 한반도 냉전체제를 해소하고 민족의 진정한 화해와 협력으로 평화통일로 나아가려는 민족앞길을 가로막는 국면적 결정요인으로서의 미국을, 넷째는 탈냉전 평화의 시대라는 1990년 이후 지금까지 무려 여섯 번의 한반도 전쟁을 획책하여 끊임없이 민족생명권을 위협하는 저승사자로서의 미국을 파헤치겠다. 셋째는 남한에 개입한 미국에, 넷째는 북한에 개입한 미국에 초점을 맞추는 분석이다. 그리고 다섯째는 이러한 예속적이고 신식민지적인 한미관계를 정상적인 한미관계로, 곧 주한미군과 한미공조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통해, 모색한다. 마지막으로 21세기 한반도시대의 모색과 전망을 시도한다.

2. 발생적 결정요인으로서의 미국

분단과 전쟁의 강요

우리 현대사는 해방이라는 환희와 더불어 일본제국주의의 찌꺼기를 말끔히 씻어내고 새로운 조선사회를 조선인에 의해 창건하려는 민족사적 전환기 또는 역사갈림길의 출발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환희와 역사바꿈의 내재적 역사동력은 미군정이란 암초에 걸렸다. 역사의 갈림길에서 조선사회 고유의 역사행로가 이 암초에 걸려 왜곡되는 출발을 강제 당하게 된다. 이 결과 해방공간 당시 제기되었던 민족사적 핵심과제가 제대로 구현되지 못하고 실종되었다. 더 나아가 분단과 전쟁으로 이어졌다. 이 역사행로는 민족사의 내재적 역사동력이 지향하는 역사행로를 왜곡하고 이탈하는 것이었기에 반민족적 행로였고, 인류보편사의 흐름과도 배치되었기에 반역사적인 것이었다. 이 때문에 우리의 현대사는 출발부터 태생적 한계를 가지게 되었다. 이 시련 속에서도 밖으로부터 강요되는 발생적 결정요인(genesis determinist)인 미국에 의해 강요된 태생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하여 우리 민족은 간고한 투쟁을 전개하는 역사주체의 화신(化身)이었다.

1945년 해방이 되자 조선사회는 아래와 같은 5가지의 민족사적 핵심과제를 가지게 되었다 (1) 친일파 청산을 주축으로 한 일본제국주의의 인l적, 물적, 제도적 잔재를 청산하는 것, (2) 분단을 막고 민족통일국가를 수립하는 것, (3) 봉건적 토지제도의 전면적 개혁을 중심으로 한 민중권익을 증진시키는 것, (4) 친일파와 민족반역자를 숙청하고 민족해방투쟁가들이 권력핵심이 되어 새로운 조선사회를 이끌어 가 민족자주를 확립하는 것, (5) 인간의 기본권과 정치권을 주축으로 하는 민주화의 구현이었다.

이들 민족사적 핵심과제는 어떤 정권이 들어서든, 어떤 이념이나 사상을 가진 집단이 집권을 하던 이룩하여야 할 민족사적 당위로서 보편적으로 공유되는 최소한의 공통분모였다. 동시에 2차대전 이후 인류사가 보편적으로 공유하는 가치지향이었다.

그러나 이들 과제의 구현이 민족분단으로 인하여 좌절되었고 이에 대한 결정적 요인은 바로 미국의 개입이었다(강정구, 2000: 56-64). 곧, 외세에 의해 강요된 분단이 없었더라면 조선사회의 내재적 역사동력에 의하여 이들 민족사적 핵심과제는 제대로 구현될 수 있었을 것이다. 또 과거 반세기동안 분단을 고착시킨 결정적 계기는 한국전쟁이었다. 그러므로 분단과 전쟁은 결과적으로 조선사회 고유의 역사행로를 이탈시킨 반역사적 과정이었다. 이 절에서는 민족분단을 여러 단계로 나누어 각기 개별적 특성과 전체적 특성사이의 연관성을 함께 살펴봄으로써, 분단과 전쟁을 통일적으로 또 총체적으로 이해하고자 한다.

1) 38선과 ‘지리적 분단'

해방이 되면서부터 38선을 경계로 남쪽은 미군이 점령하고 북쪽은 소련군이 점령하여 지리적 분단을 강요받았다. 이러한 지리적 분단은 결국 ‘고착적 분단’이란 민족분단으로 귀결되는 시발점이 되고 말았다. 38선의 분할 선은 미국의 일방적 결정에 의해 1945년 8월 10일과 11일 사이에 확정되었다. 이 결정사항은 15일 소련에 통보되었고, 미국은 소련의 동의도 기다리지 않고 일반명령1호를 맥아더에 지시하여 민족분단의 서막이 열리게 되었다. 소련이 16일 아무런 이의도 제기하지 않고 이 일반명령1호를 수용함으로써 지리적 분단은 현실화되었다.

당시 미국은 조선과 함께 베트남도 북위 16도선을 경계로 중국군이 북부베트남을 영국군이 남부베트남을 점령하도록 하여 결과적으로 베트남도 고착적 분단으로 나아가게 하고 또 2차에 걸친 베트남민족해방전쟁을 치르도록 하는 근원적 요인을 제공하였다(강정구, 1995).

이러한 지리적 분단에 대해 미국은 단지 일본군의 항복을 실행하기 위한 군사적 목적이었다고 설명하였다. 그러나 순수한 군사적 목적 때문에 미국이 조선의 지리적 분단을 꾀했다는 미국의 주장은 억지 변명에 불과하다. 그 당시 이미 소련군은 북한에서 일본군과 전쟁을 치르고 있었으므로 일본군 무장해제를 위해서라면 조선에서 600마일 이상 떨어진 오끼나와 주둔 미군이 굳이 투입될 필요가 없었고 간단하게 소련군을 활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당시 미국 대외정책의 핵심인 대소정책의 기조가 대소(對蘇) 적대정책으로 전환함에 따라 조선의 반쪽이라도 우선 점령하여 가능하면 조선반도 전체에서 아니면 최소한 남쪽에서나마 미국의 지배권을 확보하자는 의도에서 지리적 분단을 감행하였던 것이다. 만약 미국의 개입이 없었더라면 지리적 분단은 없었고 우리의 역사는 지금과는 판이하게 달랐을 것이다.

2) 신탁파동과 '이념적 분단'

지리적 분단에 이어 이념적 분단으로 치달은 역사적 계기는 이른바 신탁파동에서 비롯되었다. 이 신탁파동은 당시까지 압도적이었던 좌익세력에 의해 붕괴직전까지 내몰리던 우익세력이 미군의 점령으로 기사회생하여 우선 독립부터 하고 보자는 식의 정의적(情義的) 민족주의를 볼모로 격렬한 좌우 이념적 갈등과 분단을 낳게 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겪었던 이러한 이념적 분단도 만약 미군이나 외세의 개입이 없었더라면 과연 조선사회가 겪었어야 하는 역사적 필연과정인가 하는 의문이 제기된다. 결론적으로 외세의 개입이 없었더라면 해방공간의 조선사회는 사회주의 지향적인 좌파이념의 압도적 우세로 인하여 좌우의 이념적 대립이 갈등으로 나타날 여지가 없었고, 사회주의 지향적인 이데올로기가 지배이데올로기로 정착될 수밖에 없는 역사구조적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미군정은 전체 조선을, 만약 이것이 여의치 않으면 최소한 남조선만이라도, 소련에 대한 방파제와 반공의 보루(堡壘)로 만들기 위하여 사회주의 지향적인 좌익을 폭력으로 압살 및 탄압하고 지리멸렬한 우익을 배양․육성하여 기사회생시켰다.

