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기영의 “순이 삼촌”을 읽고-
오 민 택
때로는 책을 읽다가 지칠 때가 있다.
화려한 언어들로 책을 치장했거나 도통 무슨 소리인지 읽는 사람은 전혀 배려하지 않고 쓰여진 책들을 읽을 때가 그렇다.
그렇게 지칠 때면 그 원인을 찾게 되는데, 그 첫째가 그 책을 선택한 나 스스로에 대한 불만족이다. 그리고 둘째는 책의 내용을 과장해서 그럴싸하게 찍어낸 출판사에 화가 나고, 끝으로는 책을 그렇게 쓴 작가에 대한 화가 치민다.
‘이렇게 무책임하게 쓸 수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절로 나고 이후에는 그 작가가 쓴 책이라면 곁눈도 주지 않게 되는 것이다.
반면에 책을 지치지도 않고 아주 재미나게 읽었을 때, 그것도 별 기대도 없이 펼쳐든 책이었을 때, 이제는 그 책의 작가를 전자의 경우와는 달리 내 머릿속에 책을 읽어도 전혀 후회하지 않을 책을 쓰는 작가로 각인이 된다.
현기영 작가가 그런 경우이다.
국방부에서 선정한 불온서적의 작가로 내 앞에 나타나 강렬한 호기심을 유발하고, 호기심만큼 기대에 충족했던 ‘지상에 숟가락 하나’.
한 달여 전 읽었던 ‘지상에 숟가락 하나’는 어린시절의 생동하는 추억을 안겨주었었다.
당연히 다음에 읽을 책이 기다려지는 것이다.
일주일쯤 전에 읽기를 마친 ‘순이 삼촌’은 전에 읽었던 ‘지상에 숟가락 하나’처럼 여전히 책의 전반에 제주도의 풍광이 짙게 깔려 있다.
다만 ‘지상에 숟가락 하나’와 다른 점이 있다면 밝고 생동하는 분위기의 제주도가 아닌, 음울하고 숨죽인 제주도가 책을 읽는 내내 가슴속에 뭉쳐있다는 점이다.
4.3항쟁이 있었던 지 60여 년이 흘렀고, 책이 발표된 때로부터는 30여 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4.3은 제주민에게 지나간 일이 아닌 진행형인 현실이다.
이 현실은 때로는 꿈속에도 나타나고, 때로는 밥상의 조밥에도 나타나고, 술주정하는 아버지에게 시달리는 어머니의 넋두리에서도 나타난다.
그리고, 4.3은 하나의 마을에서 같은 날 수많은 집들이 제사를 지내는 것으로 제주민의 가슴에 절정의 아픔을 남긴다.
- 순이삼촌네 그 옴팡진 돌짝밭에는 끝까지 찾아가지 않는 시체가 둘 있었는데 큰아버지의 손을 빌려 치운 다음에야 고구마를 갈았다. 그 해 고구마농사는 풍작이었다. 송장거름을 먹은 고구마는 목침덩어리 만큼 큼직큼직했다. (85쪽)
...... 중략......
나는 밖으로 나와 마당귀에 있는 조짚가리에 등을 기대고 담배를 피워물었다. 마당에 얇게 깔린 싸락눈이 바람에 이리저리 쏠리고 있었다. 음력 열여드레 달은 구름 속에 가려 있었지만 주위는 희끄무레 밝았다. 고샅길로 지나가는 사람들의 기척이 들려왔다. 아마 두어 집 째 제사를 끝내고 마지막 집으로 옮아가는 사람들이리라. (87쪽) -
‘순이 삼촌’의 전반에 흐르는 분위기가 무겁고 음울하지만 때로는 반전을 꾀하기도 한다.
누구나 보편적으로 알고 있는 ‘삼촌’이 아버지의 남자 형제, 또는 친척은 아니지만 가깝게 지내는 손위의 남자를 부르는 말이지만 제주에서는 그렇지가 않다.
남자도, 여자도 모두 삼촌이라 칭하고 책의 제목이자 등장인물인 ‘순이 삼촌’도 가까운 이웃 여자 어른이다.
이렇게 작은 ‘꺼리’를 알아가는 것도 책을 읽는 과정에서의 소소한 반전이요, 알아가는 즐거움 중의 하나이다.
그리고, 이러한 반전과 즐거움은 책을 읽는 과정에서 불쑥 솟구쳐 올라 지나치게 치우치는 감정의 추를 바로잡아주기도 한다.
배고픔과 사회의 부조리에 들불처럼 번지던 민란을 달래고자 조정에서는 환곡미를 횡령한 죄인을 일벌백계하라는 명을 내리고 그 명을 잘 수행했는지를 어사까지 파견해 감찰하니 고을의 수령은 죄를 다스리는 흉내라도 내지 않을 수 없는 처지에 이른다.
