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세계여성의 날 유래 >
1) 3·8세계여성대회의 시대적 상황
산업 혁명은 여성을 전에 없던 착취 속으로 몰아 넣었다. 산업혁명은 여성들을 그들의 전통적인 일인 가사노동과 아이를 키우는 일에서 풀어주지 않은 채 비인간적인 작업장에 밀어 넣었다. 한편 이 상황은 여성들이 집안을 나와 다른 여성들을 만나면서 억압에 대한 공동의 이해와 공통점을 찾게 되는 계기가 되었고 그들에게 단결된 힘의 필요성을 일깨우게 한 현장이기도 했다.
19세기 중반에 방직공장 노동자 중 23%만이 남자였고 나머지는 여성노동자와 연소 노동자였다. 이들은 남성노동자들의 임금에 반 정도의 수준을 받고 일해야만 했다. 그리고 미국 노동자들의 75%가 이주 노동자였는데 이들은 극심한 인종차별 대우에 시달리면서 미국인보다 작은 임금을 받고 비참한 곳에서 살아야만 했다. 그들 중 흑인들에 대한 차별과 착취는 누구보다도 더 심했었다. 흑인들은 오직 농장과 가정부로만 고용되었고 뒤늦게 공장에서 이들의 고용을 허용했는데 그들은 위험하고 가장 힘든 일에 고용되었다. 그들이 받는 임금은 백인 노동자의 1/3에 불과했었다.
그러나 흑인 여성들은 이러한 현실의 아픔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지만은 않았다. 그들은 각 지역에 그들의 단체를 조직하였고 이후에는 전국 흑인여성회(National Colored Women)를 구성하여 남미주에서 백인 인종차별주의자에게 구타당한 흑인문제를 항의하기 시작하였다. 이 당시에는 인종차별주의자들을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면 죽임을 당하는 상황이었다. 흑인들이 시작한 이 운동은 방직공장에서 일하는 백인여성 노동자들이 노예 사회를 반대하는 모임을 결성하여 그들과 함께 반대운동을 시도하였고 탄원서를 제출하고 노예 폐지 운동을 돕기 위한 기금 마련 운동을 전개하는 등 흑인 여성노동자들의 운동을 적극 돕고 나서면서 확대해 나갔다.
그러한 가운데 흑인과 백인이 함께 참여하는 단체를 조직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세계산업노동자회(Industrial Workers of the World : IWW)였다. 이 단체는 "여성노동조합(Women's Trade Union)"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 때 Elizabeth Currey Flynn이라는 아일랜드 출신의 여성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 후 IWW가 주최한 유명한 파업이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1912년의 Lawrence 파업이다. 이때 Elizabeth은 이 파업에 여성 대표로 활약한다. 23,000여명의 여성노동자들이 참석한 이 투쟁은 IWW가 남성 노동자들의 부인들(지역주민)을 조직하여 합세시킨 첫 번째 시도로써, 그 투쟁은 성공한다.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것으로 이들은 노동조건 뿐만 아니라 여성운동단체에서 요구하는 여성 전체의 문제인 '참정권'문제를 요구하면서 이 운동을 서로 접목시켰다는 점이다.
이 투쟁에서 임신부가 아이를 유산하고, 한 어린 노동자가 죽고, 600여명의 여성노동자가 구속되고 100여명이 부상을 당했다. 이 투쟁은 2개월 동안 계속 이어졌는데 처음으로 여권 운동가들이 합세하여 노동자 운동을 적극 지원한 투쟁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19세기에 영국에서 선거권과 교육은 남성들의 특권이었는데 여성뿐 아니라 저소득층 남성과 교육받지 못한 이들에게도 선거권을 주어서는 안된다고 주장이 일기 시작하였다. 이에 전체적인 분위기가 술렁거릴 무렵 미국에서 여성들을 중심으로 전국여성선거권운동연맹(The National's Women's Suffrage Association : NAWSA)이 조직되어 로비와 대규모 집회를 통한 청원서 전달, 그리고 대중강연등을 통해 여성 투표권 확보를 위한 의식 교육을 위한 운동을 전개한다. 이 단체의 구성원 다수가 중류층 백인이었고 이들 중에는 인종차별주의자들도 있어서 이민 여성들과 인종차별주의자들과의 마찰이 자주 일어나기도 하고, 흑인 등 이민 여성들이 이 회의에 참가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 풍토였으나 저소득층 여성노동자들은 이민 여성들을 환영하였고 함께 운동을 전개해 나가게 된다.