좌익이념의 압도성을 가져온 해방공간의 역사구조적 조건은 다음 ‘사회적 분단’에서 다루기로 하고, 여기서는 그 당시의 여론조사를 통한 이데올로기 지형을 가늠하고, 외세의 개입이 없었더라면 이러한 좌우의 이념적 분단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을 확인하겠다. 1946년 8월 미군정청 여론국에 의한 8,453명에 대한 여론조사는 당시의 이데올로기 지형을 잘 보여준다. “귀하의 찬성하는 것은 어느 것입니까?”의 설문에, 1> 자본주의 14%(1,189), 2> 사회주의 70%(6,037), 3> 공산주의 7%(574), 4> 모른다 8%(653)의 선호도를 보여주어 좌익이념의 선호도가 무려 77%에 달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확인한다(국사편찬위원회, 1973a: 104-105).

이러한 좌익 지향적 이데올로기 지형이 47년 7월까지 유효함을 우리는 47년 7월 3일 조선신문기자회가 실시한 임시정부 정체에 대한 서울시내 가두 여론조사 결과에서도 재확인한다. 2495명을 서울시내 10곳의 가두에서 설문조사한 결과는 아래와 같다(국사편찬위원회, 1973b: 21-22).

위의 조사에서 인민위원회, 인민공화국, 북한에서 실시한 무상몰수·무상분배의 토지개혁 등에 대한 지지도가 70%가까운 점은 여전히 좌익지향의 이념이 47년 7월까지도 지배적이라는 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CIA자료를 비롯한 많은 미군정 자료들 또한 사회주의적 좌파이념의 압도성을 인정하고 있다.

이러한 시민사회의 좌익 압도적인 이념지형은, 이를 뒷받침한 중앙의 건국준비위원회(건준). 조선인민공화국(인공)과 지방의 건준 지부 및 인민위원회의 조직, 인원, 및 사회적 역량 때문에 만약 미국의 개입이 없었더라면, 신탁파동과 같은 이념적 분단 및 갈등이 없이 바로 조선의 내적 역사동력에 의해 창출될 조선민족자주정권의 이념으로 정착했을 것이다.

3) 북한의 민주개혁과 ‘사회적 분단’

1946년 3월부터 김일성 중심의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주도로 시작된 반제반봉건민주개혁시점부터 남과 북은 ‘사회적 분단’에 접어들었다. 곧 민주개혁의 일환으로 진행된 토지개혁, 중요산업의 국유화, 노동법, 남녀평등법, 건국사상총동원운동 등을 마무리한 1946년 말이 되면 남북사이는 이미 사회경제적으로 분단되었다고 할 수 있다.
남쪽은 일제식민통치로부터 물려받은 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채 여전히 식민지 반봉건사회의 경제체제, 미군정이라는 일제의 조선총독부를 대체한 미국의 군사정부체제, 일제 하에 친일․민족반역행위자에 의해 주로 구성된 한국민주당(한민당)이 해방된 ‘새 사회’에서도 미군정 하에 여당으로 경찰․사법․경찰․관료 등을 거의 독점한 점 등 달라진 모습이란 별로 없었다. 달라진 점은 단지 일본인 대신 미국인이 남조선의 ‘주인’으로 또 친일 조선인이 이 '미국주인'의 앞잡이와 하위동맹자로(junior partner) 등장한 것뿐이었다.

왜 조선인에 의해 새로운 조선사회를 창출하는 의미의 해방이 이루어지지 못하였을까? 왜 해방 이후 일 년여만에 단지 북한만이 민족적 핵심과제였던 반제․반봉건민주개혁을 수행할 수 있었을까? 왜 남조선은 일제 식민지통치의 또 다른 연속으로 이어지는 남북 간의 사회적 분단을 겪었어야 했는가? 만약 미국과 소련의 개입이 없었더라면, 곧 해방공간의 우리 민족사가 우리 민족의 내적 역사동력에 의해 민족 자주적으로 진전되었다면, 해방 1년 반만에 한 나라, 한 겨레, 한 땅덩어리였던 남과 북이 이렇게 서로 이질적인 사회로 나눠지는 사회적 분단을 겪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외세의 개입이 없었더라면, 사회주의 지향적인 반제·반봉건민주개혁을 북한뿐 아니라 남한도 이루어 조선사회 전체가 사회주의로 이행하였을 것이다. 이제 그 역사구조적 요인을 제시해 보겠다.
먼저 구조적(객관적) 요인을 본다면, 첫째, 식민지로부터 전수 받은 경제적 토대가 사회주의 이행에 적합한 토대를 형성하였다는 점이다. 곧, 주요산업자본의 93%(공칭자본금 기준)가 일본인 소유였고, 농지의 약 18%가 일본인 소유이었기에 해방과 동시에 이들 생산수단은 조선인민의 피와 땀으로 형성되었다는 점에서 사적 소유(private ownership)보다는 사회적 소유(social ownership)로 재편되는 것이 당시의 민족사적 요구였다. 이러한 경제적 토대가 사회주의 이행에 유리한 여건을 형성하였다는 분석은 해방이전과 이후 미국의 분석에서 계속 나타나고 있다.

“조선의 경제․정치적 상황은 조선이 전후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를 수용하는 데 좋은 조건이 될 것이다. 조선인들은 보통 소련에 대해 호의적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소련의 후원을 받는 조선 내 사회주의 정권의 정책과 활동은 대중의 지지를 쉽게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이하 FRUS 1945 v.6: 561-563).”
“조선에서 공산주의는 그 출발점이 세계 어느 다른 곳보다 좋은 조건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일본인들은 철도, 동력 및 전기를 포함한 공공시설뿐 아니라 주요 산업과 천연자원까지 소유하였다. 따라서 이 모든 것이 어느 날 갑자기 인민위원회(공산당)의 소유가 된다면, 어떠한 종류의 투쟁이나 노력도 필요 없이 이들을 인민위원회에서 장악하게 될 것이다(FRUS 1946 v.8: 707).”

둘째, 해방공간과 동시에 초래된 계급구조의 불균형, 곧 일본인 통치기구의 와해와 일본인 자본가의 귀환으로 인해 자본가 없는 노동계급형성이라는 계급구조가 형성되었다. 따라서 조선인 자본가 계급이 노동자 계급에 대한 효과적인 통제력을 상실했다. 해방공간에 시행되었던 노동자 자주관리는 이러한 조건에서 생성될 수 있었다.

셋째, 토착지배계급인 조선인 지주와 자본가는 대부분 친일행위로 인해 지배계급으로서의 정당성을 상실하여 계급헤게모니를 장악할 수 없었다.

넷째, 식민지통치기간동안 조선인 지배계급은 경제적 지배계급으로서의 계급위치는 일본인과 공유할 수 있었으나 정치적 지배계급의 역할은 부여받지 못하였으므로 해방과 더불어 폭력수단의 독점이라는 국가기구의 통제력을 상실하였다.
이러한 구조적 요인 때문에 조선인 토착 지배계급이 기존의 사회경제구조를 재생산할 수 있는 계급역량을 갖추지 못하여 객관적으로 변혁기를 맞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구조적 조건이 갖추어졌다고 해서 사회변혁이 자동적으로 초래되는 것은 아니며, 이를 수행할 주체적 조건 또한 충족되어야 한다. 해방공간의 사회변혁에 대한 주체적 조건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일제의 식민지 통치 하에서 활성화되었던 노동․농민운동을 통하여 노동자, 농민의 계급역량이 성숙하고 급진적으로 되었다. 1924년 이후 사회주의자들에 의해 주도된 노동운동과 농민운동, 1930년대의 적색 농민조합 및 노동조합운동을 통해 활성화되었던 이들의 민족해방과 계급해방투쟁은 해방공간에서 자생적 지방 통치기구인 인민위원회의 근간을 이루는 역사적 자산이 되었다.

