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래 기사의 주장은 남북 노동자민중들의 줄기찬 반미자주통일투쟁(특히 남쪽 노동자민중들의 반미자주통일투쟁)이 한반도의 움직일 수 없는 대세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기사라고 생각됩니다.
우리가 북미 정세 결정론 등으로 인해 조금이라도 정태적 정세인식이나 주관적 낙관에 빠져 당면한 반미자주통일투쟁에 소흘하게 되었을 때, 미제국주의자들과 일본군국주의자들, 그리고 반통일사대매국세력들이 어떤 자세를 보일 것인가는 6.15공동선언 이후의 지난 기간 동안 너무나 생생하게 체험해 온 바대로 입니다.
하옇든, 국제정세의 변동을 우리가 일상적으로 확보하기는 힘든 여러가지 자료들을 파악, 동원하여 연결, 분석하고 있는 강진욱 기자의 노력은 나름대로 평가되어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정세분석에 참고 되시기 바랍니다.
냉전해체작업 재가동할 북일회담
미국과의 치밀한 사전조율- "우려도 없지 않아"
강진욱 연합뉴스 기자
고이즈미 일본 총리가 다시 평양을 방문한다. 일본 총리로는 처음으로 평양을 방문해 역사적인 '조-일 평양선언'을 발표한지 불과 1년8개월 만이다. 납치문제와 함께 핵-미사일 문제 등을 포괄적으로 논의할 것이라 한다. 미국의 대북적대공조의 한 축을 이루고 있는 일본의 총리대신이 똑같은 현안을 갖고 1년8개월만에 평양에 다시 가는 것은 결코 예삿일이 아니다. 2002년 9월 그가 평양을 찾을 때 세상 사람들은 그것을 역사적 사건이라 했다. 조선은 일본으로부터 식민지배 청산과 국교정상화의 약속을 받아냈다. 그러나 고이즈미 방북 보름 뒤 미 대통령 특사가 평양에 다녀와 '북한 핵 개발 시인 - 북한 제네바합의 위반' 주장을 퍼뜨림으로써 일본 총리 방북은 결실을 맺지 못했다. 그러나 조선은 지금 그 결실을 따내려 하고 있다. 그동안 미국의 갖은 방해 공작으로 올스톱 됐던 한반도 냉전체제 해체 작업이 다시 가동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한 편에서는 우려도 없지 않다. 이번에도 또 미국이 그의 재방북 뒤에서 모종의 음모를 꾸미고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1. 고이즈미 재방북은 조-미 외교전의 결과
미국은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 총리의 재방북(5.22 예정)을 7월의 참의원 선거를 앞두고 국민연금 보험료 미납 파문을 잠재우기 위한 '깜짝쇼'로 몰아가고 있다. 미 국제전략연구소(CSIS)의 와타나베 츠네오 선임연구원이 15일 자유아시아방송(RFA)과의 회견에서 참의원 선거와 연금 파문을 고이즈미 재방북의 '두 가지 정치적 요인'이라고 지적한 것이 그 한 예이다. 약화된 정치적 입지를 만회하고 오는 7월 참의원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한 것이라는 주장이 그럴듯해 보인다.
그러나 고이즈미 총리의 재방북은 이미 지난해 7월부터 거론되기 시작해 한 달 전인 지난 4월부터 본격 추진돼 왔다는 점에서 그의 재방북 결정을 4월말 불거진 연금파문 때문이라고 보는 것은 비논리적이다. 앞뒤가 맞지 않는다.(주1)
또 그의 재방북이 단지 조선에 의한 일본인 납치 문제만 다루기 위한 것이라면 고이즈미 총리가 국내 정치적 입지 만회를 노리고 '깜짝쇼'를 벌인다는 주장이 웬만큼 설득력을 얻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의 재방북은 단지 납치문제 만이 아니라 한반도 핵 문제라는 큰 틀 속에서 논의되고 결정됐으며 특히 미국과의 협의를 거쳤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교도통신이 15일 "미 국무부 관리들은 일본이 방북계획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미국과 협의했다고 말했다"고 보도한 것은 이런 배경을 설명해 준다. 고이즈미 총리 자신도 재방북 이유를 설명하며 핵 문제와 미사일 문제 등을 포함한 '포괄적 해결'을 강조하고 있다.
리처드 아미티지(Richard Armitage) 미 국무부 장관이 5월19일 북-일 국교정상화는 북-미간 핵 문제 해결을 전제로 한다고 말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교도(共同)통신에 따르면 아미티지 부장관은 이날 상원 외교위원회 청문회가 끝난 후 기자들에게 "핵 문제 해결도 북-일 국교정상화에 포함된다는 점을 확인했다"고 말했다. 그의 이 말은 또 고이즈미 재방북이 결코 일본의 단독 결정이나 고이즈미의 정치도박이 아니라 핵 공방을 포함한 북-미 적대관계라는 큰 틀 속에서 논의되고 결정됐다는 사실을 뒷받침한다.
고이즈미의 재방북이 처음 공개 거론된 것은 1차 6자회담이 열리기 한 달 전인 2003년 7월이었고 이후 6자회담 논의가 시작될 때면 그의 재방북이 거론되곤 했다. 그의 재방북은 핵 문제를 앞세운 미국의 대북 전술과 밀접하게 연결돼 있었던 것이다. 고이즈미 재방북론이 6자회담과 때맞춰 거론됐다는 것은 결국 북-일 적대관계와 북-미 핵 대결이 한 축으로 연결돼 있음을 말해준다.(주2)
6자회담은 미국과 조선 사이의 적대적 관계에서 비롯된 핵 문제를 논의하는 자리이며 언제나 조-미 대결 구도로 회담이 진행된다는 점에 비춰볼 때 고이즈미 재방북 결정은 결국 미국과 조선 사이의 밀고 당기는 치열한 외교전에 의한 산물임을 알 수 있다.
그러면 고이즈미 방북을 요구한 것은 어느 쪽일까? 두 말 할 것도 없이 고이즈미의 재방북을 요구한 쪽은 조선이다. 미국은 이를 마지못해 수락한 것이다. 1년 8개월 전 고이즈미 방북 성과인 식민지청산과 조-일 국교교섭 합의가 미국의 일방적 '북 핵 시비'에 의해 파탄의 위기에 빠졌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론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그의 재방북 논의가 진행돼 온 과정을 돌아보면 일본 정부 또는 고이즈미 총리 자신은 1년 8개월만에 평양에 다시 가야한다는데 대해 대단히 불쾌해했음을 알 수 있다. 적대관계를 청산하지 못한 두 나라 사이에서 한 편의 국가수반이 이처럼 짧은 기간에 상대 국가를 연거푸 방문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주3)
2003년 7월6일 니혼게이자이(日本經濟)신문은 교착상태에 빠진 납치문제와 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이즈미 총리가 재방북하는 문제를 미국 등 관계국과 물밑 교섭중이라고 보도했을 때 고이즈미 총리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주4)
3개월 뒤인 2003년 10월, 가족들을 평양에 남겨 둔 채 일본에 귀국한 납치 피해자 지무라 야스시(地村保志.48)씨가 기자회견을 갖고 가족 송환을 위한 고이즈미 총리 재방북을 요청했을 때나 2004년 1월 2차 6자회담을 앞둔 시점에서 고이즈미 총리의 재방북이 다시 거론됐을 때도 고이즈미 정부의 반응은 시큰둥했다.(주5)
4월1일에는 자민당의 야마자키 다쿠(山崎拓) 전 부총재가 같은 당 소속 히라사와 가쓰에이(平澤勝榮) 총무성 정무관 겸 '납치구출행동의원연맹' 사무국장과 함께 비밀리에 중국 다롄(大連)을 방문, 조선 외교 당국자들과 납치문제를 협의했을 때 고이즈미 총리는 자신의 사전 승인 없이 북측과 회담이 진행되는데 대해 격노했고 이에 히라사와 의원은 귀국 직후 총무성 정무관직을 내놔야 했다.
고이즈미 개인이나 일본 정부의 입장을 태도로 미뤄볼 때 고이즈미의 재방북은 결코 개인적 또는 독자적 결정이 아니었던 것이다. 2월말 2차 6자회담 이후 관련국들의 움직임을 살펴보면 고이즈미 총리의 재방북은 결국 한반도 정세의 기본 틀인 북-미 대결구도를 배경으로 미-일간 대북 적대 공조의 틀 속에서 논의되고 결정됐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2차 6자회담(2.25-27)이 끝나자마자 곧바로 북-일 협상을 위한 움직임이 시작됐다.
고이즈미 총리가 3월1일 야부나카 미토지(藪中三十二) 6자회담 수석대표로부터 회담 결과를 보고 받은 뒤 납치문제 등을 해결하기 위해 북-일 정부간 협상을 3월 말 개최하겠다는 뜻을 밝힌 것이다.
2월말 6자회담은 북-미간 핵 공방전 속에 별 볼일 없이 끝났지만 북-미를 포함한 당사국들은 물밑으로 북-일 협상 추진에 대한 합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일본 총리가 6자회담 직후 북-일 협상 조기 추진 의사를 밝힌 것은 일본이 6자회담에서 납치문제를 논의해야 한다는 입장에서 물러섰음을 의미한다. 이것이 2차 6자회담의 성과였다. 이로써 6자회담과 별도의 북-일 회담의 틀이 마련된 것이다.
일본 총리가 북-일 회담에 나설 뜻을 표시하자 조선은 곧바로 일제 식민지 피해와 과거청산 문제를 강조하기 시작했다. 조선중앙방송은 3월6일 '세기를 이어 계속되는 일본 반동들의 악랄한 책동'이란 제목의 보도물을 통해 일본이 아직도 과거를 반성하지 않고 있다면서 "우리 겨레는 일제에 대한 사무치는 원한과 분노에 치를 떨며 그 죄악을 결산할 의지를 가다듬고 있다"고 지적했다.(주6)
조선은 6자회담에서 북-일 협상 추진 문제를 매듭지은 뒤 일본 총리가 이를 확인하자마자 벼르고 벼르던 과거청산을 촉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미국이 가로막은 일본의 과거청산과 국교정상화 프로세스가 다시 가동되기 위해서는 먼저 해결해야 할 과제가 있었다. 바로 미국의 배후조정과 일본 극우세력의 준동에 의해 해결의 기회를 상실한 일본인 납치 피해자 가족들의 귀국 문제였다.(주7)
북-일 양측은 이미 2003년 8월 1차 6자회담 직후부터 이 문제를 매듭짓기 위한 접촉을 갖고 있었다. 이 접촉에서 조선 측은 피해자들이 일시 일본에 귀국했다 평양에 돌아와 가족들과 함께 일본에 영주 귀국하기로 한 당초 합의를 일본이 깨고 일시귀국자들의 평양 귀환을 막은 데 대해 '일본의 고위 당국자'가 조선을 방문해 정중히 사과할 것을 요구했다고 일본 매체들은 보도했다.
일본은 이를 "북한의 체면을 살려주는 조치" 정도로 평가절하하면서 외무부 관리들을 평양에 보내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2차6자회담 한 달 여 전인 2004년 1월11∼13일 다나카 히토시(田中均) 외무성 외무심의관 등 일본 정부 관계자 5명이 평양을 방문한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후 무려 4개월간의 밀고 당기는 협의 끝에 고이즈미 재방북이 결정된 것을 보면 북측이 요구한 '고위 당국자 방북'이란 일본 총리의 재방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일본은 총리의 재방북 요구를 어쩔 수 없이 수락한 것이다.
2차 6자회담 직후 일본 총리가 북-일 협상 조기 재개의 뜻을 밝히고 조선이 '일본의 과거청산' 목소리를 높이는 상황에서 주변국들의 움직임이 긴박해진다. : △조지프 디트라니(Joseph DiTrani) 미국 국무부 한반도 담당 대사(2004년 5월12일 6자회담 실무그룹회의 미국측 수석대표)와 박길연 유엔주재 조선 대사가 3월 중순 뉴욕에서 비공식 회동, 핵 문제 등을 협의.(주8) △ 리자오싱(李肇星) 중국 외교부장이 3월23일 조선을 방문, 6자회담의 조기 개최를 위한 협력 방안과 양측 현안을 논의한다고 쿵취앤(孔泉) 중국 외교부 대변인이 발표(3월18일) △조선 외무성 대변인은 "핵 억제력을 질량적으로 강화할 것"이라는 담화를 발표(3월19일)(주9) △ 미국, 부통령 체니의 일본 방문 계획 발표(3월19일) △가와구치 요리코(川口順子) 일본 외상은 조선을 테러지원국으로 지정하는데 있어서 '납치문제'도 추가해 주도록 미국에 요청했다고 발표.(3월23일)(주10)
북-미간 비공식 회동이 이뤄지면서 중국 외교부장의 방북 계획이 발표되고 곧바로 미 부통령의 일-중-한 3국 순방 계획이 공개됐음을 알 수 있다.
역시 체니의 일본 방문 일정이 발표되기 하루 전날인 3월18일 미 핵심권력의 의도를 가장 잘 반영하는 뉴욕타임스(NYT)가 "북한 핵 문제와 관련해 시간이 급한 것은 미국 쪽이며 따라서 미국은 외교적, 경제적 유인책을 통한 해결책 마련에 긴급하게 나서야 한다"고 보도한 것도 주목할 만 하다.
이 신문은 18일자 사설에서 "북한이 모든 핵무기 개발 프로그램을 검증가능한 방법으로 폐기할 경우 얻게 될 외교적, 경제적 조치들에 대해 미국이 밝히지 않는 한 진정한 진전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은 모든 회담 참가국들이 알고 있다"며 "북한의 핵 폐기가 선행돼야 구체적인 유인책이 언급될 수 있을 것이라는 미국의 주장은 비현실적"이라고 비판했다.(NYT "북 핵 문제 촉박, 유인책 제공해야" 2004.3.19 연합뉴스)
체니의 방북 계획 발표와 조선 외무성 대변인의 핵 억제력 강화 방침 발표, 뉴욕타임스의 대북 타협책 촉구는 모두 고이즈미 재방북 결정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돼 있다.(주11)
이 즈음 조선 측은 북-일 정부간 협상이 양국간 근본문제 즉, 식민지배 청산을 위한 것이어야 함을 강조하기 시작한다. 일본 총리가 북-일 협상 재개 의지를 표시한 이후 이 협상을 납치 피해자 가족들의 일본 귀환 문제로 몰아가려는 분위기가 흐르자 조선이 쐐기를 박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일본 총련 기관지 조선신보는 3월23일자에서 "일본이 적대정책을 지속하는 한 조선 측은 대화재개에 적극 나서지 않을 공산이 크다"고 논평했다. 이 신문은 제2차 6자회담 이후 일각에서 북-일 정부간 회담 재개 가능성을 말하고 있지만 조선 측은 '과거청산 없이 국교정상화는 없고 적대와 대화는 양립될 수 없다'는 원칙을 견지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조선신보는 "지금 조선은 어떤 '양보'를 준비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일본이 종래의 적대자세를 철회할 용의가 있는가 아닌가를 냉정하게 가늠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조선신보 보도는 리자오싱 중국 외교부장의 평양 방문 날짜에 때맞춰 나온 것이었다. 그리고 같은 날인 3월23일 가와구치 일본 외상은 조선을 테러지원국으로 지정하는 이유로 '납치문제'를 추가해 줄 것을 미국에 요청했다고 밝힌다.
