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18일 신청접수 예상자(총201명)와 사업장별 투쟁 개요
< 70∼80년대 >
1. 청계피복 노동조합 투쟁관련 구속 해고자 : 민종덕(당시 위원장)등 15명
1970년 11월 13일,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내죽음을 헛되이 말라!'고 외치며 꾳 다운 청년노동자가 죽어갔다. 바로 22살 청년 전태일의 죽음이다. 그의 피 맺힌 외침은 청계피복노동조합 투쟁의 역사에, 아니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2000년 오늘에도 전태일 정신은 노동운동의 불꽃이 되어 1천만 노동자의 가슴에 되살아오고 있고 노동운동은 물론 이 땅 민주화 투쟁의 선구자 노릇을 해왔다.
전태일 열사의 죽음을 계기로 피어오른 청계피복노동조합의 투쟁은 70-80년대 혹독한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군사정권의 탄압을 받으면서도 결사 투쟁해 왔으며 주요한 시기마다 노동운동의 나침반 역할이 되어왔다.
주요투쟁으로 1970년 11월 27일 청계피복지부를 결성한 이후 1976년 풍천화섬 연대투쟁으로 수명의 노동자가 연행 구속되었고, 77년 이소선 어머니의 구속과 1981년 아프리 사무실 점거농성 투쟁, 1985년 까지 세차례에 걸친 노조 합법성 쟁취 투쟁으로 수 십 명이 구속, 수배, 해고, 부상당하는 모진 탄압과 투쟁의 역사가 있었다.
그리고 87년 7월 15일 노조 기습 탈환 투쟁과 6,29 선언 이후 도래한 범 국민적 민주화 투쟁의 승리로 노동법이 개정되고 88년 5월 2일 청계피복노조 신고필증을 교부받아 청계피복 노조가 완전한 합법성을 쟁취하기까지 그야말로 피로 얼룩진 투쟁이 지속되었다. 전태일 열사와 청계피복노조의 투쟁은 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지금까지 민주노조 운동의 모태가 되어왔다.
2. 원풍모방 노동조합 투쟁관련 구속 해고자 : 박순희(당시 부위원장)등 20명
1953년 설립된 한국견방주식회사(대표 김재현)의 노동자들은 수 차례에 걸쳐 노동조합 결성을 시도했으나 그때마다 사측의 회유와 탄압으로 좌절해야했다.
그러다가 1963년 한국모방분회로 노조를 결성했으나 민주파는 제거되어야 했다. 이후 수 차례의 투쟁과 탄압 속에 1972년 마침내 민주노조를 쟁취하였으나 민주파 지부장 당선 후 악덕자본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12명 해고, 5명 직위해제, 2명 권고사직, 부서이동 등 탄압을 가해왔다.
이후 600여명의 조합원들이 명동성당 농성을 하는등 가열찬 투쟁으로 해고자 전원이 원직복직 하는 등 승리를 쟁취하기도 하였으나 사측의 탄압은 해마다 더해 왔다. 1975년에는 방용석 지부장이 구속되었고 80년 전두환 신군부 세력이 들어서며 또다시 방용석, 박순희 등이 정화조치로 해고되고 수배 받기도 하였다.
1982년 10월에는 원풍모방 자본측의 치밀한 계획 속에 폭력사건이 발생하였는데 수 백 명의 폭력배들이 노조탄압에 맞서 농성중이던 농성장에 들이닥쳐 죽기살기로 저항하는 조합원 250여명을 끌어냈다. 그리고는 조합간부 8명 구속, 55명 조합원에게는 구류처분, 2백여명은 입원, 5백여명의 노동자는 결국 강제 해고당했다. 이러한 악랄한 탄압 속에 83년 10월, 잔혹한 박정희, 전두환 군사정권 아래서 민주노조의 길을 갔던 원풍노조는 결국 해산되고 말았다. 이로써 악덕자본과 군사정권에게 언제나 눈에 가시 같은 존재였던 원풍노조는 10여년 동안 가혹한 탄압을 받은 대표할만한 민주노조가 되었다.