둘째, 민족해방투쟁에서 사회주의자들이 민족개량주의자나 민족주의자를 압도하여 민족해방운동의 주도집단으로서 정당성을 확보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해방공간에서 사회주의세력이 정치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고, 실제로 건국준비위원회, 인민위원회, 인민공화국에서 이들이 권력을 장악했다. 만약 미 점령군에 의한 반혁명전이 전개되지 않았다면 이들에 의한 사회주의적 정권이 구축되었을 것이다.

셋째, 해방공간의 조선농민은 더 이상 도덕경제를 기반으로 한 지주-소작의 보호자적 연계 속에 얽매어 있는 전통적 농민은 아니었다. 일본제국주의의 전쟁동원이나 수탈정책 때문에 600만에 가까운 조선인들이 국경을 넘어 전통적인 보호 및 온정주의 관계에서 벗어났고 또 대부분은 자본주의의 노자(勞資)간의 계급투쟁이나 민족해방투쟁 등을 직접 체험함으로써 상당히 의식화된, 곧 계급행위자(class-as-an-actor)로 성장했다. 이들이 해방공간에서 전농(전국농민조합총연맹)이나 전평(전국노동조합전국평의회), 건준(건국준비위원회)이나 인민위원회의 훌륭한 인적 자원을 구성했다.

이러한 역사구조적 조건 때문에 외세의 개입이 없는 조건 하에서는 조선사회 전체가 사회주의 지향적인 사회구성체로 나아갔을 것이다. 이는 구체적으로 반제․반봉건민주개혁이라는 과정을 거쳐 사회주의로 이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북한은 반제반봉건민주개혁을 1946년 3월에 실시한 토지개혁으로부터 건국사상총동원운동에 이르기까지 급진적이고 급속하게 추진하였다.

이로써 북한은 외세의 개입이 없이 조선인들 스스로의 역사동력에 의한 것과 거의 동일한 역사행로를 밟음으로써 조선 고유의 민족사적 궤도를 걷게 되었다. 한편 남한은 이러한 민족사적 도정이 미점령군의 반혁명전에 의해 좌절되고 미국에 의해 강요된 역사행로를 걸음으로써 민족 주체적인 역사궤도에서 이탈하고 말았다.

우리는 여기서 소련점령군의 역할에 대한 민족 중심적인 평가를 내려야 한다. 소련군의 점령정책은 미군의 점령정책과는 대조적으로 직접적인 군정통치를 실시하지 않고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통한 간접통치 유형을 띠었다. 따라서 북한의 실질적인 통치나 개혁은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라는 조선인 스스로의 통치조직 주도 하에 이루어졌다.

이러한 조선인 주도에 의한 스스로의 통치를 허용한 점은 소련이 패권주의적인 욕구가 없어 북한의 내정에 간섭할 의지나 역량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단지 조선인 스스로가 내적 역사동력에 의한 역사진행을 하더라도, 이 역사궤도는 소련이 원하는 것과 거의 동일한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었기 때문이다. 곧, 남의 내정에 일일이 간섭하여 조선인의 반발을 살 필요 없이 조선인 스스로에 대부분을 맡긴다 하더라도 소련의 이해를 충분히 관철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미국이 직접적인 군정을 통하여 조선 고유의 역사궤도와 역행하는 남한 역사행로를 강요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소련은 결과적으로(의도야 어떠한 것이었던 간에) 조선인 고유의 역사궤도를 촉진시키는 가속제 또는 촉진변수(reinforcing variable) 역할을 한 것이다.

4) 5.10 선거와 ‘정치적 분단’

‘정치적 분단’은 남쪽이 유엔 감시 하에 5․10단독선거를 치르고 제헌의회를 구성하여 남쪽만의 단독정부인 대한민국을 1948년 8월 15일 수립하고, 이에 대응하여 북쪽이 곧 이어 북쪽지역의 총선거와 남쪽 지역에서 7.26 지하 연판장 선거를 통해 조선인민공화국을 48년 9월 9일 창건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이로써 한 나라, 한 민족에 2개의 주권이 등장하고, 남북정권은 별개의 국가로서 제각기 조선전체의 정통성을 주장하는 남북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또 서로 다른 사회. 정치. 경제. 문화 제도를 창출해 남한은 자본주의가 지배적이고 반봉건주의가 병존하는 자본주의 사회로, 북쪽은 사회주의가 지배적이고 미미한 자본주의가 병존하는 사회주의로 나아가게 되었다.

물론 외세의 개입이 없었더라면 남북은 이러한 상호 적대적인 ‘정치적 분단’이 아니라 단일의 사회주의적 통일국가로 귀결되었을 것이다. 또한 1948년의 상황에서도 외세의 개입이 없이 민족 자주적으로 5․10선거가 남쪽에서 치러졌더라면 남로당을 중심으로 한 모든 좌익, 김규식의 민족자주연맹을 중심으로 한 중도파, 한독당 김구를 중심으로 한 우익세력 등이 선거를 거절하지 않고 참여하였을 것이다. 이 경우 한민당과 이승만의 극우분단세력이 아니라 이들 좌익․중도세력이 권력을 장악하였을 것이었다. 남쪽에서 좌익중도 민족주의 세력이 권력을 장악한 상황에서 북한의 김일성과 김두봉 중심의 좌익정치세력과의 연정이나 합의에 의한 통일정부 수립은 충분히 가능하였다는 역사추상을 할 수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김구선생이 주도한 1948년 4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협상의 남북제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가 제안한대로 조선에서 미소양군이 동시에 철수하고 조선인 스스로의 관리에 의한 남북총선거가 1948년 시점에서라도 실시되었더라면 궁극적으로는 남과 북이 ‘정치적 분단’을 겪지 않고 자주적인 민족통일정부를 수립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외국군철수의 연석회의 요구를 미국이 거절함으로써 이 마지막 통일의 기회도 놓치고 말았다.

5) 한국전쟁과 ‘고착적 분단‘

이제까지 살펴본 대로 ‘지리적, 이념적, 사회적, 정치적 분단’이라는 4단계의 분단은 주로 외세의 개입에 의해 우리 민족에 강요된 결과였다. 이 분단의 과정에서 우리 민족은 수동적 역사희생자(History-Taker)에 머무르지 않고 능동적 역사주체자(History-Maker)로서 건국준비위원회, 인민위원회, 인민공화국 수립 등의 ‘민족 자주적 인민정권’ 수립을 위한 투쟁; 미소공위 속개 대중운동, 46년 대구에서 촉발된 10월 인민항쟁 등 ‘조선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투쟁; 48년 2월부터 전개된 2․7구국투쟁, 48년의 제주 4․3항쟁, 야산대 무장투쟁, 남북협상 등 단선단정반대투쟁을 열렬히 전개하였다.