납치문제를 테러지원국 재지정 이유로 내세우는 미-일의 움직임은 미-일의 대북적대공조체제를 강화하는 모양새를 띠지만 조-미 관계와 조-일 관계를 동시에 풀기 위한 수순이라고도 볼 수 있다. 조선의 대화 압력에 밀려 미국이 어쩔 수 없이 북-일 관계정상화를 용인하고 남북간 교류협력 관계 개선을 허용해야 한다면 먼저 일본인 납치 문제를 풀고 테러지원국 명단을 삭제하는 조치를 취해야 하기 때문이다.
미국과 일본이 북-일 관계와 북-미 관계를 한 축으로 엮어 놓는 작업을 진행하는 가운데 중국 외교부장은 평양에서 북측과 6자회담 및 실무그룹회의를 예정대로 추진하기로 합의한다. 6자회담과 북-일 회담이 동시에, 별도로 진행되면서 일본이 주장하는 납치 문제와 미국이 주장하는 핵 문제가 동시에 풀릴 수 있는 틀이 마련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2. 북-미-일 3각협의와 고이즈미 재방북
4월로 접어들면서 북-일 대화 재개를 위한 발걸음이 빨라진다.
4월1일 비밀리에 중국 다롄(大連)을 방문해 북측과 접촉한 일본 자민당의 야마자키 다쿠 전 부총재가 일본과 북한 정부간 대화가 조만간 재개될 것으로 보인다고 2일 밝힌 것이다.
북-일 양국이 중국에서 비밀 접촉을 갖던 시각 6자회담 실무그룹회의 미국 측 대표를 맡게 될 디트라니 미 국무부 한반도 담당대사도 베이징에 있었다. 그는 왕이(王毅) 중국 외교부 부부장과 만나 3차 6자회담 개최 문제를 논의한 것으로 보도됐지만 그가 북-일 접촉을 모른 체 했을 리 없다. 일본의 대북 접촉은 사실상 미국의 양해하에 이뤄졌다고 봐야 한다. 일본 뒤에는 미국이 있었던 것이고 사실상 북-미간 외교전 속에 북-일 정부간 회담 개최가 확정된 것이다.
북-일 양측이 접촉하는 때, 같은 장소에 미국 측 인사가 있었던 것은 2002년 8월말 고이즈미 방북(9.17)이 결정되던 당시 상황과 똑같다. 그 해 8월 25-26일 평양에서 마철수 조선 외무성 국장과 다나카 히토시(田中均) 일본 외무성 아시아대양주국장이 회담을 열어 고이즈미 방북 문제를 협의했지만 일본 뒤에는 미국이 있었다. 다나카 국장이 평양에서 마 국장과 만나던 시각 파리엘 새이드 미국 국무부 한국과 부과장 등 실무대표단도 평양 모처에 체류하며 북-일 교섭과 별도로 북-일 교섭을 벌였던 것이다.(주12)
당시 미 국무부는 또 국무부 실무진을 평양에 보내 북-일 국장급 회담과 동시에 북측과 회담을 갖도록 했을 뿐 아니라 리처드 아미티지 부장관을 보내 고이즈미 총리와 만나 그의 방북 의제를 조율했다. 일본의 니혼게이자이(日本經濟)신문이 2002년 9월3일자에서 아미티지 부장관이 북-일 외무성 국장급 회담 및 북-미 평양 실무회담 다음날인 8월27일 일본 총리 관저를 방문해 고이즈미 총리와 북-일 정상회담 문제를 집중 논의했다고 보도한 것이 그것이다.
조지프 디트라니 미 대사가 지켜보는 가운데 베이징에서의 북-일 비밀접촉이 진행되는 동안 미국은 조선이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제외되려면 일본인 납치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입장을 발표한다. 코퍼 블랙 미 국무부 테러대책 조정관이 4월1일 의회 증언에서 "납치문제는 북한을 테러 지원국가로 규정하는데 가장 중요한 요인 중 하나"라며 납치문제와 테러지원국 지정 문제를 연계시키는 발언을 한 것이다.(<北-日 > 2004.4.3 연합뉴스)
이어 4월 7-8일 이틀간 한-미-일 3국은 샌프란시스코에서 비공식 북핵정책협의회를 갖고 4월중 북 핵 실무그룹회의를 추진하고 조선의 핵 동결에 대한 '상응조치'를 논의할 수 있다는 입장을 정리한다. 결국 미국은 한-일 양국과 함께 실무그룹회의에서 조선이 요구하는 상응조치를 논의할 수 있다는 입장을 정리함으로써 실무그룹회의 개최의 가닥을 잡은 뒤 일본으로 하여금 대북협상에 나서면서 납치 문제 해결 및 수교교섭 재개의 길을 터준 것이다.
이로부터 이틀 뒤인 4월10일 체니 미 부통령이 일본을 방문하고 13일 고이즈미 총리와 만나 북-일 수교 교섭 6자회담 실무그룹회의 등을 논의했다. 흥미로운 것은 체니의 방일 날짜에맞춰 일본 아사히(朝日)신문이 10일 '복수의 정부소식통'의 말을 인용, 북-일간 협상이 4월중 열릴 전망이라고 보도한 것이다. 체니의 일본 방문이 북-일 협상과 직결돼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주목을 끄는 것은 4월12일 북-미간 공동 유해발굴 작업이 재개됐으며 1996년 미군 유해 발굴작업이 시작된 이후 처음으로 발굴장비가 DMZ를 통해 북측으로 운송됐다는 사실이다. 또 4월13일 해외미군용 잡지인 '성조'(Stars and Stripes)가 비무장지대(DMZ)에서 미군이 유일하게 관할해온 최전방 거점인 '오울렛 초소'(일명 241초소)가 연말까지 한국군에 이양된다고 보도한다.
미국의 이런 일련의 움직임은 일본과 한국의 대북 접근과 마찬가지로 북-미 적대관계가 완화되는 조짐으로 볼 수 있다. 미국을 정점으로 하는 미-일-한 3국의 대북적대공조 생리상 북-미 관계가 악화되면 북-일 관계, 남북관계도 동시에 악화되고 북-미간 긴장완화 조짐이 보일 만 하면 먼저 남북관계와 북-일 관계가 호전되기 시작한다. 미국의 이런 움직임은 북-미간 적대관계의 근본 청산을 추동하는 조선의 외교적 성과이자 자주통일을 염원하는 전민족적 노력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주13)
고이즈미 총리가 자신의 재방북 논의가 시작됐다고 밝힌 4월 중순까지의 정세는 위와 같다.
이후 주요 사건들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중국 방문(4.18-21일) △셀리그 해리슨(Selig Harrison)의 방북(4.20-24) △미 '세계 테러리즘의 유형:2003' 보고서를 발표(4.29) 등이다.
김 위원장 방북은 본격화된 남북경제협력을 기초로 신의주와 단둥을 경유한 대륙진출의 채비를 차리면서 체니 부통령의 일-중-한 순방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었고 해리슨 방북은 지금까지 미국이 조선에 전달한 메시지를 최종 확인하는 과정이었을 것이다. 부시행정부는 해리슨을 평양에 보내 김 위원장이 중국 방문때 거론했다고 전해진 '핵 사찰 동의' 여부를 확인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평양 방문을 마치고 4월24일 베이징에 도착한 해리슨은 조선측이 핵 프로그램의 완전한 해체를 위한 출발점으로 플루토늄 핵 프로그램을 동결할 용의가 있으며 △영변 핵시설 사찰 △추가 재처리 배제 △핵 물질의 제3자 이관 배제를 약속하면서 △미국의 대북 경제제재 해제 △테러지원국 지정 해제를 요구했다고 말했다. 해리슨의 방북은 북-미가 최종적으로 의사를 타진하는 절차였다고 볼 수 있다.
5월 들어 북-일 협상이 시작되면서(5.4) 고이즈미 재방북이 기정사실화된다.
요미우리(讀賣) 신문이 5월4일 재개되는 북-일 협상에서 북측이 납치피해자 가족의 송환을 약속할 경우 고이즈미 총리가 재방북,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정상회담을 갖고 한동안 중단된 국교정상화 교섭을 다시 시작할 용의를 표명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이는 고이즈미 재방북을 전제로 북-일 교섭이 시작됐음을 시사한다.(주14)
고이즈미 재방북 결정 과정에서 주목되는 사건은 일본의 대표적 매파인사이면서 대미 외교라인의 수장 격인 아베 신조(安倍晋三) 자민당 간사장이 4월20일부터 30일까지 무려 10일간 미국을 방문, 부시행정부 핵심 인사들과 두루 만난 것이다. : 『일본에서 차세대 총리후보 1순위로 꼽히는 아베 신조(49) 자민당 간사장이 조지 W.부시 정권의 극진한 환대 속에 워싱턴 외교무대에 데뷔했다. 지난해 9월 간사장 취임 이후 처음으로 미국을 방문한 그는 콜린 파월 국무장관, 도널드 럼스펠드 국방장관, 콘돌리사 라이스 백악관 안보보좌관, 리처드 아미티지 국무부 부장관 등 부시 정권 핵심 인사들과 모두 만나는 극진한 예우를 받았다.』(<"日의 > 2004.5.3. 한국일보)(주15)
고이즈미 총리가 밝힌대로 4월부터 재방북 논의가 시작된 이후 체니 미 부통령의 일-중-한 3국 순방(일본 4.10-13, 중국 4.13-15 한국 4.15-16)에 이어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방중(4.19-21) 및 해리슨의 방북(4.20-24), 아베 간사장 방미(4.20-30) 등을 거치며 고이즈미 재방북이 결정됐고 이에 따라 북-일 협상이 시작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면 5월12일부터 베이징에서 열린 6자회담 실무그룹회의는 무엇인가?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북-미 양측이 서로의 견해차를 확인했을 뿐이라는 이 회의는 도대체 왜 열렸을까? 3자회담과 두 차례 6자회담을 거쳐 미국의 의사를 이미 확인한 조선이 미국의 태도 변화 없이 회담에 나서 시간을 허비했을까? 이 회의가 열리기 바로 직전 일본 신문들이 앞다퉈 '고이즈미 재방북'을 기정사실화한데서 그 해답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은 고이즈미 재방북 카드를 확인받고 이 실무그룹회의에 나선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처럼 조선과 중국, 미국, 일본 사이의 밀고 당기는 외교전 속에 결정된 고이즈미 재방북은 두 말 할 것 없이 그의 1차 방북때 발표된 조-일 평양선언(2002.9.17)을 재확인함으로써 양국이 수교교섭을 재개하고 일본은 대북 경제지원과 동시에 식민지배 청산의 수순을 밟는 길을 열어 놓을 것이다.
이런 북-일 관계 개선 과정은 본격화되고 있는 개성공단 건설과 경의선-동해선 철도 도로 연결 등과 함께 북-미간 적대관계 해소의 가능성을 높임으로써 미-한-일 3국의 대북적대공조를 근간으로 하는 한반도 냉전체제의 틀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올 것으로 기대된다. 결국 미국의 핵 소동으로 중단된 한반도 전쟁상태 종식과 평화체제 정착의 프로세스가 다시 가동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3. 고이즈미 재방북 '경계론'을 경계한다
2002년 8월말 고이즈미 총리의 방북 결정 소식이 전해졌을 때 한반도는 기대와 벅찬 감동의 물결에 휩싸였다. 다음은 어느 보도매체의 논설이다. : 『고이즈미 일본 총리가 북한을 방문해 김정일 위원장과 정상회담을 갖는다는 놀라운 소식이 전해졌다. 일본 총리의 북한 방문으로는 처음이기 때문에 .... 좋은 일도 겹쳐오는지 고이즈미의 방북 소식은 남북경제협력추진위원회에서 경의선.동해선 동시 착공, 개성공단 금년 착공 등 굵직한 합의가 이뤄졌다는 또다른 희소식과 때를 같이해 전해졌다. .... 남북대화, 북-일 대화 과정에서 동시에 일어나고 있는 이러한 상황 발전은 이른바 시너지효과라는 것이 한반도의 긴장완화에도 나타날 수 있다는 기대를 갖게 한다. 한반도 평화를 위한 3대 요소 중 나머지 것인 북-미 관계에서도 같은 진전이 일어나 상승효과가 더욱 높아지기를 기대해 본다. 』
당시 모든 신문과 방송의 논조는 위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실제로 그의 방북은 놀라운 결과물을 낳았다. 조-일 평양선언!! 6.15남북공동선언에 이어 한반도 냉전체제의 또 한 축인 북-일 적대관계를 허물어뜨릴 또 하나의 역사적 문건이었다. 그러나 고이즈미 총리 방북 보름 뒤인 2002년 10월3일 미 대통령 특사가 평양을 방문했고 10월16일 미국이 "북한이 핵 개발을 시인했다"고 떠들기 시작하면서 가슴 벅찬 기대와 희망은 순식간에 절망으로 바뀐다.
고이즈미 방북을 준비하면서부터 우라늄 농축 방식에 의한 북 핵 개발 의혹 증거를 조작했고 고이즈미 방북 후 보름만에 켈리가 평양을 방문해 우라늄 의혹을 앞세워 북측을 압박하면서 "미국의 우려사항을 해소시키지 않으면 남북관계와 북-일 관계가 순조롭지 못할 것"이라고 협박한데 이어 미국에 의한 '북 핵 시비' 이후 고이즈미 방북 성과가 무산될 지경에 처한 상황을 되돌아보면 2002년 9월 고이즈미 방북은 결국 우라늄 핵 개발 시비를 앞세운 미국의 제네바합의 파괴 공작과 무관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로부터 1년7개월여 동안 북-미간 치열한 외교전이 전개됐고 일본은 덩달아 미국의 대북적대정책에 편승하며 조-일 평양선언을 백지화하려 했지만 일본 총리대신이 다시 평양에 가서 평양선언 이행을 약속해야 하는 것이다.
고이즈미 재방북을 앞두고 남북관계도 다시 순조롭게 풀리고 북-일 수교 가능성이 점쳐지는 등 다시 한반도 정세가 2002년 9월의 감격시대로 되돌아가는 느낌도 든다. 그러나 또 미국이 어떤 음모를 꾸미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떨치기 어렵다.