환곡미를 횡령한 죄인을 다스리는 벌이 ‘부형’으로 가마솥에 죄인을 넣고 쪄 죽이는 벌인데, 이는 민초들의 양식을 훔친 죄를 그만큼 중히 여기는 뜻이리라.
하지만, 그마저도 탐관이 득실거리는 시대에는 의미를 잃어 고작 마당에 솥뚜껑을 엎어 놓고 그 위를 한 번 넘어갔다 오면 형을 다하는 것으로 대신했다고 한다.
시늉일망정 한 번 죽는 형을 받은 죄인이라 살아있는 사람이 아니니 다시 형을 내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리라.
이렇게 변형된 ‘부형’, 형식뿐인 살형(殺形)제도를 해학적으로 쓴 것이 ‘소드방놀이’다.
솥뚜껑을 내개 자란 시골에서는 소드방이라 불렀던 기억이 있다.
- 이것은 바로 그저께 일이었다. 효수형 대신 부형을 받기로 몇 번씩이나 사또로부터 다짐을 받고 난 다음부터 윤관영은 그날로 당장 옥에 갇히는 몸이 되었다. 일단 부형을 받으면 효수형을 면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부형이 아무리 솥찜질 시늉에 불과한 요식행위라 한들 그것 또한 엄연히 사형의 한 방법일진대, 일단 부형받고 죽은 사람을 다시 끌어내어 목을 벨 수 없는 게 아니냐.
웬 빌어먹을 민란들은 돌림병처럼 시끌시끌 번져가는지. 어디 바늘방석에 앉은 것 같아 견딜 수 있나. 이대로 두었다간 저 실성한 것들이 꼭 무슨 일을 저지르고 말지, 아마. 그러니, 부탁하네. 그저 저 미친 것들을 살풀이로 달래주는 셈 치고 죽는 척 시늉만 해주게. (29쪽)
책은 항상 마음을 풍요롭게 한다.
때로는 그 책이 눈물을 펑펑 쏟게도 하고, 또 때로는 배가 아프도록 웃게도 하면서도 마음을 넉넉하게 채워주는 것이 책이 가진 가장 큰 장점이다.
현기영 작가의 ‘순이 삼촌’은 소설집이다.
중단편소설들을 묶어서 낸 만큼 여러 가지의 맛을 느낄 수 있다.
이 가을 붉게 타오르는 오름의 단풍을 음미하듯......
오 민 택
때로는 책을 읽다가 지칠 때가 있다.
화려한 언어들로 책을 치장했거나 도통 무슨 소리인지 읽는 사람은 전혀 배려하지 않고 쓰여진 책들을 읽을 때가 그렇다.
그렇게 지칠 때면 그 원인을 찾게 되는데, 그 첫째가 그 책을 선택한 나 스스로에 대한 불만족이다. 그리고 둘째는 책의 내용을 과장해서 그럴싸하게 찍어낸 출판사에 화가 나고, 끝으로는 책을 그렇게 쓴 작가에 대한 화가 치민다.
‘이렇게 무책임하게 쓸 수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절로 나고 이후에는 그 작가가 쓴 책이라면 곁눈도 주지 않게 되는 것이다.
반면에 책을 지치지도 않고 아주 재미나게 읽었을 때, 그것도 별 기대도 없이 펼쳐든 책이었을 때, 이제는 그 책의 작가를 전자의 경우와는 달리 내 머릿속에 책을 읽어도 전혀 후회하지 않을 책을 쓰는 작가로 각인이 된다.
현기영 작가가 그런 경우이다.
국방부에서 선정한 불온서적의 작가로 내 앞에 나타나 강렬한 호기심을 유발하고, 호기심만큼 기대에 충족했던 ‘지상에 숟가락 하나’.
한 달여 전 읽었던 ‘지상에 숟가락 하나’는 어린시절의 생동하는 추억을 안겨주었었다.
당연히 다음에 읽을 책이 기다려지는 것이다.
일주일쯤 전에 읽기를 마친 ‘순이 삼촌’은 전에 읽었던 ‘지상에 숟가락 하나’처럼 여전히 책의 전반에 제주도의 풍광이 짙게 깔려 있다.
다만 ‘지상에 숟가락 하나’와 다른 점이 있다면 밝고 생동하는 분위기의 제주도가 아닌, 음울하고 숨죽인 제주도가 책을 읽는 내내 가슴속에 뭉쳐있다는 점이다.
4.3항쟁이 있었던 지 60여 년이 흘렀고, 책이 발표된 때로부터는 30여 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4.3은 제주민에게 지나간 일이 아닌 진행형인 현실이다.
이 현실은 때로는 꿈속에도 나타나고, 때로는 밥상의 조밥에도 나타나고, 술주정하는 아버지에게 시달리는 어머니의 넋두리에서도 나타난다.