저소득층 여성노동자들은 사회주의 여성운동가들과 가까이 하였다. 1907년 처음으로 저소득 여성노동자들의 국제대회가 독일 Stuffgart에서 열리게 되었는데 이 자리에서 공산주의자로 잘 알려져 있는 독일의 클라라체트킨은 연설을 통해 여성노동자들이 참정권 운동에 소극적인 것에 대해 비판한다. 그리고 여성노동자들에게 "우리 모두는 의무적으로 참정권 운동에 참여해야 한다고"고 강조한다. 클라라체트킨은 유럽 중심으로 여성노동자들을 조직하여 연결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여성노동자들을 노동조합으로 조직하도록 도와주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2) 역사적인 3·8대회
1908년 3월 8일 1만 5천여명의 방직공장 여성노동자들이 미국 룻저스광장(Rutgers Square)에 모여 10시간 노동제 쟁취, 안전한 작업환경과 성, 인종, 재산, 교육수준 등과 관계없이 모든 이들에게 투표권을 주어야 한다고 요구한 역사적 투쟁이 있었다.
여성노동자들은 NAWSA 회원의 반 노동자성을 폭로하고 이들을 이주민에 대한 인종차별주의자들이라고 규정하였다. 따라서 이들과는 함께 운동할 수 없음을 결의하고 1910년 여성노동자 참정권 쟁취위원회를 조직하였다. 한편 이런 여성노동자 대투쟁에 힘입어 제트킨은 미국 사회주의 여성과 여성 노동자(IWW)에게 제2차 여성운동가들의 대회를 가질 것을 요청하여 1910년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3월 8일에 대회를 갖게 되었다. 바로 이 날의 여성노동자 대투쟁을 기념하여 이 날을 세계여성의 날로 정하는 것을 결의하게 되었다. 그 이후에 여성들의 연대운동이 눈에 띄게 활발해졌다.
1914년 제 1차세계대전 때에는 세계적으로 여성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전쟁반대 항의와 부족한 음식, 물량강화, 물가안정을 요구하는 대투쟁을 1915년 멕시코와 노르웨이에서, 1917년 이탈리아에서, 1918년 오스트리아에서 벌였고, 1936년 3월 8일 스페인에서 수천명의 여성들이 군부독재정권을 반대하는 데모를 벌였다. 1943년 이탈리아에서 수많은 여성들이 파시스트 뭇솔리니를 반대하는 대규모 데모를 3월 8일에 가졌고, 1979년 3월 8일 베트남에서 수천 명의 여성군인들에 의해 미국침략을 반대하는 데모를 가졌다. 1981년 5천명이 넘는 이란 여성들이 3월 8일 대회에서 burka(여성의 머리와 얼굴을 싸매는 것; 모든 여성이 이것을 쓰도록 회교에서는 법규로 정해져 있음)를 반대하는 대규모 데모가 있었으며 1988년 필리핀에서는 가브리엘라라는 여성단체연합을 중심으로 독재정권살인을 타도하는 촛불행렬을 3월 8일 대회에서 갖는 등, 세계적으로 3.8기념대회가 계속 이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여성의 한목소리와 함께 일부 국가에서는 3·8을 맞이하여 여성들에게 꽃을 선물하거나 남성들이 가사노동을 하기도 한다. 내용과 형식은 달라도 여성의 강고한 연대와 투쟁의 도도한 흐름은 면면이 이어지고 있으며 그 의미를 확대해 나가고 있다. 5월 1일이 전체노동자들의 요구와 결의를 모아내는 날이라면 3월 8일은 여성과제를 제출하고 여성노동자들의 한해를 시작하는 결의의 날이라 할 것이다.
"만약 우리가 남성과 같은 일을 하고 같은 임금을 받을 수 있다면, 노동조합을 만들고 가입할 수 있다면, 산전산후 휴가를 받고 아이를 탁아소에 맡길 수 있다면, 모든 투표에 참여할 수 있다면, 정당과 공공기관에 들어가기 위해 공정한 경쟁을 할 수 있다면, 우리의 성과 수태를 조정할 권리가 있다면 이것 모두는 바로 우리 할머니와 어머니의 피나는 투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3·8대회에서 역설한 한 여성노동운동가의 말대로 3·8의 진정한 의미는 바로 우리의 할머니와 어머니를 기억하고, 당신과 나의 투쟁을 더하는 노력일 것이다.