최근 북-미간의 움직임으로 미뤄봐도 미국이 똑같은 속임수를 쓰기는 어려울 것이고 조선 역시 1년7개월만에 똑같은 속임수에 놀아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지난 10여 년의 조-미 관계사를 돌아볼 때 어떻게든 두 나라 사이의 적대관계를 풀고자 하는 조선의 노력은 미 핵심세력의 책동으로 번번히 난관에 부딪혔다. 미국이 대북적대와 대남지배를 통한 한반도 분단체제를 영속화함으로써 제국주의 야욕을 채우기 위해 대북적대 노선을 틀어쥐고 남북간 화해와 통일을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1993년 6.11 조-미공동성명에 이어 1994년 제네바합의(10.21), 2000년 조-미 공동코뮈니케 등은 모두 미국이 조선의 간고한 투쟁에 굴복해 한반도 전쟁상태를 종식시키기로 약조한 역사적 문건들이다. 그러나 부시행정부가 출범하면서 클린턴행정부 시절 이뤄진 한반도 평화와 통일의 프로세스를 모두 뒤엎으려 했고 제네바합의 등은 고사 직전 상태에 있다. 지난 3년여의 정세가 그러했다.
지금 미국이 보이는 행태는 1차 고이즈미 방북 때의 반북 핵 소동 준비 작업을 연상케 하고 있다. 그러나 정도의 차이는 있다. 2002년 8월 고이즈미 방북 결정 때는 미국의 핵 공작이 매우 치밀했다면 2004년 4월의 작업은 이미 거짓으로 드러난 파키스탄 커넥션을 다시 이슈화하는 정도이다. 다만 또다른 제3의 핵 소동을 준비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우선 이 글 첫머리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고이즈미 방북을 연금미납 파문으로 실추된 그의 정치적 입지 만회를 위한 정치도박 또는 '깜짝 쇼'로 몰고 가는 저의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주16) 이는 2002년 9월 1차 방북 때도 그러했다. 또다시 미국이 고이즈미를 '버리는 카드'로 쓰겠다고 마음먹는다면 고이즈미 내각은 7월 참의원 선거에서 참패할 것이고 그의 재방북으로 마련된 한반도 평화의 계기는 또다시 물거품이 될 수 있다.
그의 방북 성과가 미지수라며 미리부터 그의 재방북 의미를 평가절하하는 미-일 선전매체들의 행태 역시 1년7개월 전과 하등 다를 것이 없다. 미국 신문 워싱턴포스트는 2004년 5월15일자에서 "오는 22일 북한을 재방문하는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 총리가 북한 김정일(金正日) 국방위원장에게 너무 많이 주는 경우 뿐 아니라 너무 많이 얻어내도 조지 부시 미 행정부의 북한 고립 전략에 불리하게 작용할 것이라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그러면서 이 신문은 소위 '전문가들'의 말이라며 "고이즈미 총리가 이번에 피랍자 가족의 송환을 위해 북한에 너무 달콤한 재정지원을 약속한 것으로 비춰지거나, 북한 핵 문제에서 아무런 진전을 거두지 못할 경우 국내외에서 이미지에 손상을 입을 것"이라고 엄포를 놨다. 고이즈미 재방북이 결코 한반도 냉전체제 해체로 이어지지 못하도록 하려는 미 핵심세력의 저의를 엿볼 수 있다.
2002년을 돌아본다. 한국계이면서 부시행정부내 극우 매파들보다 한 발 앞서 김정일 체제 전복(regime change) 및 해상봉쇄(naval blockade)를 주창해 온 조지타운대 교수 빅터 차(Victor Cha)는 2002년 9월6일 로스앤젤레스타임스(LAT)에 보낸 '고이즈미의 대조선 도박(Koizumi's North Korea Risk)'이란 글에서 고이즈미 총리로서는 평양에서 실질적인 어떤 성과를 갖고 도쿄로 돌아와야 하지만 "당장 가까운 장래(in the offing)에 중요한 미사일 합의가 이뤄질 것 같지는 않다"고 예언했다.
조-일 정상회담과 평양선언은 그의 이런 전망을 여지없이 깨뜨렸지만 그의 글은 결과적으로 북-일 회담 성과를 무효화시키겠다는 부시행정부의 '자기충족적 예언' 이었다. 실제로 지난 1년8개월간 평양선언은 이행되지 못했다. 고이즈미 재방북을 앞두고 쏟아지는 악담과 비야냥이 자기충족적 예언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고이즈미 총리 방북을 준비하면서 '북 핵 의혹'을 퍼뜨리는 것도 2002년 9월 때와 비슷하다.
미 군산복합체의 대표적 선전매체인 뉴욕타임스는 체니 부통령이 일본을 경유해 중국에 도착하기 하루 전날인 4월12일 파키스탄 핵 전문가인 압둘 카디르 칸 박사의 북 핵 장치 목격설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핵 기술 밀매혐의를 받고 있는 칸 박사가 5년 전 조선을 방문했을 때 비밀 지하 핵 시설에서 3개의 핵 장치를 직접 목격했다고 진술했다는 것이다.
신문 본지가 아닌 인터넷판이었고 소스(source)를 '아시아와 미국 관리들'이라고 애매하게 처리하는 등 애초부터 신뢰할 수 없는 보도였다.(주17)
미국은 이런 거짓 정보를 한국과 일본 정부에도 전달한 것으로 보인다. 2002년 8월 고이즈미 방북을 준비하면서 뒤로 우라늄 농축 핵 개발설을 한-일 양국에 전달했던 것처럼 고이즈미 재방북을 배후 조정하면서 똑같은 짓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주18)
북-일 관계와는 조금 동떨어진 것이기는 하지만 일본 신문들이 5월19일 일제히 일본 내 테러범 체류 사실을 대서특필함으로써 일본 내 대형 테러 가능성을 상기시킨 것도 간과할 수 없다. 9.11 사건을 시작으로 미국이 소위 전쟁분위기를 고조시킴으로써 대북 압력이 가중되고 주한미군 무력 증강에 따라 남북이 대결 국면에 빠졌듯이 일본 내 대형 테러 사건이 발생할 경우 고이즈미 재방북의 성과가 다시 물거품이 될 수도 있다. 또 한-미-일 3국간 대북적대공조체제가 강화되면서 남북간 군사적 긴장이 높아질 수도 있다.(주19)
그러나 좋은 조짐도 있다. 일본이 이번에는 정말로 평양선언을 이행할 듯한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우선 일본이 북-일 수교 교섭을 시작할 준비를 갖추고 있다. 니혼게이자이 (日本經濟)신문은 5월16일 인터넷판에서 일본 정부 소식통의 말을 인용, 일본 정부는 고이즈미 총리의 재방북 때 일본인 납치피해자 5명의 잔류가족 송환이 이뤄질 경우 6월중 국교 정상화 교섭을 재개하기 위한 준비 작업에 착수했다고 보도했다.
고이즈미 총리가 김 위원장과의 2차 정상회담에서 대북 송금 저지를 겨냥한 외환관리법 등 경제제재법을 발동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표명할 것이라는 보도도 있다. 마이니치(每日) 신문은 5월18일자에서 고이즈미 총리가 이들 대북제제 관련법의 '조건부 발동정지'를 표명함으로써 피랍 일본인의 잔류 가족 귀국과 핵 및 미사일 문제 등에서 포괄적 양보를 요구할 방침이라고 전했다.(주20)
모리스 스트롱(Morris Strong) 유엔 사무총장 특사 일행이 5월18일 평양을 방문한 것도 2월말 2차 6자회담을 전후해 본격 거론되기 시작한 대북 에너지 지원에 대한 기대감을 불러일으킨다. 유엔의 대북 에너지 지원 프로젝트는 일본의 대북 수교교섭에 따를 경제지원과 맞물려 있는 사업으로 스트롱 특사가 평양에 간 날 일본 정부 관계자들이 고이즈미 총리 재방북 선발대로 평양에 들어왔다는 점에서 특히 주목된다.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은 2차 6자회담(2.25-27) 직후인 3월2일 성명을 통해 "회담에서 한반도 비핵화를 향한 괄목할 만한 진전이 이뤄졌다"며 "스트롱 특사가 국제적 지원 노력을 조직화하는 방안에 관해 당사국들과 협력해갈 것"이라고 밝혔고 이틀 뒤인 3월4일 스트롱 특사는 일본 NHK와의 인터뷰에서 "북핵 문제가 해결되면 북한의 에너지난 해소를 위해 천연가스 파이프라인(PNG) 건설도 검토될 가능성이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이에 앞서 정세현(丁世鉉) 통일부 장관은 2차 6자회담 기간인 2월26일 중유 공급 등 대북 에너지 지원과 관련, "시작을 하자는 정도까지는 얘기가 돼 있지만 핵 동결에서 폐기로 가는 시간표가 나와야 한다"고 말해 3-4월중 개최될 예정인 6자회담 실무그룹회의가 주목을 받기도 했다.
조선은 지난해 12월9일 미국에 대해 핵 프로그램 동결을 시작으로 하는 '1단계 동시행동조치'를 제의하면서 △정치 군사 경제적 제재 해제 및 봉쇄 철회 △테러지원국 명단 삭제 △중유 등 에너지 지원 등을 요구한 바 있고 지난 5월12일 실무그룹회의에서 '동결 대 보상' 원칙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는 점에서 유엔 특사 방북이 대북 에너지 지원으로 이어지고 이를 통해 북-미 대타협의 물꼬가 트일 가능성이 있다.
또 미국이 중단시킨 경수로 건설이 재개될 것이라는 보도도 나오고 있다. 미국 신문 워싱턴타임스는 19일자에서 지난 12일 베이징 열린 6자회담 실무그룹회의에서 리 근 북측 수석대표가 미국 측에게 경수로 건설 재개를 제의했고 디트라니 미국측 수석대표는 "경수로 사업 재개는 북이 핵을 포기할 경우 미국이 취할 수 있는 조치의 한 요소"라고 대답했다는 것이다.(<北, >2004.5.19. 중앙일보)
또 요미우리(讀賣)신문이 5월19일 정부와 여당 간부의 말을 인용해 고이즈미 총리는 22일 열릴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과의 2차 정상회담에서 납치문제와 핵 문제 해결을 전제로 임기(2006년 9월까지)중 국교정상화 의지를 표명할 방침이라고 보도한 것도 일말의 기대감을 갖게 한다.
7월 참의원 선거 등으로 고이즈미 총리가 계속 위기에 몰릴 수도 있다는 점에서 '고이즈미 재임중'이라는 단서는 2002년 9월 그랬던 것처럼 이번 고이즈미 재방북을 대북 핵 협상 지연을 위한 시간벌기용 카드로 활용하려는 의도를 반영한 것일 수도 있지만 앞서 논의했던 대로 △일본인 납치 문제 해결과 대북 경제 지원 --> △핵 동결과 테러지원국 명단 삭제 --> △NPT(핵무기비확산조약) 의무 이행(북)과 경수로 건설을 포함한 제네바합의 이행(미) 등 북-미-일 3국간 단계적 동시행동을 예고하는 것으로도 보인다.
더 좋은 징조도 있다. 주한미군 철수론이 고개를 들고 있는 것이다.(주21) 1990년 4월의 주한미군 3단계 철수 계획을 무효화시키기 위해 북 핵을 시비했고 곧이어 출범한 클린턴행정부가 북-미 핵 대치 상황을 조장함으로써 한반도는 일촉즉발의 전쟁 위기에 몰렸었다.
클린턴행정부 2기 8년에 걸친 북-미 대결사가 2000년 6.15남북공동선언과 조-미 공동코뮈니케(10.12)에 이어 클린턴 미 합중국 대통령의 평양 방문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리려 할 때 조지 W.부시를 앞세운 일단의 극우세력은 클린턴행정부의 대북 접근 프로세스를 뒤엎으려 했고 그래서 나온 것이 바로 우라늄 농축 방식에 의한 북한의 핵 개발 시나리오였다. 흔히들 말하는 '북 핵 문제' 또는 북-미 핵 공방전은 미국의 대북적대정책에서 출발한 미국에 의한 '북 핵 시비'에 지나지 않는다.
조-미 공동코뮈니케에 명시된 '한반도 전쟁상태의 완전 종식'은 조-미 적대관계의 청산으로 완결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미국이 북 핵 개발 프로그램을 완전히 제거하기 위해서는 대북적대정책의 전위인 주한미군을 철수 또는 감축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논리적 귀결이다.
1992년 주한미군 3단계 철수론을 무효화시킨 실세들 가운데는 폴 월포위츠(Paul Wolfowitz) 미 국방부 부장관이 포함돼 있다. 그가 5월18일 청문회에서 주한미군 감축이 불가피하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주한미군 완전철수론이 거론되고 있다.
아직 안심할 수는 없지만 우리 민족이 추동하는 평화통일 프로세스가 다시 가동되는 듯하다. 핵전쟁도 불사하겠다고 덤벼드는 클린턴행정부를 다독여 조-미 공동코뮈니케(2000.10.12)를 이끌어내는데 8년이 걸렸다. 이 클린턴 방식을 송두리째 뒤엎고 원점에서 시작하겠다고 호언하며 조선을 공박하던 부시행정부는 4년만에 고개를 숙이고 있다. (2004.5.20 작성)
<주석>
(1) 고이즈미 총리는 5월14일 정부 여당 연락회의에서 "한 달 전부터 조정을 계속해온 끝에 합의에 도달했다"고 밝힌 바 있다.
(2) 또 북-미 관계와 북-일 관계는 남북관계와도 직결돼 있다. 미 대통령 특사의 방북을 계기로 북-일 평양선언 이행이 시작부터 암초에 부딪혔을 뿐 아니라 경의선 연결공사와 금강산 육로관광 추진이 제동이 걸렸던 것이다.
(3) 더구나 북-일 정상회담은 일본이 조선에 식민지 과거사를 사죄하고 보상을 약속하는 모양새를 띄고 있다. 미국의 농간이 아니었다면 그의 평양행은 한 번으로 족했을 것이다.
(4) 그러나 당시 후쿠다 야스오 관방장관은 상황이 달라지면 "고려해 볼 수 있는 일"이라는 묘한 반응을 보인 바 있다. 일본 총리대신의 의중과 무관하게 미-일 외교라인에서는 고이즈미 재방북 카드가 거론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5) 2004년 1월 후쿠다 관방장관은 한 회견에서 고이즈미 총리 재방북 가능성을 묻는 질문에 "고이즈미 총리가 북한을 갔다왔기 때문에 외교관례대로라면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왔으면 한다. 그런 기대와 희망이 있다"고 답변했다. 그러나 그는 "어떻게든 납치문제를 해결하고 싶고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진지하게 임할 것"이라며 "여러 가지 대화 등 움직임이 있다"고 밝혔다.
