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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2]10월10일 명예회복 신청 주요사건

작성일 2000.10.10 작성자 대외협력실 조회수 5352
3. 10월10일 명예회복 신청 주요사건

< 구로지역 연대 파업 투쟁>

1) 발생시기 : 1985년 6월
2) 사건경위 : 80년대 중반 구로지역은 대부분 업체가 수출을 위한 경공업제품을 생산하는 곳으로 대부분의 공장들이 저임금, 장시간 노동, 관리직과의 차별대우 등이 극심하였다.

이들 사업장의 급여수준은 정상근무 시 월 10만원에 훨씬 못미치는 것으로 당시 가구당 월평균 소득 70만원과 비교하면 턱없이 낮은 임금이었다. 이러한 저임금은 자연히 장시간 노동을 강제하는 것이어서 대우어패럴의 경우 정상근부 10시간에 항상 1일 2~8시간의 잔업, 철야를 통해 월 평균 80여 시간, 심지어 110시간의 초과근무가 발생하였다. 이러한 열악한 노동환경은 이들 사업장에 노조결성을 가져왔으며 그 시기는 84년 6~7월 경이었다. 이들은 비슷한 근로조건과 노조결성 시기 등으로 인해 조합 간부는 물론 조합원간의 연대 프로그램을 통해 교류와 연대를 강화해 왔으며 85년 임금인상 투쟁 시 상호교류를 통해 이러한 연대는 강화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85년 6월 22일 오전 11시 경찰이 대우어패럴 노조사무실로 찾아와 김준용위원장, 강명자 사무국장, 추재숙 여성부장 등 3명을 연행해 4월의 임금인상 투쟁 때 파업농성을 주도하며 노동쟁의조정법과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을 위반했다는 이유를 내세워 이들 모두를 구속하고 조합간부 8명을 불구속 입건하였다. 이러한 조치는 전두환 정권이 노동운동을 다시 강력하게 탄압하려는 신호탄이라는 인식이 퍼지면서 함께 연대했던 노동조합들에게 위기감을 불러왔다.

6월 24일 오전 8시 경 분노한 대우어패럴 노동자 350여명이 파업을 시작한 것을 신호로 오후 2시 효성물산 노조원 4백여명이 파업에 동참하였고 같은 시간 가리봉전자 노조원 5백여명, 선일섬유 노조원 70여 명 등도 파업에 돌입하였다. 이들은 '구속된 김준용 위원장 등 노조간부의 석방과 노조탄압 중지'를 요구하고 나아가 '노동악법 폐지하라', '폭력경찰 물러가라' 등을 주장하였다. 6월 25일 남성전기 조합원 3백여 명이 오후에 농성을 벌이고 세진전자 노조원 250여 명, 룸코리아 1백 여명이지지 철야농성을 하는 등 연대투쟁은 7개 업체로 확산되었다. 효성물산, 가리봉전자, 선일섬유는 보복조치를 하지 않는닫는 약속을 받고 농성을 자진해산했으나 6월 28일에는 부흥사노조원 120여 명이 연대파업에 돌입하였다,
한편 먼저 농성을 푼 가리봉전자, 선일섬유 등에서 주동자들에 대한 보복조처가 이루어지는 가운데 6월 28일 대학생 18명이 빵, 우유, 구급의약품 등을 짊어지고 공장 지붕을 타 넘고 농성장에 합류하는 등 농성에 대한 지원이 거듭되자 마침내 6월 29일 회사측이 동원한 폭력배와 사복경찰이 대우어패럴 농성장에 투입되어 농성을 강제해산시켰다.
3) 관련자 피해 내역 : 6일간의 구로지역 연대파업은 구속 43명, 불구속 입건 38명, 구류 47명, 그리고 7백여 명이 해고 및 강제사직을 당하는 엄청난 희생을 입게되었다.