그리고, 4.3은 하나의 마을에서 같은 날 수많은 집들이 제사를 지내는 것으로 제주민의 가슴에 절정의 아픔을 남긴다.
- 순이삼촌네 그 옴팡진 돌짝밭에는 끝까지 찾아가지 않는 시체가 둘 있었는데 큰아버지의 손을 빌려 치운 다음에야 고구마를 갈았다. 그 해 고구마농사는 풍작이었다. 송장거름을 먹은 고구마는 목침덩어리 만큼 큼직큼직했다. (85쪽)
...... 중략......
나는 밖으로 나와 마당귀에 있는 조짚가리에 등을 기대고 담배를 피워물었다. 마당에 얇게 깔린 싸락눈이 바람에 이리저리 쏠리고 있었다. 음력 열여드레 달은 구름 속에 가려 있었지만 주위는 희끄무레 밝았다. 고샅길로 지나가는 사람들의 기척이 들려왔다. 아마 두어 집 째 제사를 끝내고 마지막 집으로 옮아가는 사람들이리라. (87쪽) -
‘순이 삼촌’의 전반에 흐르는 분위기가 무겁고 음울하지만 때로는 반전을 꾀하기도 한다.
누구나 보편적으로 알고 있는 ‘삼촌’이 아버지의 남자 형제, 또는 친척은 아니지만 가깝게 지내는 손위의 남자를 부르는 말이지만 제주에서는 그렇지가 않다.
남자도, 여자도 모두 삼촌이라 칭하고 책의 제목이자 등장인물인 ‘순이 삼촌’도 가까운 이웃 여자 어른이다.
이렇게 작은 ‘꺼리’를 알아가는 것도 책을 읽는 과정에서의 소소한 반전이요, 알아가는 즐거움 중의 하나이다.
그리고, 이러한 반전과 즐거움은 책을 읽는 과정에서 불쑥 솟구쳐 올라 지나치게 치우치는 감정의 추를 바로잡아주기도 한다.
배고픔과 사회의 부조리에 들불처럼 번지던 민란을 달래고자 조정에서는 환곡미를 횡령한 죄인을 일벌백계하라는 명을 내리고 그 명을 잘 수행했는지를 어사까지 파견해 감찰하니 고을의 수령은 죄를 다스리는 흉내라도 내지 않을 수 없는 처지에 이른다.
환곡미를 횡령한 죄인을 다스리는 벌이 ‘부형’으로 가마솥에 죄인을 넣고 쪄 죽이는 벌인데, 이는 민초들의 양식을 훔친 죄를 그만큼 중히 여기는 뜻이리라.
하지만, 그마저도 탐관이 득실거리는 시대에는 의미를 잃어 고작 마당에 솥뚜껑을 엎어 놓고 그 위를 한 번 넘어갔다 오면 형을 다하는 것으로 대신했다고 한다.
시늉일망정 한 번 죽는 형을 받은 죄인이라 살아있는 사람이 아니니 다시 형을 내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리라.
이렇게 변형된 ‘부형’, 형식뿐인 살형(殺形)제도를 해학적으로 쓴 것이 ‘소드방놀이’다.
솥뚜껑을 내개 자란 시골에서는 소드방이라 불렀던 기억이 있다.
- 이것은 바로 그저께 일이었다. 효수형 대신 부형을 받기로 몇 번씩이나 사또로부터 다짐을 받고 난 다음부터 윤관영은 그날로 당장 옥에 갇히는 몸이 되었다. 일단 부형을 받으면 효수형을 면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부형이 아무리 솥찜질 시늉에 불과한 요식행위라 한들 그것 또한 엄연히 사형의 한 방법일진대, 일단 부형받고 죽은 사람을 다시 끌어내어 목을 벨 수 없는 게 아니냐.
웬 빌어먹을 민란들은 돌림병처럼 시끌시끌 번져가는지. 어디 바늘방석에 앉은 것 같아 견딜 수 있나. 이대로 두었다간 저 실성한 것들이 꼭 무슨 일을 저지르고 말지, 아마. 그러니, 부탁하네. 그저 저 미친 것들을 살풀이로 달래주는 셈 치고 죽는 척 시늉만 해주게. (29쪽)
책은 항상 마음을 풍요롭게 한다.
때로는 그 책이 눈물을 펑펑 쏟게도 하고, 또 때로는 배가 아프도록 웃게도 하면서도 마음을 넉넉하게 채워주는 것이 책이 가진 가장 큰 장점이다.
현기영 작가의 ‘순이 삼촌’은 소설집이다.
중단편소설들을 묶어서 낸 만큼 여러 가지의 맛을 느낄 수 있다.
이 가을 붉게 타오르는 오름의 단풍을 음미하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