또한 우리 민족은 남북에 각기 독자적 정권이 들어선 1948년 여름 이후에도 여순 군민항쟁, 유격투쟁, 제주4․3항쟁, 평화통일운동 등을 통해 반외세민족자주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활발한 투쟁을 수행해 왔었다. 이러한 민족의 끈질긴 통일투쟁은 민족의 분단사 속에 역사적 당위성으로 내재해 있었다. 그 결과는 남북정권간에, 남한민중과 남한 지배집단간에, 또 제국주의 지배전략과 민족자주세력 사이의 대립 각 속에 구조적인 필연성을 띠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자주적인 통일항쟁이 민족 자주적인 통일의 성취라는 결과물을 획득하지 못하면서 ‘전쟁이라는 최고형태의 정치투쟁’으로 귀결되었다. 그러므로 한국전쟁은 1950년 6월 25일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돌출적 사건이 아니라 그 이전 단계에서 이루어진 네 가지 분단의 응축된 결과물이다. 곧, 그것은 외세에 의해 강요된 분단의 민족사에 잉태된 민족모순과 계급모순을 자주적으로 극복하고 청산하려는 투쟁형태의 일환이었고 남북시대를 마감하려는 통일투쟁이었다.

그러나 전쟁의 결과는 외세의 개입으로 인해 전쟁이전과 같은 상태로 남북관계가 원상 회복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또한 전쟁과정에서 백만 명 이상의 이산가족이 양산되었고, 세균전이라는 추악한 전쟁이 미국에 의해 저질러졌다는 의혹을 사게되었고, 5-6백만 명에 가까운 인적 손실을 입었으며, 수많은 학살과 만행이 저질러졌고, 무차별 폭격에 의해 북쪽 전역이 거의 초토화되는 엄청난 민족시련을 남과 북에 안겨주었다. 오히려 분단의 벽은 더욱 더 높아져 고착되었고 남북관계는 동토로 얼어붙었으며, 이후 거의 반세기가 지나서야 겨우 남북합의서 등으로 조금씩 풀려지다가 이제 서야 겨우 남북정상회담이 열릴 정도이다. 결과적으로 남한은 신식민지 지배하에 종속적 자본주의 사회체제로 나아갔고, 북한은 주체형 사회주의로 나아갔다.

한국전쟁은 흔히들 알려진 것처럼 1950년 6월 25일 북쪽이나 남쪽이 남침이나 북침을 함으로써 시작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전쟁의 기원은 반제국주의혁명, 민족해방혁명, 사회주의혁명의 복합적 성격을 띤 해방공간의 혁명상황이 미국이라는 외세의 개입에 의해 좌절되기 시작하는 시점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또 실질적인 전쟁의 시작은 6.25이전인 1948년 2월 7일 민주주의민족전선을 중심으로 한 좌익 민족주의자들이 남북분단을 필연적으로 가져오는 5․10단독선거를 무산시키기 위하여 미군정과 분단주의자들에 무력투쟁을 공식적으로 선포하면서부터이다.

이로부터 제주4.3항쟁, 여순항쟁 등 인민항쟁, 야산대 투쟁 및 지리산과 오대산 등의 유격전쟁,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진행되었던 38선에서의 남북 간 무력충돌로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무려 10만 명 이상의 인적 손실을 보게 되었다(Merrill, 1983: 150). 이러한 사실은 이미 6.25이전에 남한은 내전 상태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전쟁이라는 큰 전쟁을 전쟁과정의 측면에서 이렇게 단계별 작은 전쟁들로 나눔으로써 큰 전쟁에 대한 깊은 이해와 민족 중심적인 설명을 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한국전쟁을 <표1>과 같이 질적인 전환을 기한 시점을 기준 하여 연대기적으로 ‘작은전쟁’(small war), ‘제한․확대전쟁’(limited & expanded war), ‘전면전쟁’(total war), ‘진영전쟁’(semi-global war), ‘교착전쟁’(stalemated war)의 소 단계로 나눌 수 있다.

<표1> 한국전쟁 5단계설(생략)

이를 간략히 약술하면, 1948년 2.7구국투쟁의 선언으로 시작된 5․10단독선거와 분단 저지를 위한 투쟁으로 발화된 ‘작은전쟁’이 발생하였다. 1950년 6월 25일 북한 사회주의 정권이 서울을 긴급히 점령하여 통일정부를 수립하기 위하여 국지전의 성격을 서울 중심으로 확대한 제한전쟁이 일어났다. 통일을 꾀한 ‘제한․확대전쟁’인 남의 내전에 외세인 미국이 즉각적으로 지상군을 투입하여 이를 전면적으로 확대함으로써 국제전의 성격을 띠게 되어 1950년 7월 1일부터 ‘전면전’으로 격화되었다. 미 지상군의 인천상륙작전 이후 북의 사회주의 정권이 붕괴되려는 시점에서 항미원조보가위국(抗美援朝保家爲國)이라는 명분으로 북의 사회주의 정권을 구출하고 자본주의 패권국인 미국의 북진을 저지시키기 위한 사회주의 제2인자인 중국의 개입으로 전면전은 자본주의체제의 패권국가와 사회주의체제의 준패권국가간의 ‘진영전쟁’으로서 국제전의 양상을 띠었다. 그리고 어떤 진영도 군사적으로 승리할 수 없다는 인식을 공유하면서 정치적 협상에 의하여 전쟁을 종결시키려는 ‘교착전쟁’으로 전쟁성격이 계열(時系列)적으로 바꿔졌다. 그러나 여전히 살육전은 이후 무려 2년 동안 지속되었다. 이 각기 작은 한국전쟁의 과정에서 미국의 개입이 없었더라면 북한 주도로 해방공간의 내재적 역사경로인 반제국주의혁명, 민족해방혁명, 사회주의혁명으로 이행하는 것은 필연적이었다.

이제까지 우리는 일제식민통치로부터 벗어난 해방공간의 민족사적 핵심과제의 내용과, 이들 민족사적 핵심과제의 구현을 가로막은 민족분단의 과정을 고찰하였다. 이어서 민족분단의 결정판이었고, 이런 점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민족문제의 윈죄적 속성이고 태생적 요인이라고 볼 수 있는 한국전쟁의 전개과정을 민족 중심적인 견지에서 간략히 고찰하였다.

해방공간에 만약 외세가 개입하지 않았더라면 북한 뿐 아니라 남한까지를 포함하는 전 조선이 사회주의가 지배하는 사회구성체로 이행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민족내부의 요인에 의한 민족분단도 있을 수 없었다. 당시 민족사적 핵심과제는 식민지반봉건사회의 기존 구조를 바꾸는 사회변혁을 통한 구조바꿈, 친일파·민족반역자 숙청이란 사람바꿈을 통한 일제잔재의 청산, 외세에 의해 두 동강이 난 지리적 분단을 해소할 수 있는 민족통일정부 수립, 제국주의 지배를 물리치고 민족자주성을 고양시키는 반 사대주의와 민족자주 구현, 당시 세계사적 보편가치였던 민주주의의 구현, 토지개혁 등을 통한 민중권익 확립 등이었다.

이 기준에서 본다면 분단국가의 수립은 분명히 반민족사적이고, 반역사적이었다. 또 이후의 역사행로는, 특히 당시의 민족사적 핵심과제와는 대부분 반대의 길로 치달은 남한의 역사행로는 더욱더 반(反) 민족사적이었다고 결론지을 수밖에 없다. 이렇게 형성되고 고착화된 미국에 의한 남한의 역사행로는 오늘날까지 여전히 미국의 절대적 영향 하에 놓여 민족자주성을 상실한 채 표류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이 과정에서 1960년 4월혁명, 1980년 5․18항쟁, 1987년 6월항쟁 등 민족자주와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이 지속되어 남한의 역사는 미국의 엄청난 규정력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와 민족자주 및 민족통일의 여정에서 괄목할 진전을 이루어 내었다.

