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제도 개편 논란에 대한 민주노총의 입장
최근 선거제도 개편을 둘러싸고 벌어지고 있는 논란을 보는 우리의 입장은 우려를 넘어 분노를 금할 수 없다. 사실 선거제도야말로 정치 관련법 중에서도 가장 공정하고 공평해야만 한다. 따라서 선거제도는 특정 정파(정당)의 유, 불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민주주의의 원칙과 정신을 최대한 반영하고 구현하는 차원에서 최상의 방안을 찾아야만 한다. 그런데 새누리당과 새정치민주연합은 민주주의의 원칙과 정신은 내팽개친 채 오직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안만을 정하기 위해 골몰하고 있다. 지금대로라면 선거법이 또 다시 누더기로 귀착될 가능성이 거의 확실시 되고 있다.
보수양당 체제의 영속화를 획책하는 선거제도 개편논의를 중단하라!
알다시피 현행 선거법 개정 문제는 헌법재판소의 결정에 따라 강제된 것이다. 헌재 결정이 말하고 있는 핵심은 ‘선거의 평등원칙’, 즉 표(주권)의 등가성을 민주주의의 원칙과 정신에 맞게 바꾸라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당득표율에 따라 의석수가 결정되도록 해야 한다. 이게 가장 본질적인 것이며, 그 나머지 것들은 부차적인 것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선거제도가 득표율에 따라 의석수가 결정되도록 될 때만이 나머지 문제들도 그에 따라 개선될 수 있는 것이다.
현 한국의 민주주의와 선거제도는 1987년의 역사적 산물이다. 민주노총이 중심이 되어 시작한 ‘진보정당’ 운동이 오늘의 열악한 현실을 맞게 된 제도적인 원인의 하나도 바로 1987년이 만들어 낸 선거제도다. 만약 선거제도가 위에서 말한 대로 정당득표율에 따라 의석수가 결정되는 방식이었다면 ‘진보정당’은 벌써 원내 교섭단체를 이루고도 남았다. 그랬더라면 한국의 정치지형과 정치현실은 지금과는 전혀 다른 양상을 띠었을 것이 분명하다. 백 번을 양보해 한국의 수구기득권 세력이 기를 쓰고 말하고 있는 이른바 ‘자유민주주의’를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자신들이 말하고 있는 ‘자유민주주의’를 선거법에 반영하는 것조차 스스로 거부하고 있다. ‘자유민주주의’와 표(주권)의 등가성을 인정하는 제도는 서로 모순되거나 충돌하지 않는다.
헌재 결정의 취지를 왜곡하는 선거제도 개편 논의를 규탄한다!
헌재는 표(주권)의 등가성을 현행 3대 1에서 최대 2대 1을 넘지 말라는 결정을 했다. 원칙적으로 말하면 그것은 1대 1이 되어야 한다. 즉 1표는 1표로서의 정당한 권리가 보장되고 행사되어야 한다. 이른바 사표는 불가피한 것이 아니라 제도에 따라 인위적으로 발생하는 것 일 뿐이다. 백 번을 양보해 헌재의 결정을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지금 새누리당과 새정치민주연합은 헌재의 결정조차 사실상 무력화시키려 하고 있다. 그들은 2대 1을 오직 형식적으로만 받아들이고 있을 뿐, 2대 1이 의미하고 있는 본질과 내용은 전혀 수긍하고 있지 않다. 그들은 지금 중앙선관위가 제시한 지역구(의석수) 대 비례대표(의석수)를 2대 1로 하자는 방안마저 거부하고 있다. 비록 중앙선관위가 제시한 방안에도 문제가 있지만, 그렇더라도 중앙선관위 방안에는 표(주권)의 등가성을 제한적으로나마 회복하고 나아가 ‘지역주의 완화’와 ‘정당 활성화’에 대한 고민이 담겨 있다. 한국의 지역주의가 선거제도로만 바뀔 수 있는 성격은 아니지만 제도만으로도 지금의 왜곡된 현실을 충분히 완화할 수 있는 것은 분명하다. 또한 중앙선관위가 말하는 ‘정당 활성화’란 거대 정당 이외의 (소수)정당을 염두에 둔 것이다. 새누리당과 새정치민주연합은 이조차 받아들일 생각이 거의 없다.
특히 새누리당과 수구기득권 세력은 이 기회에 비례대표제를 아예 없애거나 그게 안 되면 현행보다도 오히려 더 줄이자는 주장을 하고 있다. 그들은 대통령중심제를 채택하고 있는 나라, 특히 미국의 경우에 비례대표제가 없다는 것과 한국의 현실에서 비례대표제가 부정/부실하게 운영되고 있다는 행태를 근거로 디밀고 있다.
그러나 미국과 한국의 현실은 전혀 다를 뿐만 아니라 미국의 제도가 옳은 것도 아니다.
