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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보도

[배태선 전 조직실장 항소심 모두진술 전문]

작성일 2016.10.04 작성자 교육선전실 조회수 3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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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작년 11월 14일 민중총궐기를 주도했다는 이유로 1심에서 징역3년을 선고받은 민주노총 전 조직쟁의실장 배태선입니다. 오늘 항소심을 시작하면서 슬픔과 분노, 통한이 뒤섞인 복잡한 심경으로 이 자리에 섰습니다.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는 작년 11월 14일, 무너져 내리는 농촌과 농민의 삶을 살리기 위해, 박근혜 대통령이 후보시절 농민들에게 약속했던 공약을 지키라고 요구하기 위해 보성에서 서울로 왔습니다. 그날 이후 그는 다시는 집으로 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그는 그날 오후 6시58분 경찰이 정조준해 가격한 직사물대포를 맞고 쓰러졌습니다. 두개골이 파열되었습니다. 317간 그는 사경을 헤매다 지난 9월25일 끝내 숨졌습니다. 그의 이름은 백남기입니다.

그에게는 어린 손자가 있습니다. 어린 손자는 할아버지의 무릎에 앉아 재롱을 떨었습니다. 그때마다 할아버지는 하늘처럼 넓고 따뜻한 가슴으로 어린 손자를 안아줬습니다. 살아있었다면 지금쯤 가을 들판에서 자신이 키운 벼를 추수하고 마을 사람들과 막걸리를 나누며 함박웃음을 지었을 겁니다. 아침 밥상에서 아내가 끓여준 된장찌개를 먹으며 맛있다고 말해주던 자상한 남편이었습니다. 백민주화라고 이름지었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둘째딸, 멀리 네덜란드로 시집간 딸에게 전화로 안부를 묻던 애틋한 부정을 가진 아버지였습니다. 소박하지만 단란했던 한 사람의 생이 무너져버렸습니다. 남겨진 가족들의 일상은 처참히 짓밟히고 깨어졌습니다. 그러나 백남기농민을 죽인 자들은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고 있습니다. 도리어 국가의 비호를 받으며 거리를 활보하고 있습니다. 이러고도 법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백남기 농민은 국가폭력의 희생자라는 걸 온 국민이 아는 마당에 경찰과 검찰은 사인을 밝히겠다며 부검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짓입니다. 이건 살인을 저지른 자들이 제 손으로 증거를 인멸하는 행위와 같습니다. 이게 정상적인 나라입니까? 이 정권은 도덕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완전히 파산했습니다.

강신명 전 경찰청장은 지난 9월 12일 국회에서 열린 백남기 청문회에서 “다치거나 죽었다고 무조건 사죄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했습니다. 이게 살인진압을 명령했던 자의 입에서 나올 수 있는 말입니까? 정상적인 인간의 사고와 감성을 가졌다면 할 수 없는 말입니다. 아무리 사람의 처지와 입장이 다르다 하더라도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동질성은 사람의 생명에 대한 존중입니다. 침묵하는 것도 예의입니다. 저는 그 청문회를 통해 침묵의 예의조차 배우지 못한 이 정권의 뻔뻔함과 비정함을 봤습니다.
정권은 백남기 농민에 대한 살인을 “정당한 공무집행”이라 강변합니다. 국민들이 국가가 정한 법과 제도를 준수하고 따르는 이유는 그 국가가 최소한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켜줄 것이라는 믿음에 기초합니다. 그런데 국가가 국민을 죽였다면 그 국가는 정당성을 잃었습니다. 어떤 공무도 국민의 생명 위에 군림할 수 없고, 국민의 안위에 우선할 수 없습니다. 공무가 국민을 위협하거나 생명을 앗아간다면 그건 이미 공무가 아니라 국가폭력이며 범죄입니다. 국민은 어떤 권력에게도 국민을 죽이고도 정당할 초법적 권한을 준 적이 없습니다.