이러한 반 민족사적 행로의 요인은 주로 미국의 제국주의적 개입에 있다. 미국은 1945년 4월을 기점으로 이전의 지도적 패권주의(leadership-oriented world hegemony) 패권주의가 아닌 철저한 군사력과 전쟁에 의존한 폭력 중심적 지배적 (domination-oriented world hegemony) 패권주의로 근본적인 전환을 하게 된다. 냉전이 공식화되는 1947년 초의 트루만 선언(Truman Doctrine) 이전에 이미 미국의 외교전략의 근본적 전환은 미국과 소련 양대 패권국가가 동시에 군사점령 하여 대치하고 있던 한반도의 고유 역사행로를 허용할 수 없는 구조적 제약조건을 만들었다. 바로 이러한 미국의 세계전략의 규정력 하에서 미국은 한반도 전략을 주조하였고 그로 인해 실제 민족내부의 역량에 의해 변화될 수 있는 공간이 엄청나게 제약받게 되었다(강정구, 1989).

이제 분단의 고착화라는 태생적 한계에 직면한 우리 민족사가 미국에 대한 본격적인 문제제기를 제기했던 5․18항쟁과 그 귀결인 6월 항쟁, 그리고 IMF 경제신탁통치라는 역사의 결정적 굽이를 살펴봄으로써 80년 대 이후 한미관계사를 평가해 보겠다. 이를 통하여 지금도 여전히 미국이 구조적 결정요인의 역을 자행하고 있음을 확인하겠다. 그러나 이런 가운데 우리의 민족적 역량에 따라 그 미국의 구조적 결정요인 또한 제약될 수밖에 없음을 동시에 고찰하고자 한다.

3. 구조적 결정요인으로서의 미국

5.18에서 IMF경제신탁통치까지

미국이라는 외세는 우리 현대사의 결정적인 굽이굽이마다 핵심적인 결정권자와 지배자로 군림해 왔다. 이러한 미국의 한반도 개입은 1945년 8월 해방이 되자말자 조선사람 어느 누구와도 상의 한번 없이 자기들 멋대로 조선을 38도선에서 양쪽으로 두 동강을 내는 지리적 분단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또 다시 북한핵문제를 일으켜 한반도 전체를 전쟁의 공포 속으로 밀어 넣는 이 시점까지 줄곧 남의 나라에서 마치 그들이 주인인 것처럼 행세해 왔다. 이 땅에 놓여 있는 미국이라는 외세의 발자취를 미국사람의 눈과 미국화 되어버린 친미사대예속주의라는 노예의 눈이 아니라 민족중심적인 눈, 곧 우리 자신들의 눈으로 보아야 한다.

앞에서 본바와 같이 미국 때문에 우리 현대사의 첫 단추가 잘 못 꿰어지자 그 후과(後果)는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다. 비교적 최근만 보더라도 1980년의 5․18항쟁에서 전두환 정치군부 지원, 1987년 6월항쟁에서는 이민우 구상에서부터 6․29선언에 이르는 예방(수동)혁명의 추진, 1997년의 IMF경제신탁통치, 지금 현재 진행중인 2003년 전쟁위기 등에까지 이른다. 이 가운데 전쟁위기를 제외한 대표적인 몇 가지 역사의 소용돌이만 골라서 구조적 결정요인으로서의 미국이라는 실체에 접근해보겠다.

1) 5.18항쟁과 미국

1979년 10월 26일 영구독재체제를 구축한 박정희가 그의 휘하에 있던 중앙정보부장에 의해 피살됨으로써 남한은 근 20년만에 ‘서울의 봄’을 맞아 민주체제로 나아가는 듯했다. 이 시점에서 우리의 민족사적 핵심과제는 ‘서울의 봄’이라는 상징어가 말하듯이 군부독재를 청산하고 민주주의로 이행하는 것이었다. 5․18항쟁은 바로 이러한 민족사적 과제를 구현하기 위한 민중 중심의 민주항쟁이었다. 그러나 이 민주항쟁은 광주학살이라는 엄청난 비극으로 귀결되었고, 이 피 흘림의 과정을 딛고 군부독재 정권이 재등장하여 배반의 역사를 강제하였다.

전두환을 비롯한 정치군부가 12․12쿠데타, 5․17비상계엄과 내란, 5․18광주학살로 민주화이행을 무산시키고 박정희의 유신체제에 버금가는 신군부독재체제를 출범시켰지만, 미국은 이들 유신잔당의 광주학살에 대하여는 주로 명시적인 지원을, 정권 찬탈기도에 대하여는 묵시적인 지원과 명시적인 지원을 병행하였고, 군부정권이 공식적으로 출범한 1981년 2월에는 곧 바로 전두환을 미국으로 초대하여 축복을 내리는 반역사적인 행위를 저질렀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이에 대하여 최소한의 도덕적인 책임마저도 부인하였다. 80년대 내내 비등하던 미국책임론과 반미주의에 대한 미국의 공식적인 반응은 89년 미국무성의 백서(White Paper), 87년 초 당시 주한미국대사이었던 글라이스턴의 기자회견, 85년 6월 워싱톤 회견 등에서 나타났는데 그것은 미국은 어떠한 법적 및 외교적 책임은 물론이거니와 도덕적 책임도 없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미국의 무책임론은 사실적인 차원에서 대부분 거짓임이 이미 96년 <저널 오브 코머스>의 팀 셔록(Tim Shorrock)기자가 정보공개법에 의해 입수한 비밀문서 전문을 통하여 밝혀졌다(Shorrock, 1996).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공식적으로 이에 대한 사죄나 도덕적 책임에 대한 최소한의 유감 표명조차 하지 않았다.

이 글에서는 위의 미국의 결백주장에 대한 구체적인 반론을 제기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이미 셔록이나 이삼성(이삼성, 1993, 1997) 등에 의해 충분히 미국의 공식적 주장이 반증되었기 때문이다. 이 글은 단지 이 같은 미국의 주장과 평소 자유와 평화 및 민주주의의 화신이라는 자기 신성화와 모순되는 점을 몇 가지 제시하여 미국의 실체를 드러내겠다.

첫째, 셔록의 분석에 의하면, 미국은 10.26이후 그는 정작 군부에 대하여는 비난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서 “한줌도 안 되는 극단주의 반체제 기독교도들 때문에 한국사회가 양분될 것을 우려하여” 글라이스틴 대사에게 “미국의 지원을 영원히 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기독교도들에 통보하고 이들이 정치집회를 금지하는 계엄령 포고를 위반하지 않도록 경고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주한 미국대사는 또 “우리는 학생들에게 자제를 촉구하면서 만약 자제하지 않을 경우 결과는 정말 추악하고 유혈적인 사태가 전개될 것이라고 강조할”것이라고 전문은 밝히고 있다(Shorrock, 1996).

둘째, 10.26직후에 한국 상황을 다루기 위해 행정부 내 고위 관리들로 구성한 비상대책반(암호명 체로키․Cherokee를 정하고 한국관련 전보나 논의사항을 카터 대통령을 비롯한 최고위 관리들만 볼 수 있게 하는 NoDis로 통제하였다)을 구성한데서도 바로 나타난다. 또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세력이 일으킨 12.12를 실질적인 쿠데타로 규정하면서 신 군부를 격렬하게 비난했던 글라이스틴 주한미국대사는 12월 13일자 전문에서는 “나는 우리가 신 군부 지도부를 너무 매도하여 그들과 우리의 관계가 심각하게 소원해지는 모험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경고와 아울러 우리의 공동 이익에 대한 재확인도 곁들일 것이며, 그래서 상호 조정을 통해 우리의 협력관계를 계속할 수 있기를 바란다는 의사를 밝힐 것이다”라고 했다. 이후 미국은 12.12 이전으로 사태를 환원시키려 하지 않는다”는 언질을(1월22일 최성택, 김윤호 장군 등 신 군부 인사와 만난 자리에서 나눈 대화) 계속 군부에 전달하였다.

