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평]
한국노동연구원, 주먹구구 산수할 정도로 한가한가?
10월 14일 한국노동연구원이 소위 ‘노동시장 구조개선을 위한 노사정 합의’를 바탕으로 일자리가 얼마나 늘어날지를 예측(시뮬레이션)한 결과를 발표했다. 보도자료는 ▲상위 10% 임금인상 자제에 따른 고용효과 ▲근로시간 단축의 고용효과 ▲임금피크제 도입의 고용효과 세 부분으로 나눠 그 결과는 추정했다. 한 마디로 정부의 입맛에 맞춘 ‘단장취의(斷章取義)’요, ‘곡학아세(曲學阿世)’라 하겠다.
한국노동연구원의 분석은 노동시간 단축을 제외한 나머지 두 가지는 노동자의 임금을 깎아서 일자리를 창출한다는 식으로 자본의 관점을 대변한다. 제아무리 정부 눈치 살피는 정부 출연 연구기관이라지만 적어도 국민세금으로 운영되고 객관적인 학문의 잣대로 연구결과를 산출할 의무를 지닌 국책 연구기관이 할 일은 아니다. 기업 연구소도 아니고 그토록 계급 편향적 시각으로 접근하면서 무슨 신뢰를 기대하는가.
노사정 합의 자체가 노동자의 희생을 강요하는 부분은 구체적으로 명시하고 법제화로 강제한 반면, 사측에게 요구되는 부분은 추상적이고 하든 말든 상관없는 신사협정으로 얼버무리는 희대의 야합이다. 이러한 합의 중 자본의 입맛에 맞는 부분만 따로 떼 내서 제멋대로 해석한다면 그것을 누가 공정한 연구 결과로 인정하겠는가. 한국노동연구원이 일말의 양심이 있다면, ‘대기업, 공기업은 청년 신규채용 규모를 확대하기 위한 제반 조치를 강구한다’는 부분에 대해서는 왜 시뮬레이션을 행하지 않는지부터 답해야 할 것이다.
구체적인 내용은 더욱 심각하다. 첫째, ‘상위 10% 임금인상 자제에 따른 고용효과 추정’의 경우, 근로소득 최상위 10%의 임금 동결에 따른 임금재원잉여분과 차상위 10%의 ‘최상위자 임금수준 상회 불가에 따른’ 임금재원절감분을 합친 액수(2,024억원)를 신규채용자 평균임금(월평균 226만원)으로 나누어 91,545명을 추가 채용할 수 있다고 추산한다. 한국노동연구원은 근로소득 분포를 추정함에 있어 고용노동부의 ‘고용형태별 근로실태조사’(1인 이상 모든 민간부문 근로자)를 이용하는데, 이 조사는 애초 공공행정·국방 및 사회보장 행정, 국제 및 외국기관 등 고임금 부문을 조사대상에서 제외하고 있다. 상위 근로소득자를 파악함에 있어 국세청 근로소득세 납부 자료 등을 얼마든지 활용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민간부문에 국한된 통계를 사용한 것은 뭔가 다른 저의를 의심하기에 충분하다. 이 의구심은 임금 동결로 창출되는 일자리의 59%가 제조업에서 발생할 것으로 추산하는 대목에서 더욱 커지는데, 결국 민간 대기업 정규직의 임금동결(물가상승률을 감안하면 임금삭감)을 정당화하기 위한 시뮬레이션으로 볼 수밖에 없다.