또한 비례대표제를 부실하게 운영했다면 그건 그렇게 운영한 정당(거대 양당)의 문제이지 제도의 문제가 아니다. 비례대표제는 표(주권)의 등가성을 살리고, 특히 소수정당(우리의 경우 ‘진보정당’)의 의회진출을 가능하게 하는 유력한 제도이다.
이와 함께 의원정수를 늘리는 것도 적극 추진해야 한다. 새정치민주연합은 의원정수를 늘리자는 의견을 잠깐 제시했다가 바로 거둬들였다. 이는 그 제안을 밀고 나갈 자신감과 의지가 전혀 없다는 것을 스스로 폭로하고 만 셈이다. 하물며 안철수 의원은 의원정수를 줄이는 것이 마치 정치개혁인 것처럼 어이없는 주장을 한 바 있다. 물론 의원정수를 늘리는 것이 결정적 문제는 아니다. 그러나 현실의 구체적 맥락에서 볼 때 의원정수는 비례대표의원정수를 증원(축소)하는 것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으며, 나아가 더 중요하게는 의원 1인당 인구대표성을 산정하는 문제와도 직결되어 있다. 세계적인 예를 보더라도 의원 1인당 대략 인구 십만 명을 산정하고 있다.
의원정수를 늘리는 것에 따르는 비용 문제나 국회의원 특권 줄이기는 별개로 검토되어야 한다. 지금 수구정당은 의원정수 문제를 대중의 정치 불신 내지 무관심을 유발하고 조장하는 수단으로 사용함으로써 실제로는 자신들만의 기득권을 위한 방편으로 삼고 있다.
의원정수를 대폭 확대하고
전국단위 독일식 정당명부 비례대표제를 도입하라!
지금 새누리당과 새정치민주연합은 일단 의원정수 300명(기존)을 고정한 채, 그 속에서 지역구 대 비례대표의 배분 문제를 놓고 줄다리기를 하고 있다. 새누리당은 비례대표의원정수와 관련하여 현행보다 오히려 더 줄일 태세이고, 새정치민주연합은 기껏해야 현행을 고수하는 정도에 그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또한 비례대표제 방식과 관련하여, 새누리당은 현재의 병립형을 고수하는 것을 전제로 권역별이든, 전국단위든 상관없다는 태도고, 새정치민주연합은 연동형을 주장하고는 있지만, 이보다는 중앙선관위가 제시한 권역별을 선호하고 있다.
그러나 비례대표제가 갖는 본래의 의미를 최대한 살리고 현재의 거대 양당 체제를 개혁하기 위해서는 (전국을 하나의 단위로 하는) 독일식 정당명부비례대표제를 도입해야 한다.
그럴 때만이 헌재의 결정이 갖는 의미를 조금이라도 살릴 수 있으며, 중앙선관위가 제기한 ‘지역주의 완화’와 ‘정당 활성화’가 조금이라도 현실화 될 수 있다.
그런데 최근 양당이 합의해 의원정수를 제외한 나머지 문제를 ‘선거구 획정위원회’로 넘긴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이들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다.
한편 독일식 정당명부비례대표제를 도입한다고 해도 비례대표 배분 자격과 관련해서도 자격 기준을 대폭 완화해야 한다.
중앙선관위가 권역별 비례대표제를 말하면서 제시한 전국득표 3% 이상 또는 지역구 5개 지역 이상 당선된 정당 기준은 전국득표 1% 이상 또는 지역구 당선 1개 지역 이상 당선된 정당으로 완전히 낮추어야 한다.
이럴 경우 정당 난립 문제가 발생할 우려가 있다는 주장이 있지만, 지금 한국은 정당 난립이 아니라 정당 독과점으로 인한 폐해가 훨씬 심각한 현실이다. 오히려 수구세력이 정당 난립을 우려하는 것은 사실 자기들만의 기득권이 조금이라도 손상될 것에 대한 걱정에 불과하다.
민주노총은 이중으로 손상되고 침해받고 있는 노동자.민중의 주권을 회복하기 위한 투쟁에 나설 것이다. 비록 헌재 결정으로 촉발되고, 중앙선관위가 제시한 것이 계기가 된 한계가 있다 할지라도 지금 새누리당과 새정치민주연합이 보이고 있는 행태를 더는 묵과할 수 없다. 그들은 이 시간에도 한국정치를 영원히 보수 양당체제로 가져가기 위한 온갖 술책을 획책하고 있다. 노동자 민중의 피와 땀으로 성취한 민주화의 성과를 가로채 이를 기반으로 오히려 노동자 민중을 억압하고 탄압하고 있는 현실을 우리는 더는 방치할 수 없다.
민주노총은 노동자 스스로 권력과 정치의 주체로 나서기 위한 선거제도 개편 투쟁에 나서고자 한다.
- 헌재 결정의 취지를 왜곡하는 선거제도 개편 논의를 규탄한다!
- 보수양당 체제의 영속화로 귀결될 선거제도 개편논의를 중단하라!
- 의원정수를 대폭 확대하고 전국단위 독일식 정당명부 비례대표제를 도입하라!
2015년 9월 1일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