3. 콘트롤데이타 노동조합 : 6명
콘트롤데이타 회사는 미국의 다국적 기업으로 1958년 한국에 들어와 매년 급성장하여 1980년에는 수출액이 2,400만달러에 달하는 등 막대한 이윤을 본국으로 뽑아갔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저임금, 장시간 노동은 물론 눈병, 치질, 위장병, 변비 두통 등 온갖 질병에 시달려야 했다. 이에 노동자들은 1973년 12월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매년 임금인상 및 단체협약갱신 투쟁을 펼쳤다.
이러한 투쟁 속에 노동자의 권익과 의식이 향상되고 민주노조가 강화되자 악덕자본과 박정희, 전두환 군사정권은 온갖 회유와 탄압을 가해왔다. 특히 1980년 말부터 시작한 노사협의가 타결되지 않은 채, 1982년 2월까지 끌게 되자 노조는 태업이라는 준법 투쟁을 펼쳤는데 악덕자본은 노조간부 6명에 대한 해고로 답하였다.
이후 7월 10일 노동부로 몰려가 '공장철수 반대! 해고자 복직!'을 내걸고 투쟁하였는데 전두환 군사정권은 결국 3명을 구속시키고 12명은 즉심에 넘겨 구류처분을 받게 하였다. 이러한 탄압 속에 콘트롤데이터 노조는 점차 파괴되어 갔고 결국 악덕 미국 자본은 공장을 철수하였다.
4. 동일방직 노동조합 : 이총각(당시 위원장) 등 20명
1972년만 해도 동일 방직노조는 회사와 적당히 타협을 하는 이른바 어용노조였다. 여성노동자가 대부분 임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소외시키고 남성 근로자가 조합을 장악하자 완력을 동원한 어용노조의 한길을 달렸다. 이에 분노한 여성노동자들이 같은 해, 남성위주의 노조를 깨고 주길자 후보를 당선시킴으로써 민주노조의 첫발을 내디뎠다.
이후 악덕 자본과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의 온갖 회유와 탄압속 에 꿋꿋하게 민주노조의 길을 가고 있었으나 77년 이총각 총무가 지부장으로 당선되며 태풍같은 탄압이 기다리고 있었다.
악덕자본은 호시탐탐 노조파괴의 음모를 획책하고 있다가 1978년 2월 21일 대의원 선거일에 악덕자본은 남자조합원을 매수하여 노동조합 사무실 기물을 마구 부수는등 아수라장으로 만들고 여성조합원들을 무자비하게 두들겨 패며 그것도 모자라 5-6명의 남자들이 미리 준비한 똥물을 방화수통에 담아 여성 조합원들에게 마구 뿌려댔다. 이러한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결사적으로 투쟁하는 여성조합원들을 악덕 자본과 박정희 군사정권은 같은 해, 4월 1일, 124명이나 대량해고 하는 탄압을 서슴치 않았다.
이후 복직투쟁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1980년 4월 21일 함석헌 선생, 공덕귀 여사, 김승훈 신부등과 함께 20여명 노동자가 유인물을 돌리던 중, 9명이 강제 연행되어 산업선교회 서경석 총무와 정명자 해고자가 구속되는 등 탄압받았으며 이러한 탄압은 동일방직 노동조합이 파괴 될 때까지 수십명이 구속되는 등 집중 탄압이 계속되었다.
5. YH무역 노동조합 : 3명
1979년 8월 9일 YH무역의 여성노동자 170여명이 회사의 폐업에 항의하여 신민당사 농성에 돌입하였다.