(6) 3월4일에는 재일조선인총연합회 기관지 조선신보가 평양발 기사에서 "조선이 일본의 과거청산 문제와 관련한 원칙적 입장을 더욱 강력하게 주장해 나갈 것으로 보인다"며 강제연행 피해 보상 문제가 북-일 회담 의제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조선신보는 특히 "조-일 평양선언(2002.9.17)에서 일본측은 과거 식민지지배에 대한 반성과 사죄의 뜻을 표명하고 국교정상화 후에 조선에 대한 경제협력을 실시할 데 대하여 확약했다"고 보도, 이 달 열릴 북-일 정부간 회담이 북-일 평양선언 이행을 위한 회담임을 강조했다.
(7) 1970-80년대 자행된 조선에 의한 일본인 납치 사건은 2002년 9월 고이즈미 방북 때부터 해결의 수순을 밟아 왔다. 그 해 10월 1-2주 일정으로, '일시귀국자' 신분으로 일본에 일시 귀국한 납치 피해자 5명의 평양 귀환을 일본 정부가 가로막으면서 문제 해결 절차가 중단됐을 뿐이다. 이후에도 이 문제를 '납치문제'라고 지칭하는 것은 잘못이다.
(8) (도쿄신문 4월5일 보도) 조지프 디트라니 대사와 박길연 대사가 무슨 이야기를 주고받았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2차 6자회담에서 합의한 6개국 실무그룹회의 추진과 그에 필요한 북-일 협상 선행문제를 논의했을 가능성이 있으나 조선 외무성 대변인이 "핵 억제력 질량적 강화"를 선언한 것이나 곧바로 리자오싱 중국 외교부장의 방북 일정이 발표된 것으로 미뤄 북-미간 비공식 대화는 서로간의 이견을 확인하는 선에서 그쳤을 공산이 크다.
(9) 조선 외무성 대변인의 담화(3.19)는 2차 6자회담 직후 북-일 정부간 협상을 위시한 6자회담 참가국들의 움직임을 추동하는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담화에서 "미국이 시간을 끌면서 핵 문제 해결을 미루고 군사적 위협을 강화할수록 그에 대응할 핵 억제력도 정비례하여 질량적으로 강화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조선의 핵 억제력 강화 조치는 미국을 대화테이블로 끌어들이는 주요한 요인이었다. 2003년 4월 3자회담이 열리기 직전 조선은 폐연료봉 재처리를 시작하면서 핵 억제력 강화 방침을 잇따라 표명했으며 이를 미국에 정식으로 통보했다. 2월말 CNN은 폐연료봉 재처리 징후를 대서특필하기도 했다. 2003년 8월말 1차 6자회담 역시 그 해 6월말 폐연료봉 재처리 작업이 완료됐음을 미국에 통보한 직후의 일이다. 조선은 2003년 10월부터 "폐연료봉의 용도 변경"(10.1), "핵 억제력의 물리적 공개"(10.16), "핵 억제력의 실물 증명"(10.18) 의사를 잇따라 표명함으로써 부시 미 대통령으로부터 서면안전보장 의사 표시를 이끌어냈고(10.20) 닷새 뒤인 10월25일 조선은 "부시 미 대통령의 서면불가침담보 고려 용의" 의사를 표시하면서 북-미 관계를 대화 국면으로 안착시켰다. 이후 조선은 그 해 12월부터 '1단계 동시행동 조치'(12.9)를 제안하는 등 미국을 협상테이블로 끌어다 앉히기 위한 지난한 노력을 기울이는 한편 2004년 1월 6-10일 미 스탠퍼드대학 존 루이스(John Lewis) 교수와 로스알라모스 국립핵연구소 지그프리드 헥커(Sigfried Hecker) 수석연구원(전 소장) 등 미국 핵 전문가들의 영변 방문을 통해 '핵 억제력'을 실증함으로써 미국에게 대화냐 대결이냐의 선택을 요구하기도 했다. 미국 측은 2004년 1월7일 `북한의 전향적 태도 변화'를 높이 평가한다는 반응을 보였고 콜린 파월 미 국무장관은 연 이틀 북측의 입장을 "새롭다" "진전됐다"고 애써 강조했다. 미국은 이어 9일부터는 "조선이 핵 동결 성명을 발표하면 미국이 안전보장성명을 발표할 수 있다"면서 조선 측이 지난해 6자회담 이후 강조해 온 '말 대 말 공약'에 응할 뜻을 밝히기도 했다. 2004년 2월 2차 6자회담은 이렇게 열린 것이다. : 필자 글 <이제 > 2004.1.10 www.chammalo.com
(10) 미 국무부는 4월29일 '세계테러리즘의 유형: 2003'이라는 연례보고서를 통해 조선 등 7개국을 테러지원국으로 재지정했다. 또 가와구치 일본 외상이 조선의 테러지원국 지정을 요구했을 당시 미국의 짐 리치(공화 아이오와주) 하원 국제관계위 아시아태평양소위원장 등은 '2004 북한인권법안(North Korean Human Rights Act of 2004)'을 하원에 상정했다.(3.23)
(11) 미국의 입장에서 보면 고이즈미 방북은 일종의 대북 협상 카드의 하나이다. 식민지배 배상 또는 경제 지원 명목으로 많게는 수 백억 달러가 오가는 엄청난 거래로서 미국은 북-일 수교교섭 및 일본의 대북 경제지원을 가로막음으로써 조선으로 하여금 핵사찰 또는 핵 포기 약속을 받아낼 수 있다고 여기고 있는 것이다.
(12) 통일학연구소 한호석 소장 글「조-일 정상회담의 추진 배경과 조-일 평양선언의 역사적 의의」,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 기관지 <민> 2002년 10월호(http://onekorea.org). 한 소장은 이 삼각 연쇄회동 때 미국은 북-미 정상 회담을 재개하기 앞서 북-일 정상회담을 추진한다는 뜻을 북측에 전달했다고 밝혔다.
(13) 이 즈음 남북관계가 해빙을 보이는 조짐으로는 정세현 통일부장관이 4월14일 국방대학교에서 열린 '한국의 통일정책' 특강에서 "정부와 민간이 참여하는 대북지원정책협의회를 구성, 지원에 차질이 없도록 하겠다"고 밝힌 것이나 개성공단 건설의 당사자인 김진호 한국토지공사 사장이 같은 날 "미국도 개성공단 사업의 성공을 위해 적극적인 지원을 약속했다"고 말한 사실들을 들 수 있다. 이런 발언들은 한국토지공사와 현대아산이 4월7일 개성공단 1단계 100만평의 임차료와 지장물 철거비용을 총 1천600만 달러(한화 183억원)로 북측과 합의한데 따른 것이지만 개성공단 건설의 주요 장애인 미국의 견제와 방해가 줄어든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 모두 체니 미 부통령이 일본, 중국에 이어 한국을 방문하기 하루 전날 쏟아진 발언들이다.
(14) 5월9일 산케이(産經) 신문은 '정부 고위관계자'의 말을 인용, 고이즈미 총리가 23일께 조선을 방문해 피랍 일본인의 잔류가족을 데려오는 방안이 추진되고 있다고 보도한다. 이 신문은 또 고이즈미 총리의 맹우(盟友)인 야마자키 다(山崎拓) 전 자민당 부총재가 4월초 중국 다롄(大連)에서 북한측 인사와 접촉한 후 비밀리에 조-일 수교 재개 절차 등을 담은 합의 문서를 작성해 온 것으로 밝혀졌다고 전했다. 고이즈미 재방북 및 수교교섭 재개는 곧 일본이 - 미국의 사주에 의해 파기하려했던 - 평양선언(2002.9.17)의 이행을 약속하는 의미를 지닌다. 니혼게이자이(日經) 신문도 같은 날 고이즈미 총리가 5월 4-5일 베이징(北京)에서 북한측과 협상하고 돌아온 다나카 히토시(田中均) 외무성 심의관에게 "방북 절차를 준비하라"고 지시했다면서 "북한이 체면과 실리를 모두 요구하고 있다"고 전했다.
(15) 한국일보는 '일본의 네오콘' '신국방족' 등으로 불리는 아베 간사장이 미국 방문 중 기자회견 때마다 "일본과 미국은 지금 가장 좋은 관계로 황금시대"라고 강조했으며 라이스 보좌관은 "그가 마음에 든다"며 "그는 터프하다"고 만족을 표시했다고 전했다. 아베는 특히 공화당 싱크탱크로 네오콘(neocon. 부시행정부내 극우 매파를 일컫는 '신보수주의자')의 산실인 아메리칸 엔터프라이즈 공공정책연구소(AEI)에서 '진화하는 미일관계'라는 제목으로 행한 영어 강연에서 미-일 동맹 강화를 위한 일본의 헌법개정을 역설했다고 한다.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인정하지 않는 현행 헌법 해석은 한계에 와 있다"며 "총선거에서 호헌세력이 쇠퇴한 결과 개헌이 현실문제로 논의되기에 이르렀다"고 밝히고 "일본에서는 안보에 대해 건설적 논의를 하는 사람이 매파로 불린다"며 "국익을 위해 진지한 논의를 하는 사람을 그렇게 부른다면 나를 매파로 불러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는 또 이라크 문제에 대해서도 "사담 후세인이 대량살상무기를 갖고 있다고 의심한 것은 지극히 합리적이었다"며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의 이라크전쟁 지지는 국익상 당연한 것"이라고 아낌없는 미국 지지를 표명했고 그의 강연을 들은 폴 지알러 전 국방부 일본부장은 "그와 같은 사람이 장래 총리로서 일본 헌법개정에 진력하기를 기대하고 있다"고 거들었다.
(16) 고이즈미 재방북 '결단'을 국민연금 미납 파문을 가라앉히기 위한 깜짝 쇼라는 주장을 한 꺼풀 벗겨보면 국민연금 미납 파문은 평양 재방문을 한사코 마다하는 고이즈미 총리로 하여금 이를 수락하게 만들기 위한 여론공작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4월26일로 만 3년이 되는 고이즈미 내각에 대한 지지도는 당시 역대 최고 수준을 구가하고 있었다. 아사히(朝日) 신문이 4월17-18일 이틀간 전국 유권자 1천964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 의하면 지지율은 50%로 1951년 요시다(吉田) 내각(58%)에 이어 두 번째로 높았다. 그런데 내각 출범 3주년을 사흘 앞둔 4월23일 나카가와 쇼이치(中川昭一) 경제산업상과 아소 다로(麻生太郞) 총무상, 이시바 시게루(石破茂) 방위청 장관이 일정 기간 국민연금 보험료를 납부하지 않은데 대해 대국민 사과 회견을 가졌다. 이에 대해 고이즈미 총리가 "앞으로 바로잡으면 될 것"이라며 "모두가 깜빡 잊고 (가족에게) 맡겨놓은 것 아니겠는가"라며 문제삼지 않을 방침임을 시사했듯이 연금 미납 사건은 어떤 부패나 뇌물 수수 등 정치적으로 문제가 될 만한 사건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 사건이 일파만파 확대된다. 미디어를 통한 여론몰이 때문이었다. 이 파문으로 정치적 위기를 겪는 정치인 가운데는 간 나오토(菅直人) 민주당 총재가 있다. 그는 고이즈미 정부가 부시행정부를 맹종하는 것을 빗대 '금붕어 꽁무니에 붙어 있는 똥'에 비유할 정도로 신랄한 언사를 마다 않는 자주파 인사였다. 최근에도 그는 고이즈미 정부가 이라크 전쟁에 따라나선 것을 매섭게 비판했다. 그는 대국민사과에 나선 자민당 인사 3명을 `미납 3형제'라고 비판하다 자신도 후생상 재직시 10개월간 보험료를 내지 않은 사실이 밝혀져 민주당 대표직을 사임해야 했다. 연금 파문이란 이처럼 사소한 실수가 '대국민 기만'으로 침소봉대(針小棒大)되면서 일본 여야 정치권을 각개격파하고 고이즈미 정권을 위기로 몰았다. 누구에 의한 것일까?
(17) 파키스탄 정부는 다음날인 4월13일 뉴욕타임스 보도에 대해 논평을 요구받았지만 '노 코멘트'로 일관했다. 파키스탄 정부는 2002년 10월 미국이 일방적으로 북 핵 시인설을 퍼뜨리며 파키스탄이 우라늄 농축 장비와 기술을 제공했다는 미국측의 주장을 강하게 반박해왔다. 그러나 경제지원을 앞세운 미국의 회유와 압박 등으로 파키스탄 정부는 미국이 칸 박사를 앞세워 퍼뜨리는 거짓 정보에 대해 명백한 입장 표명을 삼가는 쪽으로 태도를 바꾸고 있다. 파키스탄 정부가 왜 이런 태도를 보이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필자 글 <6자회담 > 참조.)
(18) 한국 정부의 한 고위 당국자는 4월13일 뉴욕타임스 보도와 관련, "정부는 최근 일부 관련정보를 제공받은 바 있다"며 "그러나 실제 내용에서 불투명한 점이 많고 정황 면에서도 애매모호한 점이 커 추가 확인 중"이라고 말했다. : 세계일보 <"NYT보도 >)
(19) 오사마 빈 라덴(Osama bin Laden)이 9.11 사건의 주범이라는 선전의 약발이 떨어지자 미 정보기관들은 아브 무사브 알 자르카위(al-Zarqawi)라는 가공의 인물을 내세워 이라크 침략전의 야만성을 감추면서 '테러의 세계화'를 획책하고 있다. 미국 민간인을 잔혹하게 살해한 사건이 일어났고 미 중앙정보국(CIA)은 자르카위가 그 주범이라고 몰아 가고 있다. 그러나 미 정보기관들은, 그리고 전 세계 모든 매체들은 2003년 3월20일 미국의 이라크 침략 이후 자르카위는 한 쪽 다리를 잃고 의족을 달았다고 주장해 왔다. 수없이 많은 신문과 방송이 그렇게 보도했었다. 그런데 미국 민간인의 목을 칼로 자르는 비디오 속 주인공의 움직임은 의족을 단 이의 거동이 아니다. '자르카위의 테러' 각본을 만들려면 주인공에 대한 일관성 있는 묘사가 필요하지 않을까? 미국 민간인 참살 사건은 무슬림을 악마화(demonize) 함으로써 이슬람 문명을 없애겠다는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의 '문명충돌론'을 합리화하기 위한 사건이다. '자르카위'의 정체나 그를 앞세운 미국의 테러리즘에 대해서는 필자 글 <미국의 > '3.11 스페인열차 폭파사건 배후는 알 카에다가 아니라 미국' 참조. 2004.3.25 www.chammalo.com
(20) 일본 국회는 2004년 2월 일본이 독자적으로 대북 송금과 무역을 중단할 수 있도록 외환관리법과 무역법을 개정했으나 아직까지 발동하지는 않고 있다. 일본 정부는 이와함께 북한 선박의 일본 입항금지를 겨냥한 특정선박입항금지법의 제정을 추진하고 있다.