이러한 미국의 행위는 신군부가 시간의 흐름과 함께 권력을 굳히고, 현실세력으로 등장하게 될 때 이를 인정해 주는 출발점이 되며, 나중에 시위와 시민봉기를 무력으로 제압하는 신군부의 특수계획을 마침내 수용하고 지원하는 쪽으로 발전하게 된다(<한겨레21> 1996년 4월 4일). 평소에는 온갖 조그만 일에까지 시시콜콜 내정개입을 자행하던 미국이 12.12쿠데타에 대하여 문제점을 강력히 제기하지 않고 애매한 태도를 보이는 것 자체는 바로 미국이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를 묵시적으로 지원한다는 뜻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셋째, 미국은 12.12 이후 단순히 신군부 중심의 현상유지정책을 사후 승인한 것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 신군부 중심의 집권에 장애가 되는 요소, 곧 야당, 재야, ‘급진적’인 교수, 지식인, 시국관련 복학생 등이 안정화를 저해시켜 안보를 해친다는 인식 하에 부정적으로 보고 압박하였다. 80년 1월 19일자 미대사의 전문은 “12.12군사반란이후 우리는 한국의 정치적 전환기에 안정적인 바탕을 마련하도록 도움을 주는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적극적인 활동가가 되어 버렸다”라고 활발한 개입을 실토하였다.

결과적으로 신 군부의 집권에 유리한 환경조성을 미국이 발벗고 나선 셈이다. 광주의 피를 딛고 명실상부한 집권자로 부상한 전두환이 5월 29일 주요신문 편집국장을 만나 “미국은 12.12, 중앙정보부장서리 취임, 5.17조치 등은 모두 사전에 통보 받았다”라고 말 한 것은 결코 자기 권력 굳히기를 위한 거짓말 일색은 아니었다고 보아야 한다. 미국은 모든 상황을 면밀히 파악하고 수시로 신 군부와 협의하였음이 이미 드러났다. 이는 미국이 당시 한국인의 최대 관심사이고 민족사적으로 당면 핵심과제가 민주화였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파악하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냉전구조와 이를 위협하는 국면적 상황전개인 이란사태의 유령에 매몰되어 안보최우선주의라는 절대적 원칙을 불문가지(不問可知)로 받아들이고 있음을 입증해 준다.

재야의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최초 집단적으로 나타난 이른바 YWCA 위장 결혼사건을 주도한 윤보선 전 대통령과 함석헌을 이 두 나이 많은 인사들의 어리석은 행위,고집불통의 야당과 반체제 그룹에 대해 인내심과 정부와의 일정한 협력을 갖도록 압력을 가하고 있다ꡓ고 밝히고 있다. 80년 1월15일 방한한 홀브룩 국무부 동아태차관보는 김영삼 당시 신민당 총재와 만난 자리에서 “정치개혁의 정확한 일정이 핵심문제가 되어 버린다면 그것은 비극적이다. 지금 자제력을 발휘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고 말해 한국의 역사지향과는 전혀 상반되는 반(反)역사적인 인식을 노골화하였다.

1월 30일 김영삼 신민당 총재, 양일동 통일당 총재, 김대중씨와 윤보선 전 대통령 등 4명의 야권 지도자는 공동기자회견에서 △최규하 대통령에 대해 분명한 정치 일정을 요구하고 △계엄 즉각 해제 △모든 정치범의 즉각 석방 △해직 인사들의 전원 복직 등을 요구했다. 이에 대해 글라이스틴 대사는 2월3일자 전문에서 지난 주 있었던 몇 가지 일들은 한국에서의 정치적 변화과정에 얼마나 많은 난제들이 있는지를 다시 한번 일깨워준다. 일부 야당 지도자들은 정치적 자유화를 위해 절실하게 필요한 온건 입장을 내팽개쳐버리려 하는 것 같다”라고 우려하고 있었다.

이러한 미국의 그릇된 인식과 행위는 18년 군부독재에 시달려 온 한국인들이 이제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기 위하여 요구되는 최소한의 행위조차 안보를 해치는 혼란이나 무정부성 등으로 간주하는 성향을 전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이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제3세계의 최소한의 요구조차 전적으로 묵살해버리는 미국이 얼마나 오만한 제국주의와 패권주의의 실체인가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다.

넷째, 5월 22일 백악관회의에서 광주진압을 위하여 20사단을 추가 투입하는 것을 승인하고는 만약 신 군부가 사태수습을 원만히 못 할 경우에는 미군을 직접 투입하여 광주진압을 계획하기까지 하였다. 이러한 안보노이로제에 걸린 미국에게 새로운 민주사회를 개척하기 위한 한국인의 행위는 결코 발전을 위한 진통행위가 아니라 그야말로 혼란과 무정부성이었다.
다섯째, 엄청난 피를 흘린 뒤 전두환이 명실상부한 집권자로서의 위치를 굳힌 시점에서도 미국은 5월 22일의 결정대로 수출입은행장의 한국방문을 통하여 6억 달러의 차관을 제공하였고, 한달 후에는 미대사가 전두환을 만나 국무장관의 대한안보공약을 재확인해 주어 전두환 굳히기를 마무리짓고, 81년 2월에는 전두환을 초청하여 축복을 내렸다.

이제까지 살펴본 대로 미국은 대소봉쇄, 제3세계에 대한 헤게모니적 지배, 자본주의 경쟁국가에 대한 견제를 중심으로 한 냉전질서의 노예가 되어 안보최우선주의라는 철칙아래 최소한의 도덕성이나 자기들이 신봉한다는 민주주의 이념을 헌신짝처럼 내 팽개쳤음을 확인하였다. 이는 제3세계 인민들의 당대적 요구나 민족적 과제, 인류보편사적 가치나 이념조차 미국의 과잉냉전화로 설자리가 없음을 여실히 보여준 셈이다. 당대사적 과제는 오로지 제3세계 민중의 투쟁역량에 의하여 구현이 가능하고, 이 상태에서 미국의 냉전전략은 경직성이 수그러질 수 있음을 우리는 6월항쟁에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박정희 유신정권이 부마항쟁의 전국화의 결과로 붕괴되었더라면 광주의 피흘림은 예방될 수 있었을 것이다. 10.26은 결코 환희의 시작이나 서울의 봄을 잉태한 것이 아니었고, 오히려 광주의 비극을 잉태한 것이었다.