8월 11일 새벽에 박정희 군사정권은 경찰병력을 동원 농성장에 난입 무수한 구타와 폭력속에 농성자 전원을 강제 연행하고 조합간부들을 구속 탄압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여성노동자 김경숙이 하나뿐인 꽃다운 청춘을 빼앗기고 말았다 이 사건으로 국민들은 정권의 폭력에 치를 떨었고 박정희 정권은 도시산업선교회와 신민당 김영삼총재에 대해 탄압을 강화해 갔으나 부마 민중항쟁등 국민 저항에 부딪쳐 결국 10월 26일 심복 김재규의 총탄에 18년 박정희 군사정권이 무너지게 되었다.
YH무역 노동자들의 투쟁은 유신독재, 군사독재의 18년 박정희 정권을 결정적으로 무너뜨리는 계기가 된 투쟁으로 정치적으로도 민주화 투쟁의 정점에 서있었다 할 것이다.
6. 동남전기 노동조합 : 3명
7. 고려피혁 노동조합 : 1명
8. 삼원섬유 노동조합 : 2명
8. 반도상사 노동조합 : 15명
<90년대>
1. 노동법 개정 투쟁 관련 구속자 : 배창호( 당시 민주노총 충북지역본부장)
1996.12.26일 신한국당에 의해 노동법이 날치기로 통과하자 민주노총은 즉각적인 무기한 총파업을 전개하였다. 1단계 총파업은 96년 12.26~97년 1월2일 2단계총파업은 97년 1월3~14일 사이에 3단계총파업은 1.15~19에 이루어졌으며 결국 1월21일에는 여야 영수회담이 열려 노동법재개정과 파업지도부에 대한 구속방침이 철회되었다. 이후 국회에서의 노동법재개정과정에서의 상급단체 복수노조 즉시 허용, 정리해고 2년간 유보, 노동부의 노동조합 업무조사 삭제등 날치기 노동법을 일부 개선시키게 되었다.
2. 한통노조 관련 구속 해고자 : 유덕상(당시 위원장, 현 민주노총 부위원장) 등 38명
1995년 5월 김영삼 정부는 회사를 종용해 임금교섭중인 상태에서 64명의 조합간부를 고소고발하고 파면 등 중징계하겠다는 조치를 발표하게 하였다. 김영삼 대통령은 또한 한통노조를 국가전복세력으로 규정하였고 곧이어 간부들에 대해 사전구속영장이 발부되었다. 이러한 정부의 부당한 탄압에 항의하기 위하여 노조는 5월22일 명동성당에, 5월 27일 조계사에 농성장을 설치하고 대내외에 탄압의 실상을 알리는 투쟁에 돌입하였고 각계각층의 지지를 이끌어냈다.
당황한 정부는 6월6일 공권력을 투입하여 농성간부들을 연행 구속하였고 이 성지침탈을 계기로 종교계와 시민단체 노동조합등의 김영삼정부에 대한 규탄분위기가 급속히 확산되었고 결국 6.27지자제 선거에서 여당은 참패하였다. 이 투쟁은 7.30일까지 이어졌고 2000여명의 조합원이 징계되고 31명 해고 39명이 구속되는 피해를 겪었다.
3. 양봉수열사 장례투쟁 관련 구속자 : 정갑득(현재 현대자동차노조 위원장 ) 30여명
양봉수열사는 92년초 노조의 성과분배 요구 투쟁 당시 1차 해고된 후 복직되었다가 95년 초 회사측의 합의사항불이행에 맞서 라인정지투쟁을 벌이다 2차 해고되었다.
열사는 95년 5월 해고무효소송중으로 조합원 신분이 유지됨에도 불구하고 조합행사에 참가하려는 열사를 회사 경비들이 폭력적으로 저지하는데 항거하여 분신하였다. 양봉수 동지 분신 대책위원회가 구성되었고 대책위는 부당노동행위 중지 정당한 조합활동 보장 등을 내걸고 파업에 돌입하였다. 5월19일 공권력이 투입되어 분신대책위지도부를 구속하였고 250여명의 노동자들이 연행되었다. 양봉수열사는 6월13일 32일만에 운명하였고 양열사분신대책위의 투쟁은 현대자동차에 민주노조가 재탄생되는 계기가 되었다.
