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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암만에서 온 편지7

작성일 2003.03.22 작성자 교육선전실 조회수 3269
암만에서 보내는 편지 7

오늘이 벌써 서울을 떠나온 지 일주일째이군요. 이 편지를 쓰고 있는 동안 숙소의 CNN에서는 미국 전투기가 바그다드에 폭격을 가했다는 소식으로 가득합니다. 마치 물 만난 고기처럼 바그다드 폭격 소식을 전하는 저들에게 그 폭격에 의해 희생당하고 억압받는 사람들의 존재는 과연 어디에 있는지 궁금합니다.

오늘 암만에서는 두 개의 반전시위가 있었습니다. 물론 둘 다 정부의 허가를 받지 않은 '불법 시위'였습니다. 사실 요르단에서 시위 허가를 받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대표단과 같은 외부인이 허가받지 않고 자발적으로 진행되는 시위에 참여하기란 여간 어렵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정보를 얻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했고, 결국 오늘 두 개의 시위가 전개된다는 사실을 파악하게 되었습니다.

3월 21일 오전 11시 30분. 우리는 암만 시내 중심가의 알 후세인 모스크(이슬람 교회)에서 기도가 끝난 다음, 시위가 전개될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하고, 급히 호텔(압자르 호텔)을 나섰습니다. 택시를 타고 이동하면서, 묘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이국(異國)에서 불법 시위를 하는 게 우리들에게 상당한 긴장과 흥분을 가져다 준 모양입니다. 도착하니 벌써 시위대가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습니다. 약 400여명 정도입니다. 그들은 이라크 전쟁 반대를 외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시위 대열은 약 15분 정도 견디나 싶더니 곧바로 경찰의 강경 진압에 의해 해산되고 말았습니다. 시내 중심가여서 그런지 경찰은 시위대에 일말의 여유도 주지 않고, 최루탄을 쏘아서 해산시켜 버렸습니다. 그 덕분에 우리는 처음으로 요르단 경찰의 최루가스를 맡을 수 있었습니다. 가볍게 코만 간지러울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아쉽더군요. 준비해간 피켓과 플래카드, 몸 벽보를 써보지도 못하고, 해산당하고 말았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또 한번의 기회가 있었습니다. 오후 1시 30분경. 와히다드(Wehdat)라는 팔레스타인인 거주지역에서 전개될 시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택시로 이동했습니다. 이번만은 허무하게 끝내지 않으리라는 불 같은 의지가 샘솟더군요. 저 말고도 다른 두 분(김형탁 부위원장, 김정욱 부장)도 마찬가지였는지, 택시 안에서는 내내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습니다.

와히다드에 도착하여 택시에서 내리자 마자, 우리의 시선이 한 곳에 모아졌습니다. 시위대가 우리의 시야에 보이지는 않았지만, 우리는 감각적으로 '저곳이다'라는 느낌이 온 것입니다. 가투 문화에 단련된 한국 활동가의 동물적 감각이 이렇게 쓸모가 있을 줄이야. 우리는 그곳으로 뛰기 시작했습니다. 가장 체격이 좋은 김정욱 부장이 저 멀리 앞서 나가고, 제가 중간, 역시 '연로'한 김형탁 부위원장은 마지막을 차지했습니다. 가슴이 쿵쾅쿵쾅 뛰어 오더군요. 아니나 다를까 13,00여명 규모의 거대한 시위대가 와히다드 중심거리에 이미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김정욱 부장은 기민하게도 우리가 준비해 간 플래카드, 피켓, 몸 벽보를 팔레스타인 시위대에게 나눠주었습니다. 시위대의 반응은 거의 폭발적이었습니다. 사실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삶은 곧 격렬한 투쟁의 과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위 참가는 대단히 자발적이지만, 반면 조직적인 준비와 진행은 조금 미약한 게 사실입니다. 그들은 피켓, 플래카드 등을 거의 준비하지 않았던 거죠. 이런 상황에서 민주노총 대표단이 준비해간 몸 벽보와 피켓은 순식간에 동나고, 플래카드는 우리의 손에서 떠나 다른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손에 쥐어져 있었습니다. ( 따로 보낸 사진 파일을 보시면 당시 상황을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