출처 : 이철순(1996), "세계여성운동의 흐름", [지역 여성학 강의],
부산여성사회교육원 지역여성학강의 집필팀(편), 자유인공동체
- 한국여성노동자회협의회 발간 '일하는 여성들의 네트워크 제 2호 중에서 -
1) 3·8세계여성대회의 시대적 상황
산업 혁명은 여성을 전에 없던 착취 속으로 몰아 넣었다. 산업혁명은 여성들을 그들의 전통적인 일인 가사노동과 아이를 키우는 일에서 풀어주지 않은 채 비인간적인 작업장에 밀어 넣었다. 한편 이 상황은 여성들이 집안을 나와 다른 여성들을 만나면서 억압에 대한 공동의 이해와 공통점을 찾게 되는 계기가 되었고 그들에게 단결된 힘의 필요성을 일깨우게 한 현장이기도 했다.
19세기 중반에 방직공장 노동자 중 23%만이 남자였고 나머지는 여성노동자와 연소 노동자였다. 이들은 남성노동자들의 임금에 반 정도의 수준을 받고 일해야만 했다. 그리고 미국 노동자들의 75%가 이주 노동자였는데 이들은 극심한 인종차별 대우에 시달리면서 미국인보다 작은 임금을 받고 비참한 곳에서 살아야만 했다. 그들 중 흑인들에 대한 차별과 착취는 누구보다도 더 심했었다. 흑인들은 오직 농장과 가정부로만 고용되었고 뒤늦게 공장에서 이들의 고용을 허용했는데 그들은 위험하고 가장 힘든 일에 고용되었다. 그들이 받는 임금은 백인 노동자의 1/3에 불과했었다.
그러나 흑인 여성들은 이러한 현실의 아픔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지만은 않았다. 그들은 각 지역에 그들의 단체를 조직하였고 이후에는 전국 흑인여성회(National Colored Women)를 구성하여 남미주에서 백인 인종차별주의자에게 구타당한 흑인문제를 항의하기 시작하였다. 이 당시에는 인종차별주의자들을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면 죽임을 당하는 상황이었다. 흑인들이 시작한 이 운동은 방직공장에서 일하는 백인여성 노동자들이 노예 사회를 반대하는 모임을 결성하여 그들과 함께 반대운동을 시도하였고 탄원서를 제출하고 노예 폐지 운동을 돕기 위한 기금 마련 운동을 전개하는 등 흑인 여성노동자들의 운동을 적극 돕고 나서면서 확대해 나갔다.
그러한 가운데 흑인과 백인이 함께 참여하는 단체를 조직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세계산업노동자회(Industrial Workers of the World : IWW)였다. 이 단체는 "여성노동조합(Women's Trade Union)"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 때 Elizabeth Currey Flynn이라는 아일랜드 출신의 여성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 후 IWW가 주최한 유명한 파업이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1912년의 Lawrence 파업이다. 이때 Elizabeth은 이 파업에 여성 대표로 활약한다. 23,000여명의 여성노동자들이 참석한 이 투쟁은 IWW가 남성 노동자들의 부인들(지역주민)을 조직하여 합세시킨 첫 번째 시도로써, 그 투쟁은 성공한다.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것으로 이들은 노동조건 뿐만 아니라 여성운동단체에서 요구하는 여성 전체의 문제인 '참정권'문제를 요구하면서 이 운동을 서로 접목시켰다는 점이다.
이 투쟁에서 임신부가 아이를 유산하고, 한 어린 노동자가 죽고, 600여명의 여성노동자가 구속되고 100여명이 부상을 당했다. 이 투쟁은 2개월 동안 계속 이어졌는데 처음으로 여권 운동가들이 합세하여 노동자 운동을 적극 지원한 투쟁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19세기에 영국에서 선거권과 교육은 남성들의 특권이었는데 여성뿐 아니라 저소득층 남성과 교육받지 못한 이들에게도 선거권을 주어서는 안된다고 주장이 일기 시작하였다. 이에 전체적인 분위기가 술렁거릴 무렵 미국에서 여성들을 중심으로 전국여성선거권운동연맹(The National's Women's Suffrage Association : NAWSA)이 조직되어 로비와 대규모 집회를 통한 청원서 전달, 그리고 대중강연등을 통해 여성 투표권 확보를 위한 의식 교육을 위한 운동을 전개한다. 이 단체의 구성원 다수가 중류층 백인이었고 이들 중에는 인종차별주의자들도 있어서 이민 여성들과 인종차별주의자들과의 마찰이 자주 일어나기도 하고, 흑인 등 이민 여성들이 이 회의에 참가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 풍토였으나 저소득층 여성노동자들은 이민 여성들을 환영하였고 함께 운동을 전개해 나가게 된다.