4. 캄코(구 만도기계) 구속자 : 정근원(현재 위원장)등 2명
98년도 만도기계는 우량한 회사였지만 한라그룹계열사에 대한 7,000억원에 달하는 무리한 자금지원으로 인하여 부도를 맞았다. 부도이후 노사는 인위적인 인원감축을 하지 않으며 인수 분할 매각 합병 시 고용을 승계한다는 단체협약을 맺었음에도 불구하고 1163명의 인원을 일방적으로 고용조정하겠다는 통보를 해왔다.
이에 항의하여 노조(위원장 황성근)의 파업이 이루어졌고 즉각적으로 공권력이 투입되어 2,600여명 연행 41명 300명 불구속 입건 600여명 즉결심판회부라는 유례없는 탄압이 이루어졌다. 공권력투입이후 상여금300%일방반납 1천여명에 달하는 인원감축이 회사측에 의해 일방적으로 이루어졌다. 또한 그후 회사의 분할매각이 이루어졌고 캄코는 만도에서 분할매각된 회사이다.
5. 전기협투쟁관련 구속 해고자 : 김홍철외 2명
철도노조의 기관차지부를 중심으로 한 전국기관차 노조지부협의회는 서울지하철, 부산교통공단노조등과 함께 1994년 전국지하철노동조합협의회를 결성하였다. 전기협은 3사의 근로조건이 정부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점에 근거하여 공동투쟁을 하기로 하고 6월에는 공동집회 공동쟁의일정발표 등 공동행동을 개시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에 쐐기를 박고자 김영삼정부는 전기협간부들에 대한 사전구속영장을 발부받아 6월23일 새벽 전기협 농성장에 공권력을 투입하였다. 641명이 연행되고 13명이 구속되었고 전기협(의장 서선원)은 즉각적으로 항의 파업에 돌입하였고 6월24일 서울지하철 6월25일 부산교통공단노조가 파업에 돌입하였다. 이 파업은 7월초 마무리되었고 전기협은 13명구속외에 50여명의 해고자를 낳았다.
< 70∼80년대 >
1. 청계피복 노동조합 투쟁관련 구속 해고자 : 민종덕(당시 위원장)등 15명
1970년 11월 13일,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내죽음을 헛되이 말라!'고 외치며 꾳 다운 청년노동자가 죽어갔다. 바로 22살 청년 전태일의 죽음이다. 그의 피 맺힌 외침은 청계피복노동조합 투쟁의 역사에, 아니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2000년 오늘에도 전태일 정신은 노동운동의 불꽃이 되어 1천만 노동자의 가슴에 되살아오고 있고 노동운동은 물론 이 땅 민주화 투쟁의 선구자 노릇을 해왔다.
전태일 열사의 죽음을 계기로 피어오른 청계피복노동조합의 투쟁은 70-80년대 혹독한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군사정권의 탄압을 받으면서도 결사 투쟁해 왔으며 주요한 시기마다 노동운동의 나침반 역할이 되어왔다.
주요투쟁으로 1970년 11월 27일 청계피복지부를 결성한 이후 1976년 풍천화섬 연대투쟁으로 수명의 노동자가 연행 구속되었고, 77년 이소선 어머니의 구속과 1981년 아프리 사무실 점거농성 투쟁, 1985년 까지 세차례에 걸친 노조 합법성 쟁취 투쟁으로 수 십 명이 구속, 수배, 해고, 부상당하는 모진 탄압과 투쟁의 역사가 있었다.
그리고 87년 7월 15일 노조 기습 탈환 투쟁과 6,29 선언 이후 도래한 범 국민적 민주화 투쟁의 승리로 노동법이 개정되고 88년 5월 2일 청계피복노조 신고필증을 교부받아 청계피복 노조가 완전한 합법성을 쟁취하기까지 그야말로 피로 얼룩진 투쟁이 지속되었다. 전태일 열사와 청계피복노조의 투쟁은 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지금까지 민주노조 운동의 모태가 되어왔다.