또한 이 시뮬레이션의 가정대로라면 임금 동결/삭감은 상위 10~20%의 고임금 노동자에 그치지 않을 것이다. 노동연구원은 상위 10%가 임금을 동결할 경우 차상위 10%도 상위 10%를 상회하는 임금을 받을 수 없으므로 그 수준에서 임금이 고정될 것이라고 가정하면서, “충격에 따른 경제주체들의 반응은 고려하지 않”는다고 했다. 결국 현실적 파급력을 고려하지 않은 숫자놀음이라는 것이다. 실제로는 상위 노동자의 임금이 동결/삭감되면, 단계적으로 하위 노동자의 임금 동결/삭감이라는 연쇄 효과를 낳을 가능성이 높다. 무미건조한 숫자놀음으로 정규직을 공격함으로써 종국에는 전체 노동자의 임금을 삭감하려는 불순한 의도가 숨어있는 것이다. 초등학교 수학에나 나오는 사각형, 삼각형 넓이 구하기 공식을 복습하는 것이 본 연구의 목적이 아니라면 말이다.
백보 양보해서 이 시뮬레이션에 아무런 방법론적 결함이 없다하더라도, “(임금 인상 자제로 발생하는 재원에) 상응하는 기업의 기여를 재원으로 하여 청년 채용을 확대하고, 비정규직·협력기업 근로자의 처우개선을 추진한다”는 합의 문구에 대해선 아무런 언급도 없는 것을 볼 때 한국노동연구원의 공정성과 형평성에 심각한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기업의 기여를 재원으로 합치면 두 배의 고용창출 효과가 있을 텐데도 왜 노동연구원은 입을 굳게 닫고 있을까. 이로써 앞서 지적한 연구의 불순함과 편향적 의도성을 다시 한 번 분명히 확인하게 된다.
둘째, 한국노동연구원은 ‘대기업은 2016년부터, 중소기업은 2017년부터 전 사업장에서 임금피크제를 도입하며, 정년 60세 의무화로 발생하는 기업부담을 감액, 신규채용 재원으로 활용한다’는 전제 하에 2016~2019년간 창출 가능한 신규 청년 일자리 규모를 최소 8만 7천 9백개, 최대 13만 2천 569개로 추산한다. 그러나 누차 지적하였듯이, 정년연장 법제 도입과 임금피크제 확대를 연계한다는 발상이 기업 편향적임은 물론 고령 노동자의 임금을 삭감해서 청년 노동자의 고용을 창출한다는 발상도 규범적으로 옳지 못하다. 무엇보다 민간 기업이 노동비용 절감분을 신규 창출로 전환한다는 주장은 기업의 이윤논리와 그간 사회적 책임을 방기한 그들의 행태를 의도적으로 제외한 ‘악의적 전제’부터가 오류다. ‘정년 연장이 추가 노동비용을 발생시켜 기업의 경영을 압박’한다거나 ‘고령근로자의 임금이 생산성을 초과’한다는 등 사실관계가 전혀 확인되지 않은, 정확히 말하면 거짓으로 밝혀진 명제를 공리(公理)처럼 갖다 붙이는 버릇도 여전하다. 앞서와 마찬가지로, 임금피크제를 통한 고용 창출 효과를 추정하는 시뮬레이션 자체가 대전제, 소전제, 결론 모두 그릇된 논리 전개요, 하나마나 한 숫자놀음에 불과하다.
한국노동연구원의 이번 자료는 편향적 시각에서 출발한 연구가 얼마나 부적절하고 부당한 결론으로 이어지는지를 똑똑히 보여준다. 대단히 실망스럽게도 한국노동연구원은 정부의 나팔수를 자처하면서 학문의 공정성, 학자로서의 양심마저 져버렸다. 노동연구원에게 촉구한다. 노사정 야합을 주먹구구 산수로 정당화하려고 발버둥치지 말고, 노사정 야합이 불러올 노동재앙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살펴보길 바란다. 학자 된 본분을 잊지 말고, 국책연구기관의 사명을 망각하지 말길 바란다. 우리 노동시장의 진정한 문제점이 무엇인지, 그것의 실제 원인은 무엇인지를 규명할 책임이 있다. 그 양심에 충실할 때, 훗날 노동연구원이 노동개악의 종범(從犯)으로 역사에 기록되지 않는 유일한 길이다.
2015. 10. 15.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