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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개의 찬란한 태양] - 신동훈

작성일 2009.01.29 작성자 문화미디어실
[천 개의 찬란한 태양] 할레드 호세이니 지음, 왕은철 옮김, 현대문학사

통속의 힘
이 소설의 이야기 구조는 대중들에게 익숙하다. 떠난 남자를 가슴에 품은 채 고난을 견디고, 다시 돌아온 남자와 행복한 결말을 맞는다는 것은 우리로 치면 춘향전을 연상시킨다. 죽은 친구의 이름을 태어난 아이에게 지어준다는 것도 헐리우드 영화에서 종종 보이는 결말이다. 그럼에도 읽는 내내 가슴이 먹먹하고 오랜만에 눈물까지 흘리게 만든 것은 무엇이었을까. 통속적이라는 말은 보통 부정적인 뉘앙스를 풍기지만, 그것은 그만큼 대중들에게 '먹히는' 이야기틀이기 때문에 많은 작가들이 사용한 탓이기도 할 것이다. 할레드 호세이니가 춘향전을 읽었을 리 없다면, 우리가 통속이니 신파니 하며 낮춰보는 이야기 구조가 어쩌면 인간을 감동시키는 보편적 힘을 지니고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해보았다.

다시 만나자
소설은 새로 태어날 아이가 딸이라면 이름을 마리암으로 짓겠다는 것을 암시하면서 끝이 난다. 그 마지막 한 줄을 읽은 순간 갑자기 눈물이 뚝 떨어졌다. 어라...이게 뭐지. 나 스스로도 당황했다. 왜 하필 여기서일까. 시간이 좀 지나서 생각해보았다. 마리암과 라일라는 크게 대비된다. 라일라는 타리크, 아이, 재건사업참여 등에서 미래에 대한 희망을 보고 있다. 하지만 마리암은 그야말로 고난과 희생으로 점철된 삶을 살다 결국 감옥에서 비참하게 죽음을 맞이한다. 너무나도 가련하고 불쌍하다. 마지막 문장에서, 읽는 내내 이렇게 내 가슴을 연민으로 가득 채웠던 마라암이 다시 살아 돌아왔다는 느낌을 받았나보다. 죽은 줄 알았던 평생의 친구가 환하게 웃으며 갑자기 내 앞에 나타난다면...

개인과 사회
갈등의 주요 원인이 라시드라는 개인에게 있는 듯해서 다소 불만도 있었다. 그것은 아마도 소설의 상당 부분이 라시드의 집이라는 사적 공간에서 진행되기 때문인 것 같다. 마리암과 라일라의 비참한 삶의 원인을 라시드 개인에게서만 찾는다면 라시드 하나만 제거함으로써 모든 것은 해결될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이 소설의 분위기상 그런 것 같지는 않다. 가령, 마리암과 라일라가 탈출을 시도했다가 다시 집으로 돌려보내지는 과정, 라일라가 딸을 고아원에 맡기는 장면, 마리암이 살인죄로 수감되고 재판을 받는 과정에서 사회구조적 모순이 충분히 드러난다고 볼 수 있겠다. 라시드는 아프간 사회체제의 문제점을 대표하는 존재로 보는 것이 맞겠다. 그러나 이 소설의 전체적 분위기 상 그렇다는 것일 뿐, 개인의 폭력적 성향이나 비인간적 행태에 개인의 병리적 원인이 있음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범죄적 행위를 개인의 차원에서 볼 것인지 제도적 모순으로 볼 것인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쟁중이다.

문화상대주의와 보편주의 - 인권
소설에서 라시드나 탈레반이 거의 절대악적 존재로 묘사되는 반면 미국은 아프간 사회의 모순을 해소할 마지막 희망으로 암시되고 있다. 그러나 아프간 사람들이 이 소설을 읽는다면 이에 대해 전적으로 공감할까. 혹은 토종 아프칸 소설가가 같은 소재로 소설을 쓴다면 분위기가 사뭇 다르지 않았을까... 소설을 읽는 내내 이러한 생각을 지우기 어려웠다. 할레드 호세이니가 비록 아프간 출신이긴 하지만, 15세에 미국으로 이주하여 40대 중반인 현재까지 미국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도 이런 생각에 한몫했다. 아프간 사회의 상황이 절망적이라 하여 이를 밀어버리고 미국식 자본주의를 이식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에는 논란이 있을 것이다. 인권, 평등, 자유 등의 서구적 개념이 오늘날 충분히 보편적인가에 대해서도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뿐만 아니라 강대국이 인권문제 등을 근거로 후진약소국에 정치군사적 개입을 한 것이 늘 바람직한 결과를 도출하지도 않았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할 때 소설은 미국적 시각을 주로 반영한 같아 조금 불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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