(21) 한호석 통일학연구소(www.onekorea.org) 소장은 북-미 적대관계 청산은 주한미군 철수로 완결될 것이라고 오래 전부터 확언해왔다. 그의 주장이 현실화되고 있다.
우리가 북미 정세 결정론 등으로 인해 조금이라도 정태적 정세인식이나 주관적 낙관에 빠져 당면한 반미자주통일투쟁에 소흘하게 되었을 때, 미제국주의자들과 일본군국주의자들, 그리고 반통일사대매국세력들이 어떤 자세를 보일 것인가는 6.15공동선언 이후의 지난 기간 동안 너무나 생생하게 체험해 온 바대로 입니다.
하옇든, 국제정세의 변동을 우리가 일상적으로 확보하기는 힘든 여러가지 자료들을 파악, 동원하여 연결, 분석하고 있는 강진욱 기자의 노력은 나름대로 평가되어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정세분석에 참고 되시기 바랍니다.
냉전해체작업 재가동할 북일회담
미국과의 치밀한 사전조율- "우려도 없지 않아"
강진욱 연합뉴스 기자
고이즈미 일본 총리가 다시 평양을 방문한다. 일본 총리로는 처음으로 평양을 방문해 역사적인 '조-일 평양선언'을 발표한지 불과 1년8개월 만이다. 납치문제와 함께 핵-미사일 문제 등을 포괄적으로 논의할 것이라 한다. 미국의 대북적대공조의 한 축을 이루고 있는 일본의 총리대신이 똑같은 현안을 갖고 1년8개월만에 평양에 다시 가는 것은 결코 예삿일이 아니다. 2002년 9월 그가 평양을 찾을 때 세상 사람들은 그것을 역사적 사건이라 했다. 조선은 일본으로부터 식민지배 청산과 국교정상화의 약속을 받아냈다. 그러나 고이즈미 방북 보름 뒤 미 대통령 특사가 평양에 다녀와 '북한 핵 개발 시인 - 북한 제네바합의 위반' 주장을 퍼뜨림으로써 일본 총리 방북은 결실을 맺지 못했다. 그러나 조선은 지금 그 결실을 따내려 하고 있다. 그동안 미국의 갖은 방해 공작으로 올스톱 됐던 한반도 냉전체제 해체 작업이 다시 가동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한 편에서는 우려도 없지 않다. 이번에도 또 미국이 그의 재방북 뒤에서 모종의 음모를 꾸미고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1. 고이즈미 재방북은 조-미 외교전의 결과
미국은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 총리의 재방북(5.22 예정)을 7월의 참의원 선거를 앞두고 국민연금 보험료 미납 파문을 잠재우기 위한 '깜짝쇼'로 몰아가고 있다. 미 국제전략연구소(CSIS)의 와타나베 츠네오 선임연구원이 15일 자유아시아방송(RFA)과의 회견에서 참의원 선거와 연금 파문을 고이즈미 재방북의 '두 가지 정치적 요인'이라고 지적한 것이 그 한 예이다. 약화된 정치적 입지를 만회하고 오는 7월 참의원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한 것이라는 주장이 그럴듯해 보인다.
그러나 고이즈미 총리의 재방북은 이미 지난해 7월부터 거론되기 시작해 한 달 전인 지난 4월부터 본격 추진돼 왔다는 점에서 그의 재방북 결정을 4월말 불거진 연금파문 때문이라고 보는 것은 비논리적이다. 앞뒤가 맞지 않는다.(주1)
또 그의 재방북이 단지 조선에 의한 일본인 납치 문제만 다루기 위한 것이라면 고이즈미 총리가 국내 정치적 입지 만회를 노리고 '깜짝쇼'를 벌인다는 주장이 웬만큼 설득력을 얻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의 재방북은 단지 납치문제 만이 아니라 한반도 핵 문제라는 큰 틀 속에서 논의되고 결정됐으며 특히 미국과의 협의를 거쳤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교도통신이 15일 "미 국무부 관리들은 일본이 방북계획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미국과 협의했다고 말했다"고 보도한 것은 이런 배경을 설명해 준다. 고이즈미 총리 자신도 재방북 이유를 설명하며 핵 문제와 미사일 문제 등을 포함한 '포괄적 해결'을 강조하고 있다.
리처드 아미티지(Richard Armitage) 미 국무부 장관이 5월19일 북-일 국교정상화는 북-미간 핵 문제 해결을 전제로 한다고 말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교도(共同)통신에 따르면 아미티지 부장관은 이날 상원 외교위원회 청문회가 끝난 후 기자들에게 "핵 문제 해결도 북-일 국교정상화에 포함된다는 점을 확인했다"고 말했다. 그의 이 말은 또 고이즈미 재방북이 결코 일본의 단독 결정이나 고이즈미의 정치도박이 아니라 핵 공방을 포함한 북-미 적대관계라는 큰 틀 속에서 논의되고 결정됐다는 사실을 뒷받침한다.
고이즈미의 재방북이 처음 공개 거론된 것은 1차 6자회담이 열리기 한 달 전인 2003년 7월이었고 이후 6자회담 논의가 시작될 때면 그의 재방북이 거론되곤 했다. 그의 재방북은 핵 문제를 앞세운 미국의 대북 전술과 밀접하게 연결돼 있었던 것이다. 고이즈미 재방북론이 6자회담과 때맞춰 거론됐다는 것은 결국 북-일 적대관계와 북-미 핵 대결이 한 축으로 연결돼 있음을 말해준다.(주2)
6자회담은 미국과 조선 사이의 적대적 관계에서 비롯된 핵 문제를 논의하는 자리이며 언제나 조-미 대결 구도로 회담이 진행된다는 점에 비춰볼 때 고이즈미 재방북 결정은 결국 미국과 조선 사이의 밀고 당기는 치열한 외교전에 의한 산물임을 알 수 있다.
그러면 고이즈미 방북을 요구한 것은 어느 쪽일까? 두 말 할 것도 없이 고이즈미의 재방북을 요구한 쪽은 조선이다. 미국은 이를 마지못해 수락한 것이다. 1년 8개월 전 고이즈미 방북 성과인 식민지청산과 조-일 국교교섭 합의가 미국의 일방적 '북 핵 시비'에 의해 파탄의 위기에 빠졌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론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그의 재방북 논의가 진행돼 온 과정을 돌아보면 일본 정부 또는 고이즈미 총리 자신은 1년 8개월만에 평양에 다시 가야한다는데 대해 대단히 불쾌해했음을 알 수 있다. 적대관계를 청산하지 못한 두 나라 사이에서 한 편의 국가수반이 이처럼 짧은 기간에 상대 국가를 연거푸 방문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주3)
2003년 7월6일 니혼게이자이(日本經濟)신문은 교착상태에 빠진 납치문제와 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이즈미 총리가 재방북하는 문제를 미국 등 관계국과 물밑 교섭중이라고 보도했을 때 고이즈미 총리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주4)
3개월 뒤인 2003년 10월, 가족들을 평양에 남겨 둔 채 일본에 귀국한 납치 피해자 지무라 야스시(地村保志.48)씨가 기자회견을 갖고 가족 송환을 위한 고이즈미 총리 재방북을 요청했을 때나 2004년 1월 2차 6자회담을 앞둔 시점에서 고이즈미 총리의 재방북이 다시 거론됐을 때도 고이즈미 정부의 반응은 시큰둥했다.(주5)
4월1일에는 자민당의 야마자키 다쿠(山崎拓) 전 부총재가 같은 당 소속 히라사와 가쓰에이(平澤勝榮) 총무성 정무관 겸 '납치구출행동의원연맹' 사무국장과 함께 비밀리에 중국 다롄(大連)을 방문, 조선 외교 당국자들과 납치문제를 협의했을 때 고이즈미 총리는 자신의 사전 승인 없이 북측과 회담이 진행되는데 대해 격노했고 이에 히라사와 의원은 귀국 직후 총무성 정무관직을 내놔야 했다.
고이즈미 개인이나 일본 정부의 입장을 태도로 미뤄볼 때 고이즈미의 재방북은 결코 개인적 또는 독자적 결정이 아니었던 것이다. 2월말 2차 6자회담 이후 관련국들의 움직임을 살펴보면 고이즈미 총리의 재방북은 결국 한반도 정세의 기본 틀인 북-미 대결구도를 배경으로 미-일간 대북 적대 공조의 틀 속에서 논의되고 결정됐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2차 6자회담(2.25-27)이 끝나자마자 곧바로 북-일 협상을 위한 움직임이 시작됐다.
고이즈미 총리가 3월1일 야부나카 미토지(藪中三十二) 6자회담 수석대표로부터 회담 결과를 보고 받은 뒤 납치문제 등을 해결하기 위해 북-일 정부간 협상을 3월 말 개최하겠다는 뜻을 밝힌 것이다.
2월말 6자회담은 북-미간 핵 공방전 속에 별 볼일 없이 끝났지만 북-미를 포함한 당사국들은 물밑으로 북-일 협상 추진에 대한 합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일본 총리가 6자회담 직후 북-일 협상 조기 추진 의사를 밝힌 것은 일본이 6자회담에서 납치문제를 논의해야 한다는 입장에서 물러섰음을 의미한다. 이것이 2차 6자회담의 성과였다. 이로써 6자회담과 별도의 북-일 회담의 틀이 마련된 것이다.
일본 총리가 북-일 회담에 나설 뜻을 표시하자 조선은 곧바로 일제 식민지 피해와 과거청산 문제를 강조하기 시작했다. 조선중앙방송은 3월6일 '세기를 이어 계속되는 일본 반동들의 악랄한 책동'이란 제목의 보도물을 통해 일본이 아직도 과거를 반성하지 않고 있다면서 "우리 겨레는 일제에 대한 사무치는 원한과 분노에 치를 떨며 그 죄악을 결산할 의지를 가다듬고 있다"고 지적했다.(주6)
조선은 6자회담에서 북-일 협상 추진 문제를 매듭지은 뒤 일본 총리가 이를 확인하자마자 벼르고 벼르던 과거청산을 촉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미국이 가로막은 일본의 과거청산과 국교정상화 프로세스가 다시 가동되기 위해서는 먼저 해결해야 할 과제가 있었다. 바로 미국의 배후조정과 일본 극우세력의 준동에 의해 해결의 기회를 상실한 일본인 납치 피해자 가족들의 귀국 문제였다.(주7)
북-일 양측은 이미 2003년 8월 1차 6자회담 직후부터 이 문제를 매듭짓기 위한 접촉을 갖고 있었다. 이 접촉에서 조선 측은 피해자들이 일시 일본에 귀국했다 평양에 돌아와 가족들과 함께 일본에 영주 귀국하기로 한 당초 합의를 일본이 깨고 일시귀국자들의 평양 귀환을 막은 데 대해 '일본의 고위 당국자'가 조선을 방문해 정중히 사과할 것을 요구했다고 일본 매체들은 보도했다.
일본은 이를 "북한의 체면을 살려주는 조치" 정도로 평가절하하면서 외무부 관리들을 평양에 보내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2차6자회담 한 달 여 전인 2004년 1월11∼13일 다나카 히토시(田中均) 외무성 외무심의관 등 일본 정부 관계자 5명이 평양을 방문한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후 무려 4개월간의 밀고 당기는 협의 끝에 고이즈미 재방북이 결정된 것을 보면 북측이 요구한 '고위 당국자 방북'이란 일본 총리의 재방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일본은 총리의 재방북 요구를 어쩔 수 없이 수락한 것이다.
2차 6자회담 직후 일본 총리가 북-일 협상 조기 재개의 뜻을 밝히고 조선이 '일본의 과거청산' 목소리를 높이는 상황에서 주변국들의 움직임이 긴박해진다. : △조지프 디트라니(Joseph DiTrani) 미국 국무부 한반도 담당 대사(2004년 5월12일 6자회담 실무그룹회의 미국측 수석대표)와 박길연 유엔주재 조선 대사가 3월 중순 뉴욕에서 비공식 회동, 핵 문제 등을 협의.(주8) △ 리자오싱(李肇星) 중국 외교부장이 3월23일 조선을 방문, 6자회담의 조기 개최를 위한 협력 방안과 양측 현안을 논의한다고 쿵취앤(孔泉) 중국 외교부 대변인이 발표(3월18일) △조선 외무성 대변인은 "핵 억제력을 질량적으로 강화할 것"이라는 담화를 발표(3월19일)(주9) △ 미국, 부통령 체니의 일본 방문 계획 발표(3월19일) △가와구치 요리코(川口順子) 일본 외상은 조선을 테러지원국으로 지정하는데 있어서 '납치문제'도 추가해 주도록 미국에 요청했다고 발표.(3월23일)(주10)
북-미간 비공식 회동이 이뤄지면서 중국 외교부장의 방북 계획이 발표되고 곧바로 미 부통령의 일-중-한 3국 순방 계획이 공개됐음을 알 수 있다.
역시 체니의 일본 방문 일정이 발표되기 하루 전날인 3월18일 미 핵심권력의 의도를 가장 잘 반영하는 뉴욕타임스(NYT)가 "북한 핵 문제와 관련해 시간이 급한 것은 미국 쪽이며 따라서 미국은 외교적, 경제적 유인책을 통한 해결책 마련에 긴급하게 나서야 한다"고 보도한 것도 주목할 만 하다.
이 신문은 18일자 사설에서 "북한이 모든 핵무기 개발 프로그램을 검증가능한 방법으로 폐기할 경우 얻게 될 외교적, 경제적 조치들에 대해 미국이 밝히지 않는 한 진정한 진전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은 모든 회담 참가국들이 알고 있다"며 "북한의 핵 폐기가 선행돼야 구체적인 유인책이 언급될 수 있을 것이라는 미국의 주장은 비현실적"이라고 비판했다.(NYT "북 핵 문제 촉박, 유인책 제공해야" 2004.3.19 연합뉴스)
체니의 방북 계획 발표와 조선 외무성 대변인의 핵 억제력 강화 방침 발표, 뉴욕타임스의 대북 타협책 촉구는 모두 고이즈미 재방북 결정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돼 있다.(주11)
이 즈음 조선 측은 북-일 정부간 협상이 양국간 근본문제 즉, 식민지배 청산을 위한 것이어야 함을 강조하기 시작한다. 일본 총리가 북-일 협상 재개 의지를 표시한 이후 이 협상을 납치 피해자 가족들의 일본 귀환 문제로 몰아가려는 분위기가 흐르자 조선이 쐐기를 박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일본 총련 기관지 조선신보는 3월23일자에서 "일본이 적대정책을 지속하는 한 조선 측은 대화재개에 적극 나서지 않을 공산이 크다"고 논평했다. 이 신문은 제2차 6자회담 이후 일각에서 북-일 정부간 회담 재개 가능성을 말하고 있지만 조선 측은 '과거청산 없이 국교정상화는 없고 적대와 대화는 양립될 수 없다'는 원칙을 견지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조선신보는 "지금 조선은 어떤 '양보'를 준비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일본이 종래의 적대자세를 철회할 용의가 있는가 아닌가를 냉정하게 가늠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조선신보 보도는 리자오싱 중국 외교부장의 평양 방문 날짜에 때맞춰 나온 것이었다. 그리고 같은 날인 3월23일 가와구치 일본 외상은 조선을 테러지원국으로 지정하는 이유로 '납치문제'를 추가해 줄 것을 미국에 요청했다고 밝힌다.
