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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보도

[자료]신뢰를 깨는 정권(문정현 신부 글)

작성일 2001.11.06 작성자 교육선전실 조회수 2449
<한겨레 2001.11.6>에 실린 문정현 신부 글입니다.

신뢰를 깨는 정권


저는 1980년도 후반부터 `노동사목'이라는 활동을 통해 노동자들과 깊은 관계를 맺고 살아왔습니다. 조직적 관계는 없었지만 `전노협' 시절부터 민주노총 단병호 위원장를 곳곳에서 만났습니다. 주로 투쟁의 현장에서 만났지만, 그가 수배중에 지역의 노동자를 방문하면 안전한 장소가 없어 잠자리를 제공하기도 했습니다. 때문에 우리의 만남은 호화롭고 편안한 자리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소탈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외모에 마음 따뜻한 사람이지만, 노동대중의 이익을 대변할 때는 단호한 자세로 항상 투쟁의 중심에 서 왔습니다.

그런 연유로 단병호 위원장은 감옥생활을 많이 한 사람입니다. 지난 10년 동안 6년 9개월을 수배 및 구속 상태에 있었습니다. 김대중 정권 아래서 벌써 세 번째 감옥살이를 하고 있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는 터입니다.

김 정권의 신자유주의 정책 이후 노동자들은 정리해고와 비정규직의 증가, 고용불안 등으로 심각한 생존권 위기를 겪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롯데호텔의 비정규직 노동자 문제, 사회보험 노동자의 장기파업, 한국통신의 비정규직 노동자 6천여명 해고, 부평 대우자동차 해외매각과 노동자 1750명 정리해고는 현재 노동자들이 처한 상황과 문제가 어디에 있는지를 잘 알게 해주었던 큰 사건들이었습니다. 이러한 사건의 중심에는 늘 민주노총의 단병호 위원장이 있었습니다. 노동자들의 아픔을 대변해 왔던 그는 노동조합 지원과 관련해서 무려 28건에 대해 죄를 지었다는 이유로 현재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어 있습니다.

돌아보면 지난 6월, 정부와 민주노총은 강경대응과 총파업이라는 갈등으로 치달았고 그 과정에서 민주노총 간부들은 수배를 받아 갈 곳이 없는 상태에서 명동성당을 은신처로 삼아 농성을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70년대부터 군부독재와 싸우며 이 땅의 민주화를 위해 오랫동안 활동해왔던 김승훈 신부는 노동자의 편에 서서 민주노총과 정부 사이의 원만한 대화를 통해 노동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노력하였습니다. 그래서 대통령을 만나고, 청와대 비서실장도 만나 협의하여 좋은 결실을 이루어냈습니다. 그간 노동문제에서 발생한 수많은 수배 노동자들의 구속을 최소화하고 단 위원장의 경우 형집행정지로 남은 형기(2개월 4일)를 채우고 나머지는 문제삼지 않기로 하였습니다. 이러한 결정을 받아들여 김 신부와 명동성당 부주임 신부가 피신했던 민주노총 간부들을 서울 지방경찰청까지 데려다 주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농성이 풀렸습니다.

그러나 만기가 될 무렵 검찰은 갑자기 단 위원장에게 4가지 조항의 항복문서를 요구했습니다. 불법집회 반성, 불법집회 근절, 불법파업 주도 근절, 노사정협의회의 복귀였습니다. 이것을 거부하자 단 위원장을 결국 재구속하였습니다. 서로의 신의로써 확인한 약속을 정부는 손바닥을 뒤집듯 파기하였습니다. 물론 법은 지켜야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균형 있게 집행해야 합니다. 경제를 망친 부패주범들과 부패검찰에 대해서는 처벌하지 않으면서 생존권을 위한 노동자들의 투쟁만을 문제삼는다면 이는 법 집행의 형평성에도 어긋나는 일입니다.

정의구현사제단 대표 4명은 대우자동차 노동자들이 8개월 째 농성하고 있는 인천 샤미나드 피정센터에서 9일 간의 단식농성을 하였습니다. 현 정권의 회개를 촉구하고 노동자들의 아픔에 동참하지 못한 우리를 반성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올 들어 구속된 노동자의 수가 200여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가난한 이들을 눈물짓게 하며, 믿음과 신의를 목숨처럼 여기는 교회와의 약속도 파기하는 것이 현 정권의 통치수준이라면 이는 심각한 문제입니다. 단병호 위원장은 조건없이 석방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사건이 정부과 국민 사이에서 신뢰를 회복하는 초석이기 때문입니다. 정책에 실패한 정권은 용서받을 수 있으나, 신뢰를 깨뜨리는 정권은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이제는 결단과 선택만이 남았습니다.

문정현/신부·정의구현전국사제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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