2. 원풍모방 노동조합 투쟁관련 구속 해고자 : 박순희(당시 부위원장)등 20명
1953년 설립된 한국견방주식회사(대표 김재현)의 노동자들은 수 차례에 걸쳐 노동조합 결성을 시도했으나 그때마다 사측의 회유와 탄압으로 좌절해야했다.
그러다가 1963년 한국모방분회로 노조를 결성했으나 민주파는 제거되어야 했다. 이후 수 차례의 투쟁과 탄압 속에 1972년 마침내 민주노조를 쟁취하였으나 민주파 지부장 당선 후 악덕자본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12명 해고, 5명 직위해제, 2명 권고사직, 부서이동 등 탄압을 가해왔다.
이후 600여명의 조합원들이 명동성당 농성을 하는등 가열찬 투쟁으로 해고자 전원이 원직복직 하는 등 승리를 쟁취하기도 하였으나 사측의 탄압은 해마다 더해 왔다. 1975년에는 방용석 지부장이 구속되었고 80년 전두환 신군부 세력이 들어서며 또다시 방용석, 박순희 등이 정화조치로 해고되고 수배 받기도 하였다.
1982년 10월에는 원풍모방 자본측의 치밀한 계획 속에 폭력사건이 발생하였는데 수 백 명의 폭력배들이 노조탄압에 맞서 농성중이던 농성장에 들이닥쳐 죽기살기로 저항하는 조합원 250여명을 끌어냈다. 그리고는 조합간부 8명 구속, 55명 조합원에게는 구류처분, 2백여명은 입원, 5백여명의 노동자는 결국 강제 해고당했다. 이러한 악랄한 탄압 속에 83년 10월, 잔혹한 박정희, 전두환 군사정권 아래서 민주노조의 길을 갔던 원풍노조는 결국 해산되고 말았다. 이로써 악덕자본과 군사정권에게 언제나 눈에 가시 같은 존재였던 원풍노조는 10여년 동안 가혹한 탄압을 받은 대표할만한 민주노조가 되었다.
3. 콘트롤데이타 노동조합 : 6명
콘트롤데이타 회사는 미국의 다국적 기업으로 1958년 한국에 들어와 매년 급성장하여 1980년에는 수출액이 2,400만달러에 달하는 등 막대한 이윤을 본국으로 뽑아갔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저임금, 장시간 노동은 물론 눈병, 치질, 위장병, 변비 두통 등 온갖 질병에 시달려야 했다. 이에 노동자들은 1973년 12월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매년 임금인상 및 단체협약갱신 투쟁을 펼쳤다.
이러한 투쟁 속에 노동자의 권익과 의식이 향상되고 민주노조가 강화되자 악덕자본과 박정희, 전두환 군사정권은 온갖 회유와 탄압을 가해왔다. 특히 1980년 말부터 시작한 노사협의가 타결되지 않은 채, 1982년 2월까지 끌게 되자 노조는 태업이라는 준법 투쟁을 펼쳤는데 악덕자본은 노조간부 6명에 대한 해고로 답하였다.
이후 7월 10일 노동부로 몰려가 '공장철수 반대! 해고자 복직!'을 내걸고 투쟁하였는데 전두환 군사정권은 결국 3명을 구속시키고 12명은 즉심에 넘겨 구류처분을 받게 하였다. 이러한 탄압 속에 콘트롤데이터 노조는 점차 파괴되어 갔고 결국 악덕 미국 자본은 공장을 철수하였다.
4. 동일방직 노동조합 : 이총각(당시 위원장) 등 20명
1972년만 해도 동일 방직노조는 회사와 적당히 타협을 하는 이른바 어용노조였다. 여성노동자가 대부분 임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소외시키고 남성 근로자가 조합을 장악하자 완력을 동원한 어용노조의 한길을 달렸다. 이에 분노한 여성노동자들이 같은 해, 남성위주의 노조를 깨고 주길자 후보를 당선시킴으로써 민주노조의 첫발을 내디뎠다.