납치문제를 테러지원국 재지정 이유로 내세우는 미-일의 움직임은 미-일의 대북적대공조체제를 강화하는 모양새를 띠지만 조-미 관계와 조-일 관계를 동시에 풀기 위한 수순이라고도 볼 수 있다. 조선의 대화 압력에 밀려 미국이 어쩔 수 없이 북-일 관계정상화를 용인하고 남북간 교류협력 관계 개선을 허용해야 한다면 먼저 일본인 납치 문제를 풀고 테러지원국 명단을 삭제하는 조치를 취해야 하기 때문이다.
미국과 일본이 북-일 관계와 북-미 관계를 한 축으로 엮어 놓는 작업을 진행하는 가운데 중국 외교부장은 평양에서 북측과 6자회담 및 실무그룹회의를 예정대로 추진하기로 합의한다. 6자회담과 북-일 회담이 동시에, 별도로 진행되면서 일본이 주장하는 납치 문제와 미국이 주장하는 핵 문제가 동시에 풀릴 수 있는 틀이 마련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2. 북-미-일 3각협의와 고이즈미 재방북
4월로 접어들면서 북-일 대화 재개를 위한 발걸음이 빨라진다.
4월1일 비밀리에 중국 다롄(大連)을 방문해 북측과 접촉한 일본 자민당의 야마자키 다쿠 전 부총재가 일본과 북한 정부간 대화가 조만간 재개될 것으로 보인다고 2일 밝힌 것이다.
북-일 양국이 중국에서 비밀 접촉을 갖던 시각 6자회담 실무그룹회의 미국 측 대표를 맡게 될 디트라니 미 국무부 한반도 담당대사도 베이징에 있었다. 그는 왕이(王毅) 중국 외교부 부부장과 만나 3차 6자회담 개최 문제를 논의한 것으로 보도됐지만 그가 북-일 접촉을 모른 체 했을 리 없다. 일본의 대북 접촉은 사실상 미국의 양해하에 이뤄졌다고 봐야 한다. 일본 뒤에는 미국이 있었던 것이고 사실상 북-미간 외교전 속에 북-일 정부간 회담 개최가 확정된 것이다.
북-일 양측이 접촉하는 때, 같은 장소에 미국 측 인사가 있었던 것은 2002년 8월말 고이즈미 방북(9.17)이 결정되던 당시 상황과 똑같다. 그 해 8월 25-26일 평양에서 마철수 조선 외무성 국장과 다나카 히토시(田中均) 일본 외무성 아시아대양주국장이 회담을 열어 고이즈미 방북 문제를 협의했지만 일본 뒤에는 미국이 있었다. 다나카 국장이 평양에서 마 국장과 만나던 시각 파리엘 새이드 미국 국무부 한국과 부과장 등 실무대표단도 평양 모처에 체류하며 북-일 교섭과 별도로 북-일 교섭을 벌였던 것이다.(주12)
당시 미 국무부는 또 국무부 실무진을 평양에 보내 북-일 국장급 회담과 동시에 북측과 회담을 갖도록 했을 뿐 아니라 리처드 아미티지 부장관을 보내 고이즈미 총리와 만나 그의 방북 의제를 조율했다. 일본의 니혼게이자이(日本經濟)신문이 2002년 9월3일자에서 아미티지 부장관이 북-일 외무성 국장급 회담 및 북-미 평양 실무회담 다음날인 8월27일 일본 총리 관저를 방문해 고이즈미 총리와 북-일 정상회담 문제를 집중 논의했다고 보도한 것이 그것이다.
조지프 디트라니 미 대사가 지켜보는 가운데 베이징에서의 북-일 비밀접촉이 진행되는 동안 미국은 조선이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제외되려면 일본인 납치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입장을 발표한다. 코퍼 블랙 미 국무부 테러대책 조정관이 4월1일 의회 증언에서 "납치문제는 북한을 테러 지원국가로 규정하는데 가장 중요한 요인 중 하나"라며 납치문제와 테러지원국 지정 문제를 연계시키는 발언을 한 것이다.(<北-日 > 2004.4.3 연합뉴스)
이어 4월 7-8일 이틀간 한-미-일 3국은 샌프란시스코에서 비공식 북핵정책협의회를 갖고 4월중 북 핵 실무그룹회의를 추진하고 조선의 핵 동결에 대한 '상응조치'를 논의할 수 있다는 입장을 정리한다. 결국 미국은 한-일 양국과 함께 실무그룹회의에서 조선이 요구하는 상응조치를 논의할 수 있다는 입장을 정리함으로써 실무그룹회의 개최의 가닥을 잡은 뒤 일본으로 하여금 대북협상에 나서면서 납치 문제 해결 및 수교교섭 재개의 길을 터준 것이다.
이로부터 이틀 뒤인 4월10일 체니 미 부통령이 일본을 방문하고 13일 고이즈미 총리와 만나 북-일 수교 교섭 6자회담 실무그룹회의 등을 논의했다. 흥미로운 것은 체니의 방일 날짜에맞춰 일본 아사히(朝日)신문이 10일 '복수의 정부소식통'의 말을 인용, 북-일간 협상이 4월중 열릴 전망이라고 보도한 것이다. 체니의 일본 방문이 북-일 협상과 직결돼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주목을 끄는 것은 4월12일 북-미간 공동 유해발굴 작업이 재개됐으며 1996년 미군 유해 발굴작업이 시작된 이후 처음으로 발굴장비가 DMZ를 통해 북측으로 운송됐다는 사실이다. 또 4월13일 해외미군용 잡지인 '성조'(Stars and Stripes)가 비무장지대(DMZ)에서 미군이 유일하게 관할해온 최전방 거점인 '오울렛 초소'(일명 241초소)가 연말까지 한국군에 이양된다고 보도한다.
미국의 이런 일련의 움직임은 일본과 한국의 대북 접근과 마찬가지로 북-미 적대관계가 완화되는 조짐으로 볼 수 있다. 미국을 정점으로 하는 미-일-한 3국의 대북적대공조 생리상 북-미 관계가 악화되면 북-일 관계, 남북관계도 동시에 악화되고 북-미간 긴장완화 조짐이 보일 만 하면 먼저 남북관계와 북-일 관계가 호전되기 시작한다. 미국의 이런 움직임은 북-미간 적대관계의 근본 청산을 추동하는 조선의 외교적 성과이자 자주통일을 염원하는 전민족적 노력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주13)
고이즈미 총리가 자신의 재방북 논의가 시작됐다고 밝힌 4월 중순까지의 정세는 위와 같다.
이후 주요 사건들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중국 방문(4.18-21일) △셀리그 해리슨(Selig Harrison)의 방북(4.20-24) △미 '세계 테러리즘의 유형:2003' 보고서를 발표(4.29) 등이다.
김 위원장 방북은 본격화된 남북경제협력을 기초로 신의주와 단둥을 경유한 대륙진출의 채비를 차리면서 체니 부통령의 일-중-한 순방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었고 해리슨 방북은 지금까지 미국이 조선에 전달한 메시지를 최종 확인하는 과정이었을 것이다. 부시행정부는 해리슨을 평양에 보내 김 위원장이 중국 방문때 거론했다고 전해진 '핵 사찰 동의' 여부를 확인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평양 방문을 마치고 4월24일 베이징에 도착한 해리슨은 조선측이 핵 프로그램의 완전한 해체를 위한 출발점으로 플루토늄 핵 프로그램을 동결할 용의가 있으며 △영변 핵시설 사찰 △추가 재처리 배제 △핵 물질의 제3자 이관 배제를 약속하면서 △미국의 대북 경제제재 해제 △테러지원국 지정 해제를 요구했다고 말했다. 해리슨의 방북은 북-미가 최종적으로 의사를 타진하는 절차였다고 볼 수 있다.
5월 들어 북-일 협상이 시작되면서(5.4) 고이즈미 재방북이 기정사실화된다.
요미우리(讀賣) 신문이 5월4일 재개되는 북-일 협상에서 북측이 납치피해자 가족의 송환을 약속할 경우 고이즈미 총리가 재방북,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정상회담을 갖고 한동안 중단된 국교정상화 교섭을 다시 시작할 용의를 표명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이는 고이즈미 재방북을 전제로 북-일 교섭이 시작됐음을 시사한다.(주14)
고이즈미 재방북 결정 과정에서 주목되는 사건은 일본의 대표적 매파인사이면서 대미 외교라인의 수장 격인 아베 신조(安倍晋三) 자민당 간사장이 4월20일부터 30일까지 무려 10일간 미국을 방문, 부시행정부 핵심 인사들과 두루 만난 것이다. : 『일본에서 차세대 총리후보 1순위로 꼽히는 아베 신조(49) 자민당 간사장이 조지 W.부시 정권의 극진한 환대 속에 워싱턴 외교무대에 데뷔했다. 지난해 9월 간사장 취임 이후 처음으로 미국을 방문한 그는 콜린 파월 국무장관, 도널드 럼스펠드 국방장관, 콘돌리사 라이스 백악관 안보보좌관, 리처드 아미티지 국무부 부장관 등 부시 정권 핵심 인사들과 모두 만나는 극진한 예우를 받았다.』(<"日의 > 2004.5.3. 한국일보)(주15)
고이즈미 총리가 밝힌대로 4월부터 재방북 논의가 시작된 이후 체니 미 부통령의 일-중-한 3국 순방(일본 4.10-13, 중국 4.13-15 한국 4.15-16)에 이어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방중(4.19-21) 및 해리슨의 방북(4.20-24), 아베 간사장 방미(4.20-30) 등을 거치며 고이즈미 재방북이 결정됐고 이에 따라 북-일 협상이 시작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면 5월12일부터 베이징에서 열린 6자회담 실무그룹회의는 무엇인가?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북-미 양측이 서로의 견해차를 확인했을 뿐이라는 이 회의는 도대체 왜 열렸을까? 3자회담과 두 차례 6자회담을 거쳐 미국의 의사를 이미 확인한 조선이 미국의 태도 변화 없이 회담에 나서 시간을 허비했을까? 이 회의가 열리기 바로 직전 일본 신문들이 앞다퉈 '고이즈미 재방북'을 기정사실화한데서 그 해답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은 고이즈미 재방북 카드를 확인받고 이 실무그룹회의에 나선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처럼 조선과 중국, 미국, 일본 사이의 밀고 당기는 외교전 속에 결정된 고이즈미 재방북은 두 말 할 것 없이 그의 1차 방북때 발표된 조-일 평양선언(2002.9.17)을 재확인함으로써 양국이 수교교섭을 재개하고 일본은 대북 경제지원과 동시에 식민지배 청산의 수순을 밟는 길을 열어 놓을 것이다.
이런 북-일 관계 개선 과정은 본격화되고 있는 개성공단 건설과 경의선-동해선 철도 도로 연결 등과 함께 북-미간 적대관계 해소의 가능성을 높임으로써 미-한-일 3국의 대북적대공조를 근간으로 하는 한반도 냉전체제의 틀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올 것으로 기대된다. 결국 미국의 핵 소동으로 중단된 한반도 전쟁상태 종식과 평화체제 정착의 프로세스가 다시 가동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3. 고이즈미 재방북 '경계론'을 경계한다
2002년 8월말 고이즈미 총리의 방북 결정 소식이 전해졌을 때 한반도는 기대와 벅찬 감동의 물결에 휩싸였다. 다음은 어느 보도매체의 논설이다. : 『고이즈미 일본 총리가 북한을 방문해 김정일 위원장과 정상회담을 갖는다는 놀라운 소식이 전해졌다. 일본 총리의 북한 방문으로는 처음이기 때문에 .... 좋은 일도 겹쳐오는지 고이즈미의 방북 소식은 남북경제협력추진위원회에서 경의선.동해선 동시 착공, 개성공단 금년 착공 등 굵직한 합의가 이뤄졌다는 또다른 희소식과 때를 같이해 전해졌다. .... 남북대화, 북-일 대화 과정에서 동시에 일어나고 있는 이러한 상황 발전은 이른바 시너지효과라는 것이 한반도의 긴장완화에도 나타날 수 있다는 기대를 갖게 한다. 한반도 평화를 위한 3대 요소 중 나머지 것인 북-미 관계에서도 같은 진전이 일어나 상승효과가 더욱 높아지기를 기대해 본다. 』
당시 모든 신문과 방송의 논조는 위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실제로 그의 방북은 놀라운 결과물을 낳았다. 조-일 평양선언!! 6.15남북공동선언에 이어 한반도 냉전체제의 또 한 축인 북-일 적대관계를 허물어뜨릴 또 하나의 역사적 문건이었다. 그러나 고이즈미 총리 방북 보름 뒤인 2002년 10월3일 미 대통령 특사가 평양을 방문했고 10월16일 미국이 "북한이 핵 개발을 시인했다"고 떠들기 시작하면서 가슴 벅찬 기대와 희망은 순식간에 절망으로 바뀐다.
고이즈미 방북을 준비하면서부터 우라늄 농축 방식에 의한 북 핵 개발 의혹 증거를 조작했고 고이즈미 방북 후 보름만에 켈리가 평양을 방문해 우라늄 의혹을 앞세워 북측을 압박하면서 "미국의 우려사항을 해소시키지 않으면 남북관계와 북-일 관계가 순조롭지 못할 것"이라고 협박한데 이어 미국에 의한 '북 핵 시비' 이후 고이즈미 방북 성과가 무산될 지경에 처한 상황을 되돌아보면 2002년 9월 고이즈미 방북은 결국 우라늄 핵 개발 시비를 앞세운 미국의 제네바합의 파괴 공작과 무관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로부터 1년7개월여 동안 북-미간 치열한 외교전이 전개됐고 일본은 덩달아 미국의 대북적대정책에 편승하며 조-일 평양선언을 백지화하려 했지만 일본 총리대신이 다시 평양에 가서 평양선언 이행을 약속해야 하는 것이다.
고이즈미 재방북을 앞두고 남북관계도 다시 순조롭게 풀리고 북-일 수교 가능성이 점쳐지는 등 다시 한반도 정세가 2002년 9월의 감격시대로 되돌아가는 느낌도 든다. 그러나 또 미국이 어떤 음모를 꾸미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떨치기 어렵다.