2) 6월항쟁과 미국

5.18 광주의 비극 속에서 잉태되고 발전될 수밖에 없었던 6월항쟁은 1982년 9월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과 1983년 11월 레이건 방한 반대투쟁을 전개하면서 반독재민주투쟁과 반미자주화투쟁이 유기적으로 결합하여 민주와 민족자주가 통일적 관계를 이루면서 전진되기 시작하였다. 이어 1985년에는 전국학생총연합(전학련)과 ‘민족통일․민주쟁취․민중해방을 위한 투쟁위원회’(삼민투)가 결성되어 미문화원 점거 농성을 벌리면서 군부독재와 미국에 대한 투쟁의 강도를 높였다. 또 이한열 열사의 장례식에서도 ‘독재지원 내정간섭 미국을 몰아내자’라는 구호가 연속되었고, 영구차를 앞세우고 미문화원에 가서 시위를 전개하자는 계획을 짜기도 하였다(정지환 외, 1997: 132). 이 반미노선의 격화와 더불어 투쟁노선에서 제헌의회 소집 등 극좌에서부터 호헌조치에 이르는 극우반동에 이르기까지 백가쟁명(百家爭鳴)의 마당이 형성되어 한국전쟁이후 가장 넒은 이념적 지평이 창출되었다. 여기서 급진이념과 반미투쟁이 결합하여 한국사회변혁의 기본 목표인 <민족자주위업의 완수>, <진보적 민주주의 실현>, <평화적 조국통일>을 위한 투쟁이 총체적으로 전개되는 국면이 조성되었다. 이러한 반미투쟁의 연속선상에서 진행된 6월항쟁은 87년의 6.29선언으로 질적 전환을 하게 되어 연인원 4-5백만의 6월항쟁 열기가 사그라지면서 쇠잔 국면으로 나아가고, 그 대신 7-8-9월 노동자대투쟁으로 전선이 바뀌게 되었다.

6.29선언은 대통령 직선제 개헌, 김대중을 비롯한 시국관련 사범의 사면 복권, 기본적 인권의 신장, 언론자유의 창달, 지방자치와 자율의 확대, 사회정화 조치 등의 8개 항목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었다. 이는 일종의 분할지배전략이고 그람시(Antonio Gramsci)가 이야기하는 수동(예방)혁명이었다. 곧, 제한된 민주주의의 허용을 통한 군부의 지속적 지배를 꾀하고, 저항세력의 내부분열을 곧, 기층민중과 중간층을 분리시키고, 제도권인 야당과 재야인 민통련사이의 분리를 유인하는 전략이었다.

이러한 분할지배전략은 그대로 적중하여 중간계급은 7-9월의 노동자대투쟁에서 이탈하고 탈(脫) 정치화하였고(de-politicized), 야당은 성급한 타협으로 정치사회에 복귀하였다. 재야 사회운동세력은 연대세력을 잃어 약화되었고, 드디어는 대선 후보 단일화마저 실패하면서 민주정부수립은 좌절되고 새로운 한국사회의 출발은 미완으로 끝나게 되었다.

이러한 분리정책과 수동혁명전략은 미국이 주된 연출자였고 전두환이나 노태우는 연기자에 불과했다. <월간조선>은 6․29선언을 마치 ‘위대한 결단’이고 ‘대전환’의 용단인 것처럼 성격 규정하면서 마치 전두환이 연출자였고 노태우가 연기자인 것처럼 묘사했다. 더 나아가 전두환의 과단성과 남성성 등을 부각시켜 전두환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듯한 반동적인 모습을 보였다(<월간조선> 1989년 7월호). 전두환은 이민우 구상의 내각제가 불가능해지자 4․13 호헌조치를 취하였고, 6월 10일에는 노태우를 정식으로 후계자로 선출하였으며, 6월 18일 부산대회에서 30여만의 시민이 참여하여 통제불능 상황이 전개되자 6월 19일 오후쯤 계엄령을 선포하려고 하였다. 12․12쿠데타이후 총과 칼, 그리고 광주 민주열사의 피를 딛고 권력을 찬탈하였던 전두환과 노태우의 과거를 반면교사로 삼아 유추한다면 군부를 동원하여 정면으로 대결한다는 전략은 뻔한 결론이었다.

그러나 6월항쟁은 더 이상 5․18항쟁과 같이 고립적이지도 않았고, 미국도 더 이상 5.18당시와 같이 이란의 유령에 홀린 막무가내 식의 미국은 아니었다.
<월간조선>도 서술했듯이 19일 오후 2시에 전두환을 방문했던 릴리 미국대사는 레이건 대통령의 친서를 전달하고 계엄령 반대를 분명히 했다. 강준식이 적절히 지적하였듯이, 이 2시간동안 미국의 6․29에 대한 연출이 전달되고 전두환은 어쩔 수 없이 여기에 맞추어 연기를 할 수밖에 없었다(강준식, 1990).

그렇다면, 왜 미국은 5․18항쟁과는 극명하게 대조되는 전략을 구사하였는가? 홀브루크가 이야기하는, “미국이 추구해왔던 모든 정치적 가치” 운운은 가소로운 소리에 불과하다. 근원적 요인은 민족자주화와 민주화를 추구하는 우리 민주세력의 급진성과 엄청난 힘의 과시였다. 여기에다 미국의 제3세계정책기조가 기존의 커크패트릭 독트린에서 저강도전략을 통한 신개입주의를 표방하는 레이건 독트린으로 전환하였기 때문이다. 집권2기를 맞은 레이건 정부는 집권1기 동안 어떠한 우익도 전체주의적인 좌익정권보다 낫다고 보고, 반공노선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직접적인 군사적 개입 일변도에 의존하면서 우익군부독재 체제를 지원하여야 한다는 기존의 커크패트릭 독트린을 완화하였다.

여기에다 80년대 진행된 스페인, 그리스, 포르투갈 등의 민주화가 현실적 추세임을 인정하여 가능하면 선거라는 절차에 의하여 친미정권을 수립하도록 유도한다는 저강도정책의 정치부문이 한국에 적용되었다. 흔히들 레이건 독트린의 기조라고 일컬어지는 86년 3월 14일 미 의회에 보낸 레이건의 외교메시지인 “자유, 지역안보, 세계평화”는 “미국민은 인권을 신봉하며 좌익이건 우익이건 그 어느 형태의 압제도 반대한다. 우리는 민주변혁을 고무하기 위해 우리의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러나 그 나라의 전통과 정치적 현실, 그리고 그 나라가 국내외적인 전체주의 세력으로부터 당면한 안보위협을 감안하여 조심스럽게 취해질 것이다”라고 유연한 방식에 의한 신개입주의를 표방하였다(임제경 외, 1987: 53).

구체적으로 레이건 독트린의 한국 적용과정을 보면, 그것은 시민사회 민주세력의 역량, 야당을 중심으로 한 정치사회의 대응과 역량,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국가의 역관계에 따라 유연성을 보이고 있다. 83년부터 반독재민주화투쟁이 활발히 전개되는 과정에서 치러진 85년의 2․12총선에서 야당인 신민당이 승리하고 이를 계기로 개헌정국이 본격적으로 펼쳐지게 되었다. 이에 대하여 전두환은 86년 1월 16일 자신의 임기 내 개헌불가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미국은 계속적으로 전두환의 ‘평화적 정권교체’ 의지를 높게 평가하여 군부후계자에 대한 평화적 정권교체를 종용하고 혹시 이를 이행하지 않을 것을 우려하여 86년 가을에는 개스턴 시거 미국무부차관보가 “한국군은 병영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라는 경고를 발하였던 것으로 알려졌다(강준식, 1990: 154, 159). CIA정치공작의 명수였던 제임스 릴리가 한국대사로 임명된 것이나, 그가 86년 9월 16일 열린 상원인사청문회에서 미국의 대한정책 우선 순위를 안보, 민주화, 무역자유화로 꼽았던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86년 상반기부터 신민당이 직선제를 포기하고, 반미재야세력과 단절하고, 군부세력을 포함하는 보수대연합을 통한 여야합의의 내각제 개헌을 추진하는 이민우 구상은 바로 미국의 구상이었다는 게 일반적 인식이다. 이 구상은 김대중, 김영삼 양 김의 배제를 의미하는 것으로 적과의 동침이라면서 양 김이 단호히 반대하자 결국 무산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대해 미대사관은 “이민우 구상이 어디가 나쁜가? 우리는 명안이라고 생각했는데” 라면서 각 방면에 문의하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87년 2.7 박종철 추모대회의 전날인 6일 시거 국무부차관보는 여야간의 합의개헌을 촉구하였으나 “정치적 이행이 안정을 해쳐서는 안 된다”라고 하여 민중투쟁을 위축시키려 하였다.

