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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누가 이들을 '악발이'로 만들었나-호텔롯데 노조원을 말한다

작성일 2000.08.11 작성자 노동과세계 조회수 4091
호텔롯데 노조원을 말한다

누가 이들을 '악발이'로 만들었나

"회사가 정말 이럴 줄 몰랐다" 짙은 배신감
'그 생지옥' 평생 못잊어…"이긴다면 뭐라도"

길어야 사흘이라고 여겼던 파업이 8월8일로 꽉 찬 두 달째다.

경영진이 "뚱뚱하니 다른 부서로 보내겠다"고 모욕해도 한마디 못했고, 지난해 단지 '사내부부'라는 이유로 "둘 중 한명은 사표를 써라"하고 을러도 당하고 말았던 이들이다. 호텔롯데노조(위원장 직무대행 김경종) 조합원들은 그렇게 순종만 알았지 저항이란 몰랐던 사람들이다. 6월29일 테러진압부대 투입 때 잡혀 지금은 서울구치소에 갇혀있는 정주호 위원장이 삭발할 때 호텔로비에 앉아 눈물을 줄줄 흘릴 만큼 이들의 가슴은 여리기만 했다.

그러나 숨이 턱턱 막히는 뙤약볕과 아스팔트를 뚫고 올라오는 열기 속에서 하루가 멀다고 열리는 민주노총 집회에 참가하고 있는 이들의 눈빛은 달라진지 오래다. 지난 7월10일, 일터를 되찾기 위해 명동대로에 쏟아져 나왔을 때 경찰은 또 한차례 쇠몽둥이를 휘둘렀다. 그러나 이들은 온몸에 가해지는 폭력과 야만을 두 눈 부릅뜨고 노려보며 길거리에 주질러 앉았다. 집회행렬을 가로막고 선 경찰을 향해 "노동부장관 퇴진!" "이무영 경찰청장 해임!"을 외치는 이들의 목소리는 남대문고가를 흔들 만큼 우렁찼다.

이들은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변했다. 예전에는 자본과 정권이 파업을 폭력으로 짓밟으면 노동자들은 어깨를 늘어뜨리고 일터로 돌아갔다. 롯데 조합원들은 경찰력 투입 뒤 오히려 빛나는 눈으로 똘똘 뭉쳐 싸우고 있다.

특히 여성조합원들의 변화가 눈부시다. 파업 중에도 라커에 내려가 화장하기를 잊지 않던 그들이었다. 윗사람한테 한소리만 들어도 큰 눈에서는 주르르 눈물을 떨어뜨릴 것 같았다. 이제는 눈물이 말랐는지 더 이상 울지 않는다. 박정의 부위원장은 "경찰 앞에서 의연하게 구호를 외치고 노동가요를 부르는 모습을 보며 여성이 강하다는 것을 절감했다"고 말했다.

누가 롯데 조합원들을 '악발이'로 만들었는가. 이들은 "회사가 정말 이럴 줄은 몰랐다"고 말한다. 승진할 때 온갖 아부에 그것도 모자라 현금까지 갖다 바쳐야 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던 경영관행, 피부병이 날 만큼 극심했던 성희롱으로 조합원들은 맺힐 대로 맺혀 있었다.

그러나 비정규직 정규직화, 적정인력 확보, 봉사료 잉여금 지급 등 노조의 정당한 요구에 대해 회사쪽은 자료조차 내주지 않더니 경찰을 불러 조합원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대의원 이승규씨는 "IMF 이후 회사쪽은 상여금 강제반납, 상급사원 강제 퇴직, 부부사원 강제퇴직에 비정규직을 늘려 점심때까지는 잠시도 쉴 수 없을 만큼 혹독하게 일했다"며 "예약석에 캐셔를 없애 웨이트리스가 접대하랴 돈 받으랴 뛰어다니면서 일하는 풍경을 봐야 할 정도였다"고 말했다.

이씨는 또 "구속·징계자 등 아무런 해결도 없이 회사는 복귀하라는 편지만 잇달아 보내고 있는데 도저히 수긍할 수 없다"고 말했다.

또 하나 조합원들은 6월29일 새벽의 그 '생지옥'을 평생 잊을 수 없다고 입을 모은다. 남의 일인 줄만 알았던 일을 직접 당한 것이다. 곤봉소리와 비명소리가 뒤섞여 아비규환을 이뤘던 그날 자신에게 폭력을 휘두른 자들이 솔개부대인지 조차 확인할 길이 없었다.

연막탄으로 앞을 볼 수도 없었지만 이미 비명도 제대로 못 지르고 쓰러졌기 때문이다. 이민영 노조 조직부장은 "우리요구가 정당한데 이처럼 '개취급' 당하며 기절하도록 얻어맞으리라고는 상상조차 못했다"고 몸서리쳐지는 악몽을 떠올렸다.

이전 집행부였으면 어림도 없는 일이라는 게 조합원들의 생각이다. 87년 노조가 생긴 뒤 노조위원장들은 "임금인상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파업하겠다"는 말을 빼놓지 않았으나 어느 샌가 꼬리를 내리기 일쑤였다.

우여곡절 끝에 민주노총에 가입한 이번 9대 집행부에 들어서야 쟁의대책회의니 임시대의원대회가 열리는 등 처음으로 공개적이고 공식적으로 일하는 모습을 보게 된 것이다. 조합원들이 개인적인 목소리를 자제하며 흔들림 없이 집행부를 중심으로 싸우는 데는 민주노조에 대한 신뢰가 자리잡고 있다.

최성환(잠실 식음조리부)씨는 6월29일 사태이후 집에 있는 캠코더를 들고 다니며 모든 투쟁현장을 기록하고 있다. 그날 이후 "보탬이 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 해야겠다"고 스스로에게 약속했다.

최씨 말고도 6명의 조합원이 현장기자로 자원해 급변하는 현장상황을 인터넷을 통해 조합원들과 언론에 알리고 있다. 기존 언론에 대한 감시활동까지 벌이며 롯데사태와 투쟁을 제대로 알리는 데 힘쓰고 있다. "우리도 할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겼어요. 우리가 흩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최고성과라고 생각해요."

뜨거운 햇살 아래 묵직한 캠코더를 든 최씨가 말했다. 그는 파업 뒤에라도 회사의 잘못된 경영관행이나 문제 있는 기업문화에 대해 기획취재를 할 생각이다.
정경은 joungke@kctu.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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