최근 북-미간의 움직임으로 미뤄봐도 미국이 똑같은 속임수를 쓰기는 어려울 것이고 조선 역시 1년7개월만에 똑같은 속임수에 놀아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지난 10여 년의 조-미 관계사를 돌아볼 때 어떻게든 두 나라 사이의 적대관계를 풀고자 하는 조선의 노력은 미 핵심세력의 책동으로 번번히 난관에 부딪혔다. 미국이 대북적대와 대남지배를 통한 한반도 분단체제를 영속화함으로써 제국주의 야욕을 채우기 위해 대북적대 노선을 틀어쥐고 남북간 화해와 통일을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1993년 6.11 조-미공동성명에 이어 1994년 제네바합의(10.21), 2000년 조-미 공동코뮈니케 등은 모두 미국이 조선의 간고한 투쟁에 굴복해 한반도 전쟁상태를 종식시키기로 약조한 역사적 문건들이다. 그러나 부시행정부가 출범하면서 클린턴행정부 시절 이뤄진 한반도 평화와 통일의 프로세스를 모두 뒤엎으려 했고 제네바합의 등은 고사 직전 상태에 있다. 지난 3년여의 정세가 그러했다.
지금 미국이 보이는 행태는 1차 고이즈미 방북 때의 반북 핵 소동 준비 작업을 연상케 하고 있다. 그러나 정도의 차이는 있다. 2002년 8월 고이즈미 방북 결정 때는 미국의 핵 공작이 매우 치밀했다면 2004년 4월의 작업은 이미 거짓으로 드러난 파키스탄 커넥션을 다시 이슈화하는 정도이다. 다만 또다른 제3의 핵 소동을 준비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우선 이 글 첫머리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고이즈미 방북을 연금미납 파문으로 실추된 그의 정치적 입지 만회를 위한 정치도박 또는 '깜짝 쇼'로 몰고 가는 저의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주16) 이는 2002년 9월 1차 방북 때도 그러했다. 또다시 미국이 고이즈미를 '버리는 카드'로 쓰겠다고 마음먹는다면 고이즈미 내각은 7월 참의원 선거에서 참패할 것이고 그의 재방북으로 마련된 한반도 평화의 계기는 또다시 물거품이 될 수 있다.
그의 방북 성과가 미지수라며 미리부터 그의 재방북 의미를 평가절하하는 미-일 선전매체들의 행태 역시 1년7개월 전과 하등 다를 것이 없다. 미국 신문 워싱턴포스트는 2004년 5월15일자에서 "오는 22일 북한을 재방문하는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 총리가 북한 김정일(金正日) 국방위원장에게 너무 많이 주는 경우 뿐 아니라 너무 많이 얻어내도 조지 부시 미 행정부의 북한 고립 전략에 불리하게 작용할 것이라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그러면서 이 신문은 소위 '전문가들'의 말이라며 "고이즈미 총리가 이번에 피랍자 가족의 송환을 위해 북한에 너무 달콤한 재정지원을 약속한 것으로 비춰지거나, 북한 핵 문제에서 아무런 진전을 거두지 못할 경우 국내외에서 이미지에 손상을 입을 것"이라고 엄포를 놨다. 고이즈미 재방북이 결코 한반도 냉전체제 해체로 이어지지 못하도록 하려는 미 핵심세력의 저의를 엿볼 수 있다.
2002년을 돌아본다. 한국계이면서 부시행정부내 극우 매파들보다 한 발 앞서 김정일 체제 전복(regime change) 및 해상봉쇄(naval blockade)를 주창해 온 조지타운대 교수 빅터 차(Victor Cha)는 2002년 9월6일 로스앤젤레스타임스(LAT)에 보낸 '고이즈미의 대조선 도박(Koizumi's North Korea Risk)'이란 글에서 고이즈미 총리로서는 평양에서 실질적인 어떤 성과를 갖고 도쿄로 돌아와야 하지만 "당장 가까운 장래(in the offing)에 중요한 미사일 합의가 이뤄질 것 같지는 않다"고 예언했다.
조-일 정상회담과 평양선언은 그의 이런 전망을 여지없이 깨뜨렸지만 그의 글은 결과적으로 북-일 회담 성과를 무효화시키겠다는 부시행정부의 '자기충족적 예언' 이었다. 실제로 지난 1년8개월간 평양선언은 이행되지 못했다. 고이즈미 재방북을 앞두고 쏟아지는 악담과 비야냥이 자기충족적 예언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고이즈미 총리 방북을 준비하면서 '북 핵 의혹'을 퍼뜨리는 것도 2002년 9월 때와 비슷하다.
미 군산복합체의 대표적 선전매체인 뉴욕타임스는 체니 부통령이 일본을 경유해 중국에 도착하기 하루 전날인 4월12일 파키스탄 핵 전문가인 압둘 카디르 칸 박사의 북 핵 장치 목격설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핵 기술 밀매혐의를 받고 있는 칸 박사가 5년 전 조선을 방문했을 때 비밀 지하 핵 시설에서 3개의 핵 장치를 직접 목격했다고 진술했다는 것이다.
신문 본지가 아닌 인터넷판이었고 소스(source)를 '아시아와 미국 관리들'이라고 애매하게 처리하는 등 애초부터 신뢰할 수 없는 보도였다.(주17)
미국은 이런 거짓 정보를 한국과 일본 정부에도 전달한 것으로 보인다. 2002년 8월 고이즈미 방북을 준비하면서 뒤로 우라늄 농축 핵 개발설을 한-일 양국에 전달했던 것처럼 고이즈미 재방북을 배후 조정하면서 똑같은 짓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주18)
북-일 관계와는 조금 동떨어진 것이기는 하지만 일본 신문들이 5월19일 일제히 일본 내 테러범 체류 사실을 대서특필함으로써 일본 내 대형 테러 가능성을 상기시킨 것도 간과할 수 없다. 9.11 사건을 시작으로 미국이 소위 전쟁분위기를 고조시킴으로써 대북 압력이 가중되고 주한미군 무력 증강에 따라 남북이 대결 국면에 빠졌듯이 일본 내 대형 테러 사건이 발생할 경우 고이즈미 재방북의 성과가 다시 물거품이 될 수도 있다. 또 한-미-일 3국간 대북적대공조체제가 강화되면서 남북간 군사적 긴장이 높아질 수도 있다.(주19)
그러나 좋은 조짐도 있다. 일본이 이번에는 정말로 평양선언을 이행할 듯한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우선 일본이 북-일 수교 교섭을 시작할 준비를 갖추고 있다. 니혼게이자이 (日本經濟)신문은 5월16일 인터넷판에서 일본 정부 소식통의 말을 인용, 일본 정부는 고이즈미 총리의 재방북 때 일본인 납치피해자 5명의 잔류가족 송환이 이뤄질 경우 6월중 국교 정상화 교섭을 재개하기 위한 준비 작업에 착수했다고 보도했다.
고이즈미 총리가 김 위원장과의 2차 정상회담에서 대북 송금 저지를 겨냥한 외환관리법 등 경제제재법을 발동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표명할 것이라는 보도도 있다. 마이니치(每日) 신문은 5월18일자에서 고이즈미 총리가 이들 대북제제 관련법의 '조건부 발동정지'를 표명함으로써 피랍 일본인의 잔류 가족 귀국과 핵 및 미사일 문제 등에서 포괄적 양보를 요구할 방침이라고 전했다.(주20)
모리스 스트롱(Morris Strong) 유엔 사무총장 특사 일행이 5월18일 평양을 방문한 것도 2월말 2차 6자회담을 전후해 본격 거론되기 시작한 대북 에너지 지원에 대한 기대감을 불러일으킨다. 유엔의 대북 에너지 지원 프로젝트는 일본의 대북 수교교섭에 따를 경제지원과 맞물려 있는 사업으로 스트롱 특사가 평양에 간 날 일본 정부 관계자들이 고이즈미 총리 재방북 선발대로 평양에 들어왔다는 점에서 특히 주목된다.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은 2차 6자회담(2.25-27) 직후인 3월2일 성명을 통해 "회담에서 한반도 비핵화를 향한 괄목할 만한 진전이 이뤄졌다"며 "스트롱 특사가 국제적 지원 노력을 조직화하는 방안에 관해 당사국들과 협력해갈 것"이라고 밝혔고 이틀 뒤인 3월4일 스트롱 특사는 일본 NHK와의 인터뷰에서 "북핵 문제가 해결되면 북한의 에너지난 해소를 위해 천연가스 파이프라인(PNG) 건설도 검토될 가능성이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이에 앞서 정세현(丁世鉉) 통일부 장관은 2차 6자회담 기간인 2월26일 중유 공급 등 대북 에너지 지원과 관련, "시작을 하자는 정도까지는 얘기가 돼 있지만 핵 동결에서 폐기로 가는 시간표가 나와야 한다"고 말해 3-4월중 개최될 예정인 6자회담 실무그룹회의가 주목을 받기도 했다.
조선은 지난해 12월9일 미국에 대해 핵 프로그램 동결을 시작으로 하는 '1단계 동시행동조치'를 제의하면서 △정치 군사 경제적 제재 해제 및 봉쇄 철회 △테러지원국 명단 삭제 △중유 등 에너지 지원 등을 요구한 바 있고 지난 5월12일 실무그룹회의에서 '동결 대 보상' 원칙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는 점에서 유엔 특사 방북이 대북 에너지 지원으로 이어지고 이를 통해 북-미 대타협의 물꼬가 트일 가능성이 있다.
또 미국이 중단시킨 경수로 건설이 재개될 것이라는 보도도 나오고 있다. 미국 신문 워싱턴타임스는 19일자에서 지난 12일 베이징 열린 6자회담 실무그룹회의에서 리 근 북측 수석대표가 미국 측에게 경수로 건설 재개를 제의했고 디트라니 미국측 수석대표는 "경수로 사업 재개는 북이 핵을 포기할 경우 미국이 취할 수 있는 조치의 한 요소"라고 대답했다는 것이다.(<北, >2004.5.19. 중앙일보)
또 요미우리(讀賣)신문이 5월19일 정부와 여당 간부의 말을 인용해 고이즈미 총리는 22일 열릴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과의 2차 정상회담에서 납치문제와 핵 문제 해결을 전제로 임기(2006년 9월까지)중 국교정상화 의지를 표명할 방침이라고 보도한 것도 일말의 기대감을 갖게 한다.
7월 참의원 선거 등으로 고이즈미 총리가 계속 위기에 몰릴 수도 있다는 점에서 '고이즈미 재임중'이라는 단서는 2002년 9월 그랬던 것처럼 이번 고이즈미 재방북을 대북 핵 협상 지연을 위한 시간벌기용 카드로 활용하려는 의도를 반영한 것일 수도 있지만 앞서 논의했던 대로 △일본인 납치 문제 해결과 대북 경제 지원 --> △핵 동결과 테러지원국 명단 삭제 --> △NPT(핵무기비확산조약) 의무 이행(북)과 경수로 건설을 포함한 제네바합의 이행(미) 등 북-미-일 3국간 단계적 동시행동을 예고하는 것으로도 보인다.
더 좋은 징조도 있다. 주한미군 철수론이 고개를 들고 있는 것이다.(주21) 1990년 4월의 주한미군 3단계 철수 계획을 무효화시키기 위해 북 핵을 시비했고 곧이어 출범한 클린턴행정부가 북-미 핵 대치 상황을 조장함으로써 한반도는 일촉즉발의 전쟁 위기에 몰렸었다.
클린턴행정부 2기 8년에 걸친 북-미 대결사가 2000년 6.15남북공동선언과 조-미 공동코뮈니케(10.12)에 이어 클린턴 미 합중국 대통령의 평양 방문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리려 할 때 조지 W.부시를 앞세운 일단의 극우세력은 클린턴행정부의 대북 접근 프로세스를 뒤엎으려 했고 그래서 나온 것이 바로 우라늄 농축 방식에 의한 북한의 핵 개발 시나리오였다. 흔히들 말하는 '북 핵 문제' 또는 북-미 핵 공방전은 미국의 대북적대정책에서 출발한 미국에 의한 '북 핵 시비'에 지나지 않는다.
조-미 공동코뮈니케에 명시된 '한반도 전쟁상태의 완전 종식'은 조-미 적대관계의 청산으로 완결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미국이 북 핵 개발 프로그램을 완전히 제거하기 위해서는 대북적대정책의 전위인 주한미군을 철수 또는 감축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논리적 귀결이다.
1992년 주한미군 3단계 철수론을 무효화시킨 실세들 가운데는 폴 월포위츠(Paul Wolfowitz) 미 국방부 부장관이 포함돼 있다. 그가 5월18일 청문회에서 주한미군 감축이 불가피하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주한미군 완전철수론이 거론되고 있다.
아직 안심할 수는 없지만 우리 민족이 추동하는 평화통일 프로세스가 다시 가동되는 듯하다. 핵전쟁도 불사하겠다고 덤벼드는 클린턴행정부를 다독여 조-미 공동코뮈니케(2000.10.12)를 이끌어내는데 8년이 걸렸다. 이 클린턴 방식을 송두리째 뒤엎고 원점에서 시작하겠다고 호언하며 조선을 공박하던 부시행정부는 4년만에 고개를 숙이고 있다. (2004.5.20 작성)
<주석>
(1) 고이즈미 총리는 5월14일 정부 여당 연락회의에서 "한 달 전부터 조정을 계속해온 끝에 합의에 도달했다"고 밝힌 바 있다.
(2) 또 북-미 관계와 북-일 관계는 남북관계와도 직결돼 있다. 미 대통령 특사의 방북을 계기로 북-일 평양선언 이행이 시작부터 암초에 부딪혔을 뿐 아니라 경의선 연결공사와 금강산 육로관광 추진이 제동이 걸렸던 것이다.
(3) 더구나 북-일 정상회담은 일본이 조선에 식민지 과거사를 사죄하고 보상을 약속하는 모양새를 띄고 있다. 미국의 농간이 아니었다면 그의 평양행은 한 번으로 족했을 것이다.
(4) 그러나 당시 후쿠다 야스오 관방장관은 상황이 달라지면 "고려해 볼 수 있는 일"이라는 묘한 반응을 보인 바 있다. 일본 총리대신의 의중과 무관하게 미-일 외교라인에서는 고이즈미 재방북 카드가 거론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5) 2004년 1월 후쿠다 관방장관은 한 회견에서 고이즈미 총리 재방북 가능성을 묻는 질문에 "고이즈미 총리가 북한을 갔다왔기 때문에 외교관례대로라면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왔으면 한다. 그런 기대와 희망이 있다"고 답변했다. 그러나 그는 "어떻게든 납치문제를 해결하고 싶고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진지하게 임할 것"이라며 "여러 가지 대화 등 움직임이 있다"고 밝혔다.