저소득층 여성노동자들은 사회주의 여성운동가들과 가까이 하였다. 1907년 처음으로 저소득 여성노동자들의 국제대회가 독일 Stuffgart에서 열리게 되었는데 이 자리에서 공산주의자로 잘 알려져 있는 독일의 클라라체트킨은 연설을 통해 여성노동자들이 참정권 운동에 소극적인 것에 대해 비판한다. 그리고 여성노동자들에게 "우리 모두는 의무적으로 참정권 운동에 참여해야 한다고"고 강조한다. 클라라체트킨은 유럽 중심으로 여성노동자들을 조직하여 연결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여성노동자들을 노동조합으로 조직하도록 도와주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2) 역사적인 3·8대회
1908년 3월 8일 1만 5천여명의 방직공장 여성노동자들이 미국 룻저스광장(Rutgers Square)에 모여 10시간 노동제 쟁취, 안전한 작업환경과 성, 인종, 재산, 교육수준 등과 관계없이 모든 이들에게 투표권을 주어야 한다고 요구한 역사적 투쟁이 있었다.
여성노동자들은 NAWSA 회원의 반 노동자성을 폭로하고 이들을 이주민에 대한 인종차별주의자들이라고 규정하였다. 따라서 이들과는 함께 운동할 수 없음을 결의하고 1910년 여성노동자 참정권 쟁취위원회를 조직하였다. 한편 이런 여성노동자 대투쟁에 힘입어 제트킨은 미국 사회주의 여성과 여성 노동자(IWW)에게 제2차 여성운동가들의 대회를 가질 것을 요청하여 1910년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3월 8일에 대회를 갖게 되었다. 바로 이 날의 여성노동자 대투쟁을 기념하여 이 날을 세계여성의 날로 정하는 것을 결의하게 되었다. 그 이후에 여성들의 연대운동이 눈에 띄게 활발해졌다.
1914년 제 1차세계대전 때에는 세계적으로 여성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전쟁반대 항의와 부족한 음식, 물량강화, 물가안정을 요구하는 대투쟁을 1915년 멕시코와 노르웨이에서, 1917년 이탈리아에서, 1918년 오스트리아에서 벌였고, 1936년 3월 8일 스페인에서 수천명의 여성들이 군부독재정권을 반대하는 데모를 벌였다. 1943년 이탈리아에서 수많은 여성들이 파시스트 뭇솔리니를 반대하는 대규모 데모를 3월 8일에 가졌고, 1979년 3월 8일 베트남에서 수천 명의 여성군인들에 의해 미국침략을 반대하는 데모를 가졌다. 1981년 5천명이 넘는 이란 여성들이 3월 8일 대회에서 burka(여성의 머리와 얼굴을 싸매는 것; 모든 여성이 이것을 쓰도록 회교에서는 법규로 정해져 있음)를 반대하는 대규모 데모가 있었으며 1988년 필리핀에서는 가브리엘라라는 여성단체연합을 중심으로 독재정권살인을 타도하는 촛불행렬을 3월 8일 대회에서 갖는 등, 세계적으로 3.8기념대회가 계속 이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여성의 한목소리와 함께 일부 국가에서는 3·8을 맞이하여 여성들에게 꽃을 선물하거나 남성들이 가사노동을 하기도 한다. 내용과 형식은 달라도 여성의 강고한 연대와 투쟁의 도도한 흐름은 면면이 이어지고 있으며 그 의미를 확대해 나가고 있다. 5월 1일이 전체노동자들의 요구와 결의를 모아내는 날이라면 3월 8일은 여성과제를 제출하고 여성노동자들의 한해를 시작하는 결의의 날이라 할 것이다.
"만약 우리가 남성과 같은 일을 하고 같은 임금을 받을 수 있다면, 노동조합을 만들고 가입할 수 있다면, 산전산후 휴가를 받고 아이를 탁아소에 맡길 수 있다면, 모든 투표에 참여할 수 있다면, 정당과 공공기관에 들어가기 위해 공정한 경쟁을 할 수 있다면, 우리의 성과 수태를 조정할 권리가 있다면 이것 모두는 바로 우리 할머니와 어머니의 피나는 투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3·8대회에서 역설한 한 여성노동운동가의 말대로 3·8의 진정한 의미는 바로 우리의 할머니와 어머니를 기억하고, 당신과 나의 투쟁을 더하는 노력일 것이다.
출처 : 이철순(1996), "세계여성운동의 흐름", [지역 여성학 강의],
부산여성사회교육원 지역여성학강의 집필팀(편), 자유인공동체
- 한국여성노동자회협의회 발간 '일하는 여성들의 네트워크 제 2호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