이후 악덕 자본과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의 온갖 회유와 탄압속 에 꿋꿋하게 민주노조의 길을 가고 있었으나 77년 이총각 총무가 지부장으로 당선되며 태풍같은 탄압이 기다리고 있었다.
악덕자본은 호시탐탐 노조파괴의 음모를 획책하고 있다가 1978년 2월 21일 대의원 선거일에 악덕자본은 남자조합원을 매수하여 노동조합 사무실 기물을 마구 부수는등 아수라장으로 만들고 여성조합원들을 무자비하게 두들겨 패며 그것도 모자라 5-6명의 남자들이 미리 준비한 똥물을 방화수통에 담아 여성 조합원들에게 마구 뿌려댔다. 이러한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결사적으로 투쟁하는 여성조합원들을 악덕 자본과 박정희 군사정권은 같은 해, 4월 1일, 124명이나 대량해고 하는 탄압을 서슴치 않았다.
이후 복직투쟁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1980년 4월 21일 함석헌 선생, 공덕귀 여사, 김승훈 신부등과 함께 20여명 노동자가 유인물을 돌리던 중, 9명이 강제 연행되어 산업선교회 서경석 총무와 정명자 해고자가 구속되는 등 탄압받았으며 이러한 탄압은 동일방직 노동조합이 파괴 될 때까지 수십명이 구속되는 등 집중 탄압이 계속되었다.
5. YH무역 노동조합 : 3명
1979년 8월 9일 YH무역의 여성노동자 170여명이 회사의 폐업에 항의하여 신민당사 농성에 돌입하였다.
8월 11일 새벽에 박정희 군사정권은 경찰병력을 동원 농성장에 난입 무수한 구타와 폭력속에 농성자 전원을 강제 연행하고 조합간부들을 구속 탄압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여성노동자 김경숙이 하나뿐인 꽃다운 청춘을 빼앗기고 말았다 이 사건으로 국민들은 정권의 폭력에 치를 떨었고 박정희 정권은 도시산업선교회와 신민당 김영삼총재에 대해 탄압을 강화해 갔으나 부마 민중항쟁등 국민 저항에 부딪쳐 결국 10월 26일 심복 김재규의 총탄에 18년 박정희 군사정권이 무너지게 되었다.
YH무역 노동자들의 투쟁은 유신독재, 군사독재의 18년 박정희 정권을 결정적으로 무너뜨리는 계기가 된 투쟁으로 정치적으로도 민주화 투쟁의 정점에 서있었다 할 것이다.
6. 동남전기 노동조합 : 3명
7. 고려피혁 노동조합 : 1명
8. 삼원섬유 노동조합 : 2명
8. 반도상사 노동조합 : 15명
<90년대>
1. 노동법 개정 투쟁 관련 구속자 : 배창호( 당시 민주노총 충북지역본부장)
1996.12.26일 신한국당에 의해 노동법이 날치기로 통과하자 민주노총은 즉각적인 무기한 총파업을 전개하였다. 1단계 총파업은 96년 12.26~97년 1월2일 2단계총파업은 97년 1월3~14일 사이에 3단계총파업은 1.15~19에 이루어졌으며 결국 1월21일에는 여야 영수회담이 열려 노동법재개정과 파업지도부에 대한 구속방침이 철회되었다. 이후 국회에서의 노동법재개정과정에서의 상급단체 복수노조 즉시 허용, 정리해고 2년간 유보, 노동부의 노동조합 업무조사 삭제등 날치기 노동법을 일부 개선시키게 되었다.
2. 한통노조 관련 구속 해고자 : 유덕상(당시 위원장, 현 민주노총 부위원장) 등 38명
1995년 5월 김영삼 정부는 회사를 종용해 임금교섭중인 상태에서 64명의 조합간부를 고소고발하고 파면 등 중징계하겠다는 조치를 발표하게 하였다. 김영삼 대통령은 또한 한통노조를 국가전복세력으로 규정하였고 곧이어 간부들에 대해 사전구속영장이 발부되었다. 이러한 정부의 부당한 탄압에 항의하기 위하여 노조는 5월22일 명동성당에, 5월 27일 조계사에 농성장을 설치하고 대내외에 탄압의 실상을 알리는 투쟁에 돌입하였고 각계각층의 지지를 이끌어냈다.