(6) 3월4일에는 재일조선인총연합회 기관지 조선신보가 평양발 기사에서 "조선이 일본의 과거청산 문제와 관련한 원칙적 입장을 더욱 강력하게 주장해 나갈 것으로 보인다"며 강제연행 피해 보상 문제가 북-일 회담 의제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조선신보는 특히 "조-일 평양선언(2002.9.17)에서 일본측은 과거 식민지지배에 대한 반성과 사죄의 뜻을 표명하고 국교정상화 후에 조선에 대한 경제협력을 실시할 데 대하여 확약했다"고 보도, 이 달 열릴 북-일 정부간 회담이 북-일 평양선언 이행을 위한 회담임을 강조했다.
(7) 1970-80년대 자행된 조선에 의한 일본인 납치 사건은 2002년 9월 고이즈미 방북 때부터 해결의 수순을 밟아 왔다. 그 해 10월 1-2주 일정으로, '일시귀국자' 신분으로 일본에 일시 귀국한 납치 피해자 5명의 평양 귀환을 일본 정부가 가로막으면서 문제 해결 절차가 중단됐을 뿐이다. 이후에도 이 문제를 '납치문제'라고 지칭하는 것은 잘못이다.
(8) (도쿄신문 4월5일 보도) 조지프 디트라니 대사와 박길연 대사가 무슨 이야기를 주고받았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2차 6자회담에서 합의한 6개국 실무그룹회의 추진과 그에 필요한 북-일 협상 선행문제를 논의했을 가능성이 있으나 조선 외무성 대변인이 "핵 억제력 질량적 강화"를 선언한 것이나 곧바로 리자오싱 중국 외교부장의 방북 일정이 발표된 것으로 미뤄 북-미간 비공식 대화는 서로간의 이견을 확인하는 선에서 그쳤을 공산이 크다.
(9) 조선 외무성 대변인의 담화(3.19)는 2차 6자회담 직후 북-일 정부간 협상을 위시한 6자회담 참가국들의 움직임을 추동하는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담화에서 "미국이 시간을 끌면서 핵 문제 해결을 미루고 군사적 위협을 강화할수록 그에 대응할 핵 억제력도 정비례하여 질량적으로 강화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조선의 핵 억제력 강화 조치는 미국을 대화테이블로 끌어들이는 주요한 요인이었다. 2003년 4월 3자회담이 열리기 직전 조선은 폐연료봉 재처리를 시작하면서 핵 억제력 강화 방침을 잇따라 표명했으며 이를 미국에 정식으로 통보했다. 2월말 CNN은 폐연료봉 재처리 징후를 대서특필하기도 했다. 2003년 8월말 1차 6자회담 역시 그 해 6월말 폐연료봉 재처리 작업이 완료됐음을 미국에 통보한 직후의 일이다. 조선은 2003년 10월부터 "폐연료봉의 용도 변경"(10.1), "핵 억제력의 물리적 공개"(10.16), "핵 억제력의 실물 증명"(10.18) 의사를 잇따라 표명함으로써 부시 미 대통령으로부터 서면안전보장 의사 표시를 이끌어냈고(10.20) 닷새 뒤인 10월25일 조선은 "부시 미 대통령의 서면불가침담보 고려 용의" 의사를 표시하면서 북-미 관계를 대화 국면으로 안착시켰다. 이후 조선은 그 해 12월부터 '1단계 동시행동 조치'(12.9)를 제안하는 등 미국을 협상테이블로 끌어다 앉히기 위한 지난한 노력을 기울이는 한편 2004년 1월 6-10일 미 스탠퍼드대학 존 루이스(John Lewis) 교수와 로스알라모스 국립핵연구소 지그프리드 헥커(Sigfried Hecker) 수석연구원(전 소장) 등 미국 핵 전문가들의 영변 방문을 통해 '핵 억제력'을 실증함으로써 미국에게 대화냐 대결이냐의 선택을 요구하기도 했다. 미국 측은 2004년 1월7일 `북한의 전향적 태도 변화'를 높이 평가한다는 반응을 보였고 콜린 파월 미 국무장관은 연 이틀 북측의 입장을 "새롭다" "진전됐다"고 애써 강조했다. 미국은 이어 9일부터는 "조선이 핵 동결 성명을 발표하면 미국이 안전보장성명을 발표할 수 있다"면서 조선 측이 지난해 6자회담 이후 강조해 온 '말 대 말 공약'에 응할 뜻을 밝히기도 했다. 2004년 2월 2차 6자회담은 이렇게 열린 것이다. : 필자 글 <이제 > 2004.1.10 www.chammalo.com
(10) 미 국무부는 4월29일 '세계테러리즘의 유형: 2003'이라는 연례보고서를 통해 조선 등 7개국을 테러지원국으로 재지정했다. 또 가와구치 일본 외상이 조선의 테러지원국 지정을 요구했을 당시 미국의 짐 리치(공화 아이오와주) 하원 국제관계위 아시아태평양소위원장 등은 '2004 북한인권법안(North Korean Human Rights Act of 2004)'을 하원에 상정했다.(3.23)
(11) 미국의 입장에서 보면 고이즈미 방북은 일종의 대북 협상 카드의 하나이다. 식민지배 배상 또는 경제 지원 명목으로 많게는 수 백억 달러가 오가는 엄청난 거래로서 미국은 북-일 수교교섭 및 일본의 대북 경제지원을 가로막음으로써 조선으로 하여금 핵사찰 또는 핵 포기 약속을 받아낼 수 있다고 여기고 있는 것이다.
(12) 통일학연구소 한호석 소장 글「조-일 정상회담의 추진 배경과 조-일 평양선언의 역사적 의의」,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 기관지 <민> 2002년 10월호(http://onekorea.org). 한 소장은 이 삼각 연쇄회동 때 미국은 북-미 정상 회담을 재개하기 앞서 북-일 정상회담을 추진한다는 뜻을 북측에 전달했다고 밝혔다.
(13) 이 즈음 남북관계가 해빙을 보이는 조짐으로는 정세현 통일부장관이 4월14일 국방대학교에서 열린 '한국의 통일정책' 특강에서 "정부와 민간이 참여하는 대북지원정책협의회를 구성, 지원에 차질이 없도록 하겠다"고 밝힌 것이나 개성공단 건설의 당사자인 김진호 한국토지공사 사장이 같은 날 "미국도 개성공단 사업의 성공을 위해 적극적인 지원을 약속했다"고 말한 사실들을 들 수 있다. 이런 발언들은 한국토지공사와 현대아산이 4월7일 개성공단 1단계 100만평의 임차료와 지장물 철거비용을 총 1천600만 달러(한화 183억원)로 북측과 합의한데 따른 것이지만 개성공단 건설의 주요 장애인 미국의 견제와 방해가 줄어든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 모두 체니 미 부통령이 일본, 중국에 이어 한국을 방문하기 하루 전날 쏟아진 발언들이다.
(14) 5월9일 산케이(産經) 신문은 '정부 고위관계자'의 말을 인용, 고이즈미 총리가 23일께 조선을 방문해 피랍 일본인의 잔류가족을 데려오는 방안이 추진되고 있다고 보도한다. 이 신문은 또 고이즈미 총리의 맹우(盟友)인 야마자키 다(山崎拓) 전 자민당 부총재가 4월초 중국 다롄(大連)에서 북한측 인사와 접촉한 후 비밀리에 조-일 수교 재개 절차 등을 담은 합의 문서를 작성해 온 것으로 밝혀졌다고 전했다. 고이즈미 재방북 및 수교교섭 재개는 곧 일본이 - 미국의 사주에 의해 파기하려했던 - 평양선언(2002.9.17)의 이행을 약속하는 의미를 지닌다. 니혼게이자이(日經) 신문도 같은 날 고이즈미 총리가 5월 4-5일 베이징(北京)에서 북한측과 협상하고 돌아온 다나카 히토시(田中均) 외무성 심의관에게 "방북 절차를 준비하라"고 지시했다면서 "북한이 체면과 실리를 모두 요구하고 있다"고 전했다.
(15) 한국일보는 '일본의 네오콘' '신국방족' 등으로 불리는 아베 간사장이 미국 방문 중 기자회견 때마다 "일본과 미국은 지금 가장 좋은 관계로 황금시대"라고 강조했으며 라이스 보좌관은 "그가 마음에 든다"며 "그는 터프하다"고 만족을 표시했다고 전했다. 아베는 특히 공화당 싱크탱크로 네오콘(neocon. 부시행정부내 극우 매파를 일컫는 '신보수주의자')의 산실인 아메리칸 엔터프라이즈 공공정책연구소(AEI)에서 '진화하는 미일관계'라는 제목으로 행한 영어 강연에서 미-일 동맹 강화를 위한 일본의 헌법개정을 역설했다고 한다.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인정하지 않는 현행 헌법 해석은 한계에 와 있다"며 "총선거에서 호헌세력이 쇠퇴한 결과 개헌이 현실문제로 논의되기에 이르렀다"고 밝히고 "일본에서는 안보에 대해 건설적 논의를 하는 사람이 매파로 불린다"며 "국익을 위해 진지한 논의를 하는 사람을 그렇게 부른다면 나를 매파로 불러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는 또 이라크 문제에 대해서도 "사담 후세인이 대량살상무기를 갖고 있다고 의심한 것은 지극히 합리적이었다"며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의 이라크전쟁 지지는 국익상 당연한 것"이라고 아낌없는 미국 지지를 표명했고 그의 강연을 들은 폴 지알러 전 국방부 일본부장은 "그와 같은 사람이 장래 총리로서 일본 헌법개정에 진력하기를 기대하고 있다"고 거들었다.
(16) 고이즈미 재방북 '결단'을 국민연금 미납 파문을 가라앉히기 위한 깜짝 쇼라는 주장을 한 꺼풀 벗겨보면 국민연금 미납 파문은 평양 재방문을 한사코 마다하는 고이즈미 총리로 하여금 이를 수락하게 만들기 위한 여론공작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4월26일로 만 3년이 되는 고이즈미 내각에 대한 지지도는 당시 역대 최고 수준을 구가하고 있었다. 아사히(朝日) 신문이 4월17-18일 이틀간 전국 유권자 1천964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 의하면 지지율은 50%로 1951년 요시다(吉田) 내각(58%)에 이어 두 번째로 높았다. 그런데 내각 출범 3주년을 사흘 앞둔 4월23일 나카가와 쇼이치(中川昭一) 경제산업상과 아소 다로(麻生太郞) 총무상, 이시바 시게루(石破茂) 방위청 장관이 일정 기간 국민연금 보험료를 납부하지 않은데 대해 대국민 사과 회견을 가졌다. 이에 대해 고이즈미 총리가 "앞으로 바로잡으면 될 것"이라며 "모두가 깜빡 잊고 (가족에게) 맡겨놓은 것 아니겠는가"라며 문제삼지 않을 방침임을 시사했듯이 연금 미납 사건은 어떤 부패나 뇌물 수수 등 정치적으로 문제가 될 만한 사건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 사건이 일파만파 확대된다. 미디어를 통한 여론몰이 때문이었다. 이 파문으로 정치적 위기를 겪는 정치인 가운데는 간 나오토(菅直人) 민주당 총재가 있다. 그는 고이즈미 정부가 부시행정부를 맹종하는 것을 빗대 '금붕어 꽁무니에 붙어 있는 똥'에 비유할 정도로 신랄한 언사를 마다 않는 자주파 인사였다. 최근에도 그는 고이즈미 정부가 이라크 전쟁에 따라나선 것을 매섭게 비판했다. 그는 대국민사과에 나선 자민당 인사 3명을 `미납 3형제'라고 비판하다 자신도 후생상 재직시 10개월간 보험료를 내지 않은 사실이 밝혀져 민주당 대표직을 사임해야 했다. 연금 파문이란 이처럼 사소한 실수가 '대국민 기만'으로 침소봉대(針小棒大)되면서 일본 여야 정치권을 각개격파하고 고이즈미 정권을 위기로 몰았다. 누구에 의한 것일까?
(17) 파키스탄 정부는 다음날인 4월13일 뉴욕타임스 보도에 대해 논평을 요구받았지만 '노 코멘트'로 일관했다. 파키스탄 정부는 2002년 10월 미국이 일방적으로 북 핵 시인설을 퍼뜨리며 파키스탄이 우라늄 농축 장비와 기술을 제공했다는 미국측의 주장을 강하게 반박해왔다. 그러나 경제지원을 앞세운 미국의 회유와 압박 등으로 파키스탄 정부는 미국이 칸 박사를 앞세워 퍼뜨리는 거짓 정보에 대해 명백한 입장 표명을 삼가는 쪽으로 태도를 바꾸고 있다. 파키스탄 정부가 왜 이런 태도를 보이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필자 글 <6자회담 > 참조.)
(18) 한국 정부의 한 고위 당국자는 4월13일 뉴욕타임스 보도와 관련, "정부는 최근 일부 관련정보를 제공받은 바 있다"며 "그러나 실제 내용에서 불투명한 점이 많고 정황 면에서도 애매모호한 점이 커 추가 확인 중"이라고 말했다. : 세계일보 <"NYT보도 >)
(19) 오사마 빈 라덴(Osama bin Laden)이 9.11 사건의 주범이라는 선전의 약발이 떨어지자 미 정보기관들은 아브 무사브 알 자르카위(al-Zarqawi)라는 가공의 인물을 내세워 이라크 침략전의 야만성을 감추면서 '테러의 세계화'를 획책하고 있다. 미국 민간인을 잔혹하게 살해한 사건이 일어났고 미 중앙정보국(CIA)은 자르카위가 그 주범이라고 몰아 가고 있다. 그러나 미 정보기관들은, 그리고 전 세계 모든 매체들은 2003년 3월20일 미국의 이라크 침략 이후 자르카위는 한 쪽 다리를 잃고 의족을 달았다고 주장해 왔다. 수없이 많은 신문과 방송이 그렇게 보도했었다. 그런데 미국 민간인의 목을 칼로 자르는 비디오 속 주인공의 움직임은 의족을 단 이의 거동이 아니다. '자르카위의 테러' 각본을 만들려면 주인공에 대한 일관성 있는 묘사가 필요하지 않을까? 미국 민간인 참살 사건은 무슬림을 악마화(demonize) 함으로써 이슬람 문명을 없애겠다는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의 '문명충돌론'을 합리화하기 위한 사건이다. '자르카위'의 정체나 그를 앞세운 미국의 테러리즘에 대해서는 필자 글 <미국의 > '3.11 스페인열차 폭파사건 배후는 알 카에다가 아니라 미국' 참조. 2004.3.25 www.chammalo.com
(20) 일본 국회는 2004년 2월 일본이 독자적으로 대북 송금과 무역을 중단할 수 있도록 외환관리법과 무역법을 개정했으나 아직까지 발동하지는 않고 있다. 일본 정부는 이와함께 북한 선박의 일본 입항금지를 겨냥한 특정선박입항금지법의 제정을 추진하고 있다.
(21) 한호석 통일학연구소(www.onekorea.org) 소장은 북-미 적대관계 청산은 주한미군 철수로 완결될 것이라고 오래 전부터 확언해왔다. 그의 주장이 현실화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