강신명 전 경찰청장의 발언은 이 정권이 국민과 집회에 대해 어떤 인식을 갖고 있는지 생생히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들은 정부에 반대하는 국민은 다치거나 죽어도 괜찮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신념화되어 있습니다. 즉, 정부에 반대하는 국민은 국민이 아니라 적이며, 반대자들이 모이는 집회는 보호되어야 할 집회가 아니라 진압하고 섬멸해야 할 전투장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이 정권에서 경찰이 왜 집회 참가자들을 그렇게 적대시 했는지, 유독 민중 진영의 집회에 대해 왜 그렇게 과도하고 강경한 탄압으로 일관했는지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정권의 이런 인식과 신념이 전면적으로 드러난 게 바로 작년 11.14. 민중총궐기 집회에 대한 경찰의 유례없는 초강경 대응입니다. 경찰은 집회에 대비한 것이 아니라 내전에 준하는 전투 태세를 갖추었습니다. 갑호비상명령, 5만이 넘는 경찰병력, 경찰차 바퀴는 실리콘을 발랐고 경찰버스와 버스는 삼중으로 겹을 쳤고, 밧줄도 모자라 철제 와이어까지 동원되었습니다. 쇠파이프와 쇠갈고리, 캡사이신과 물대포는 방어가 아닌 공격에 사용되는 무기였습니다. 숨돌릴 틈없이 무차별적으로 쏟아져내리던 물대포가 백남기 농민을 직사해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은 그날 전역에서 경찰이 자행한 폭력적 행위에 비추어볼 때 벌어질 수밖에 없었던 필연적 결과였습니다. 경찰의 대응이 정상적 수준을 넘어섰다는 점은 환자 이송을 위해 현장에 온 구급차 안에까지 물대포가 쫓아가며 살수를 자행한 것만 봐도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1심 재판부는 이날 경찰의 모든 행위는 정당하며 다만 예외적으로 백남기농민에 대한 직사살수만이 위법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이건 사실일 수 없습니다. 경찰은 시위진압을 목적으로 오랫동안 체계적인 훈련을 받은 부대입니다. 또한 지시와 명령에 의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고 통제되는 조직입니다. 그날 경찰의 시위진압 양상은 모든 곳에서 대동소이했습니다. 그런데 유독 백남기 농민이 계시던 쪽의 경찰만 지시와 상관없이, 또는 지시를 어기고 일탈적 행위를 벌였다고 믿는 건 객관적 설득력도 없으며 사실에도 부합하지 않습니다. 백남기 농민을 죽음에 이르게 한 과도하고 폭력적인 진압행태가 일반적이었습니다. 또, 검찰과 1심 재판부는 민중총궐기 당일 벌어진 모든 개별적 행위에 대해 한상균위원장과 저에게 포괄적 책임을 물어 유죄를 선고했습니다. 이 논리대로라면 백남기농민을 죽인 살인진압의 책임자 강신명과 구은수는 마땅히 구속되어야 합니다.

사건의 진상이 밝혀지지 않는다면 백남기농민은 폭도라는 억울한 누명을 쓰게 됩니다. 이는 망자에 대한 모욕입니다. 또한 살인진압의 책임자를 처벌하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이 정권에서 정부에 저항하는 국민은 죽어도 좋다는 신호가 될 것이며, 강경진압에 의한 불행은 되풀이될 것입니다. 백남기 농민에 대한 국가폭력의 진상을 규명하는 것은 이 재판과도 직결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검찰이 신속하게 수사에 나서지 않는다면 이는 명백한 직무유기입니다. 검찰이 법을 위반한 자를 벌하지 않고 정부에 저항하는 사람들을 처벌하는 것을 사명으로 하는 한 검찰은 법의 수호자가 아니라 정권의 수호자일뿐입니다.

잔인한 시절입니다. 참혹한 고통의 시간입니다. 그러나 백남기 농민의 죽음을 헛되이 해서는 안됩니다. 검찰은 저에게 반성하지 않는다고 비난했습니다. 저는 지금 반성합니다. 백남기 농민이 가시기 전에 정권을 심판하고 살인자를 처벌하는 데 모든 노력을 다하지 못한 점을 통렬히 반성합니다. 한없이 부끄럽고 죄송합니다.

유가족, 그리고 함께 싸우고 계신 모든 분들께 지치지 말고, 아프지 말고, 진실이 승리할 때까지 힘내시라는 부탁을 드립니다. 국가폭력에 희생되신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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