당황한 정부는 6월6일 공권력을 투입하여 농성간부들을 연행 구속하였고 이 성지침탈을 계기로 종교계와 시민단체 노동조합등의 김영삼정부에 대한 규탄분위기가 급속히 확산되었고 결국 6.27지자제 선거에서 여당은 참패하였다. 이 투쟁은 7.30일까지 이어졌고 2000여명의 조합원이 징계되고 31명 해고 39명이 구속되는 피해를 겪었다.
3. 양봉수열사 장례투쟁 관련 구속자 : 정갑득(현재 현대자동차노조 위원장 ) 30여명
양봉수열사는 92년초 노조의 성과분배 요구 투쟁 당시 1차 해고된 후 복직되었다가 95년 초 회사측의 합의사항불이행에 맞서 라인정지투쟁을 벌이다 2차 해고되었다.
열사는 95년 5월 해고무효소송중으로 조합원 신분이 유지됨에도 불구하고 조합행사에 참가하려는 열사를 회사 경비들이 폭력적으로 저지하는데 항거하여 분신하였다. 양봉수 동지 분신 대책위원회가 구성되었고 대책위는 부당노동행위 중지 정당한 조합활동 보장 등을 내걸고 파업에 돌입하였다. 5월19일 공권력이 투입되어 분신대책위지도부를 구속하였고 250여명의 노동자들이 연행되었다. 양봉수열사는 6월13일 32일만에 운명하였고 양열사분신대책위의 투쟁은 현대자동차에 민주노조가 재탄생되는 계기가 되었다.
4. 캄코(구 만도기계) 구속자 : 정근원(현재 위원장)등 2명
98년도 만도기계는 우량한 회사였지만 한라그룹계열사에 대한 7,000억원에 달하는 무리한 자금지원으로 인하여 부도를 맞았다. 부도이후 노사는 인위적인 인원감축을 하지 않으며 인수 분할 매각 합병 시 고용을 승계한다는 단체협약을 맺었음에도 불구하고 1163명의 인원을 일방적으로 고용조정하겠다는 통보를 해왔다.
이에 항의하여 노조(위원장 황성근)의 파업이 이루어졌고 즉각적으로 공권력이 투입되어 2,600여명 연행 41명 300명 불구속 입건 600여명 즉결심판회부라는 유례없는 탄압이 이루어졌다. 공권력투입이후 상여금300%일방반납 1천여명에 달하는 인원감축이 회사측에 의해 일방적으로 이루어졌다. 또한 그후 회사의 분할매각이 이루어졌고 캄코는 만도에서 분할매각된 회사이다.
5. 전기협투쟁관련 구속 해고자 : 김홍철외 2명
철도노조의 기관차지부를 중심으로 한 전국기관차 노조지부협의회는 서울지하철, 부산교통공단노조등과 함께 1994년 전국지하철노동조합협의회를 결성하였다. 전기협은 3사의 근로조건이 정부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점에 근거하여 공동투쟁을 하기로 하고 6월에는 공동집회 공동쟁의일정발표 등 공동행동을 개시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에 쐐기를 박고자 김영삼정부는 전기협간부들에 대한 사전구속영장을 발부받아 6월23일 새벽 전기협 농성장에 공권력을 투입하였다. 641명이 연행되고 13명이 구속되었고 전기협(의장 서선원)은 즉각적으로 항의 파업에 돌입하였고 6월24일 서울지하철 6월25일 부산교통공단노조가 파업에 돌입하였다. 이 파업은 7월초 마무리되었고 전기협은 13명구속외에 50여명의 해고자를 낳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