미국이 원하던 내각제 합의개헌이 무산되자 “미국은 보다 개방적인 정치체제를 원하나 그것이 안정을 해쳐서는 안 된다”며, 군부정권의 안정적 개편을 모색하였다. 곧, 현행 헌법에 의한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루는 군부의 권력세습이 대안일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하였다. 3월 중국방문 후 잠시 한국에 들렸던 슐츠 미국무장관도 한국은 향후 ’평화적 정권교체'를 두, 세 번 경험하고 나서 자유로운 선거로 나아가는 것이 좋다는 의견을 피력했다(강준식, 1990: 164). 전두환으로서는 이를 분명히 군부세습 정권을 수용한다는 신호로 받아들였던 것 같다. 곧 바로 호헌조치가 선포되었다. 예견한대로 4․13호헌조치 이후인 5월 6일 시거는 하원청문회에서 “4․13조치를 인정할 수밖에 없고 부분적인 민주화를 위해 여야타협이 필요하다”고 강조하였으며, 6월 1일에는 미국무부 대변인인 오클리는 “미국은 현행헌법에 따른 권력세습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싶지 않다”면서 호헌조치를 지지하였다. 6월10일 박종철군 고문살인 은폐조작 규탄 및 민주헌법쟁취 범국민대회에 24만의 민중이 모이자, 그는 “한국의 폭력행위를 혐오한다... 야당의 타협이 필요하다”라고 하면서 야당과 민주세력을 싸잡아 비난하면서도, 정작 같은 날 있었던 잠실체육관에서 노태우를 후계자로 선임하는 민정당 전당대회에 릴리 대사를 출석시켰다. 이는 명백히 미국이 내각제에서 단순한 평화적 정권교체를 통한 군부세습제를 전략적 선택으로 삼았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야당과 재야민주세력이 연대하여 6․10 범 국민대회가 6월항쟁으로 발전하자 위협을 느낀 미국은 기존의 현행헌법에 의한 군부권력세습보다는 직선제에 의한 실질적인 군부권력세습으로 전략을 수정한 것으로 보인다. 6.18최루탄 추방 결의대회를 계기로 계엄령이 논의되자 앞에서도 밝힌 대로 레이건 친서를 전달하여 계엄령을 취소시키고, “군대의 사용을 검토하기 전에 정치적 제스처를 한번 보여주는 것이 좋을 것이다”라고 연출을 하였고, 잇따라 백악관이 개헌논의를 촉구하였고, 슐츠 장관이 계엄령을 반대하는 성명을 내면서도 “한국정부가 비상조치를 선포해도 미국은 관여하지 않는다”고 언급하여 만약의 경우를 대비하는 면밀함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민주화세력이 압도하는 상황에서 이러한 국무장관의 애매한 발언은 반미를 촉발할 수 있다고 보고 바로 이튿날 국무성차관보가 국무장관의 발언을 해명하며 “군부 개입하면 한국국익 크게 해친다”라고 미국의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이어 23일에는 시거가 내한하여 군부개입 반대입장을 분명히 하면서 군부에 재차 경고하여 직선제개헌안 굳히기를 시도하였다.

6.29 바로 전날인 28일에는 한국민주화 결의안을 미국상원이 통과시켰고, 이어 국무장관이 “한국정부가 ...우리 제안을 받아들여 몇 가지 중요한 사안에 관한 입장이 변경될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6․29선언이 발표되자 솔라즈 의원은 “적극 환영한다... 이번의 찬사는...끝으로 미행정부와 의회간의 협조에 돌아가야 한다... 이번 일의 주역인 시거에게 노벨 평화상을 주여야 한다”라고 미국의 연출을 노골적으로 시인하였다. 이후 미국은 노태우를 초청하여 그를 미국의 선택아로 부상시켰고, 선거이후 부정선거 시비가 일 것을 예견하여 미리 시비를 차단하려는 듯 12월 10일 시거차관보는 선거를 일주일 앞둔 시점에서 “결과 무시하면 비난받을 것이고 누가 되든 국민의 대통령이다”라면서 마치 최종 재판관과 식민지총독 행세를 자행하였다. 예견한 대로 노태우가 당선되자 백악관은 “한국선거는 비교적 공정했다. 뚜렷한 부정선거는 없었다. 노태우 당선을 적극 환영한다”라는 논평을 내어 각본대로 나타난 군부정권의 세습을 마무리지었다.

우리는 이러한 분석을 통하여 6.29는 미국이 연출을 담당하고 전두환․노태우 등이 연기한 속임수의 수동혁명이었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었다. 그러나 6․29가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형식적 민주화의 이행이라는 역사적 의의를 가지고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또 이 역사적 성과물은 미국이나 전두환 등의 자비로운 시혜물이 아니었다. 그들이 내각제나 현행헌법에 의한 단순한 평화적 정권교체라는 형식을 통하여 군부권력 세습제에서 직선제를 통한 군부권력 세습이라는 전략적 선택으로 전환을 하지 않을 수 없도록 근원적인 강제력을 행사한 것은 역시 우리 민주세력의 폭발적인 항쟁력 때문이었다. 우리는 5.18항쟁에서의 명시적이고 묵시적인 군부지원과 6월항쟁에서의 제한적 군부지원과 대 군부 강제력행사라는 미국의 행위유형의 극명한 차별성은, 바로 우리 민주세력의 강도에 대부분 기인된 것이라는 사실을, 앞으로 민족자주위업의 완수와 평화적 조국통일의 민족사적 과제를 구현하는 데 훌륭한 역사적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3) IMF경제신탁통치와 미국

탈냉전이 시작되는 1990년, 미국이 21세기 세계지배전략의 하나로 구상하였다는 ‘워싱턴합의(Washington Consensus)'는 “우연의 일치라고 하기에는 신기할 정도로” 한국의 1997년 말의 상황에서 재연되고, 김대중정권의 과잉세계화정책에 그대로 반영되어 <시사저녈>의 이교관 기자를 “전율을 느끼게” 만들었다. 이 ‘합의’는 한국과 같은 제3세계 국가들이 신자유주의적 경제구조 조정을 위해 필요한 조치들로서 “정부 예산의 삭감, 자본시장의 자유화, 외환시장 개방, 관세 인하, 국가 기간 산업의 민영화, 외국 자본에 의한 국내 우량 기업들의 인수․합병 허용, 정부 규제 축소, 그리고 재산권 보호” 등 8개항을 제시하였다.

이러한 구조조정의 강요는 으레 반발을 살 것이기 때문에 이 조치를 관철시키기 위한 전술까지 고안해 두었다. 첫째, 선거를 통해 정권 교체를 추진한다. 둘째, 현 정권의 핵심 세력이 연루된 부패 고리를 폭로하여 현 정권을 무력화시킨다. 셋째, 재벌이나 노조의 저항에 부딪혀
수정    삭제          목록
CLOS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