김형탁 부위원장, 김정욱 부장은 평소에 갈고 닦은 가투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시위대와 자연스럽게 합류하고, 결합하였습니다.(저는 사진을 찍고 있었습니다.) 우리를 포함한 시위대는 큰 길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거기에는 곤봉을 든 경찰이 지켜서 있었고, 그들은 최루탄을 쏘아댔습니다. 최루탄의 성분은 한국에 비해 농도가 턱없이 약했지만, 오랜만에 맡아 보아서인지 눈물이 나더군요. 살상용 한국 최루탄에 단련된 사람으로서 조금 창피했습니다.(이곳 사람들은 최루가스 대응책으로 치약 대신 양파를 쓰더군요. 한국 이라크평화팀의 한 분은 팔레스타인인이 양파를 줬는데, 용도를 한참 고민하다가 그냥 먹어버렸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경찰이 최루탄을 쏘면서 쫓아오자 우리는 시위대와 함께 도망갔고, 그 과정에서 가투 과정에서 항상 생기는 문제 중 하나가 발생한 것입니다. 일행이 흩어지고 만 것입니다. 가투에 나가기 전에 '흩어지면 호텔로 돌아오고, 경찰에 잡히면 절대 저항하지 말고 곧바로 대사관으로 연락할 것'이란 얘기를 나누고 나갔지만, 막상 세 명이 흩어지니 다른 두 분이 걱정이 되더군요.

다행히 김형탁 부위원장은 핸드폰이 있어서, 연락이 되어 다시 만났지만, 결국 김정욱 부장과는 만나지 못했습니다. '어디에 잘 있겠지'라고 자위하면서, 김형탁 부위원장과 저는 한국이라크평화팀과 함께 다시 시위대에 결합했습니다. "No War, Yes Peace"를 외치며 시위대의 선두에 서서 팔레스타인인들과 함께 경찰 저지선쪽으로 향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팔레스타인인들은 돌을 던지기 시작했고, 경찰도 시위대를 향해 거의 직격탄 수준으로 최루탄을 쏘아댔습니다.

'평화와 폭력'은 분명 모순적이지만, 팔레스타인인들의 역사와 삶을 우리가 이해한다면, 그들이 왜 돌을 집어 던지는가도 이해가 됩니다. 그들은 결코 준비되지 않은 시위를 했지만, 그 어떤 시위보다 생명력 있고 활력이 있었습니다. 그건 말 그대로 '삶이 곧 투쟁'인 역사를 온 몸으로 가지고 있는 사람들만이 줄 수 있는 느낌일 것입니다.

시위는 약 1시간 30분 정도 진행되었습니다. 민주노총 대표단과 한국
이라크평화팀은 일단 오늘은 이쯤에서 철수하고 내일 투쟁을 준비하기로 하고, 각각 택시를 타고 숙소로 이동했습니다.

우리는 시위 사진을 시내 사진관에서 그림 파일로 전환한 후, 한국 이라크 평화팀이 묵고 있는 아미라 호텔로 이동하였습니다. 오후 5시 민주노총 대표단과 한국 이라크 평화팀 간에 간담회를 갖기로 하였기 때문입니다.

간담회에서 민주노총과 한국 이라크평화팀은 각각 암만과 이라크에 온 문제의식을 서로 나누고, 암만에 있는 동안 함께 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해 논의했습니다. 일단 긴급한 사안으로 노무현 정부의 이라크 전쟁 지지와 파병 방침의 철회를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현지 시간으로 3월 22일 오전 10시 한국 대사관 앞에서 하기로 했습니다.(기자회견문은 별도자료로 올립니다-교육선전실)
비슷한 시간(3월 22일 오후 4시)에 한국에서도 반전 집회가 열리겠지요. 함께 연결시킬 수 있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팔레스타인인들과의 집회에서 외국인 참가자는 한국 활동가들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인지 팔레스타인인들의 관심은 대단했습니다. "꼬레, 꼬레"를 외치면서 계속 따라다녔습니다. 심지어 철수하기 위해 택시 타러 가는 데도 우리를 따라와서 곤혹스럽게 하더군요. 마치 가투하다가 중간에 집에 들어가는 기분을 들게 만들더군요. 그래도 어쩌겠습니다. 결국 그들의 해방은 그들의 힘에 의해서
쟁취되는 것일 테니까요. 우리의 몫은 그들의 삶을 이해하고, 연대의 손을 내미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앞으로 이러한 '불법 시위'가 자생적으로 전개될 것으로 보입니다. 요르단 정부도 시위를 철저하게 통제하지만, 현재 미국의 이라크 공습이 전면적으로 전개되고 있는 상황에서 시위 자체를 완전히 봉쇄하지는 못할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다가는 팔레스타인인들의 전면적인 반란으로 이어질 우려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와 한국 이라크평화팀은 당분간 이러한 시위에 적극적으로 결합하고, 나아가 암만에 들어와 있는 국제평화활동가들과의 연대 시위의 조직화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습니다.

3월 22일 새벽 2시, 암만에서
민주노총 전쟁반대 대표단 이창근(민주노총 국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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