<부산 고무공장노동자 구사대 탄압 사례 및 투쟁>

(주)화성(87년)에선 노조 간부를 10여명의 관리자가 감금한채 폭언하면서 고막이 터지고 허리를 못쓰도록 두들겨 팼다. 17살 여성 노동자에게 "김일성이 마누라야, 가랭이를 찢어 죽인다"고 협박하고 구타해 사직을 강요하는 등 사업장을 무법천지로 만들었다.
(주)풍영(87년)에선 노조민주화추진위원회(이하 노민추) 소속 노동자 20여명을 감금 폭행해 내쫒았다. 통근버스에서 노동자의 억울한 사정을 적은 소식지를 돌리던 노동자가 운전사의 방해를 막으려고 어깨로 밀었다고 폭행죄로 구속되고 2명의 노동자는 자가용으로 납치돼 보름 가깝도록 행불됐다.
17세 소녀에게 '농성 중 성관계를 했다'는 허위자백을 강요하며 노동자 투쟁의 도덕성에 흠집을 내기도 했다. 혓바닥으로 땅바닥을 핥도록 해 혀에 흙이 묻었는지 확인하는 짐승만도 못한 짓을 했다.
(주) 태양사(87년)에선 노조사무실에 100여 관리자들이 몰려와 노조 간부을 폭행해 앞니 3개를 뿌러뜨리고, 갈비뼈, 허리뼈를 으스러뜨려 10여명의 노동자가 병원으로 실려갔다. 대양고무와 부영화학에서도 강제납치와 협박으로 각각 8, 17명이 부당해고되거나 사직을 강요당했다.
(주) 원창(88년)에서는 노민추 3명을 부당해고하고 감금폭행하는 일이 발생했다. 4/20에는 양동일(19·서1동 564-24)이 안전관리실에 끌려가 사직강요와 폭행을 당하고 4/22에는 양태임(21·대저1동 443)이 3층 안전관리실내 고장난 엘리베이터에 갇혀 아침부터 8시간동안 수갑찬 상태에서 집단폭행과 고문당했으며 이 과정에서 이들은 양씨의 웃옷도 벗겼다. 4/28일에는 정규용(23·재단과추진)씨도 집단구타 당했다. 이들 3명은 강요된 사직서를 썼다.
(주)삼화고무에선 87년에는 노민추 노동자들을 범어사, 회동수원지, 진주 진양호 등으로 끌고가 집단폭행하면서 강제사직서를 쓰게 하였음. 89년에는 대의원 선거에서 현장노동자가 절반이상 당선되자 위기를 느껴 전상련 등 노득현 등 3명을 해고하고 이들이 출근투쟁할 때마다 구사대를 동원 폭행하였음. 90년에는 주44시간제 실시를 앞둔 9월30일 어용노조위원장 권영우가 독단으로 주50.5시간 근무로 합의하고 노조사무실마저 회사밖으로 옮겨버리자 이에 항의하는 대의원 백규현 감금 구타한데 이어 항의 집회를 주도한 남수정을 과장이 폭행하여 의식을 잃게 하였다. 또한 조형제대의원을 차장이 울산으로 납치했다 손병기대의원도 사무실에 감금해 집회를 막으려 했으며 이들을 고발하여 구속시켰다.

< 경동산업 노동자 집단분신 및 투쟁>

1) 발생시기 : 1989년 9월
2) 사건 경위 : 89년 5월 노조원들이 친목모임인 '디딤돌'이라는 모임을 만들었는데 회사는 이 회원의 대부분이 노조활동에 관심이 많다는 이유로 회사에 의해 감시와 탄압의 대상이 되었다. 특히 6월 6일 지역노동자 축구대회, 8월 3일 인노협수련회에 이들이 참여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회사는 이들을 노골적으로 감시하기 시작했다. 그런 가운데 이들은 8월 27일, 해고자 돕기를 위한 '경동가족 한마당' 일일찻집 행사를 갖기로 하고 8월 11일부터 티켓을 판매하게 되었다. 그러나 회사는 관리자들을 동원해 티켓판매를 가로막고 회원들을 불러다가 '해고자들과의 관계를 대라'는 등의 노골적인 탄압을 가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500여명의 노동자가 참여한 가운데 행사가 마무리되자 회사는 행사 다음 날인, 8월 28일이 디딤돌 회장 강현중, 부회장 유원식 총무 안중준에 대한 징계위원회 출석 요구서를 발부하였다.
이에 회원들의 8월 31일, 이의 철회를 요구하며 회사 마당에서 농성에 돌입하였다. 회사는 즉각 구사대를 200여명 조직, 이들을 강제해산시키려 했고 이 과정에서 무수한 충돌이 발생하였고 이들은 옥상으로 올라가 농성을 계속했다. 뿐만 아니라 회사는 이들에게 음식을 전달하려던 가족과 지역 노동자들에게도 무참한 폭력을 휘둘러 이들은 고립된 상태로 농성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어용노조와의 3 차례 대화마저 완전 결렬되고 고립된 상황에서 기진맥진한 가운데 이들은 노무이사와의 최종담판을 짓기로 하고 온 몸에 신나를 부은 채 옥상에서 내려와 노무이사실로 내려가던 중 구사대 200여명에 의해 포위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순간적으로 강현중의 몸에 불이 붙었고 이어 김종하, 안중준, 이종화에게 불이 옮겨 붙었다. 또한 이에 격분한 채중영, 최운규가 할복을 기도하였다. 결국 이 사건으로 강현중, 김종하는 사망하게 되며 경찰은 이건탁 등 18명을 자살방조, 폭력 등 위반으로 구속하였다.
3) 관련피해자 : 사망 - 강현중, 김종하 / 구속 - 김대필등 18명

< 현대중공업 골리앗 농성 투쟁 >

1) 발생 시기 : 1990년 4월∼5월
2) 사건 경위 : 90년 4월 28일 새벽 3시 45분 경찰은 '미포만 작전'을 개시하였다. 현대중공업을 향해 끝이 보이지 않는 경찰병력이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동하는 경찰병력에 현대자동차 노조원들이 화염병을 던지고 지게차로 쇳덩이를 옮겨 경찰의 현대중공업 진입을 저지하는 투쟁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4월 28일 오전 6시 정각, 페퍼포그가 앞을 식별할 수 없도록 최루탄을 퍼붓는 속에서 73개 중대 10000여 명의 경찰병력이 블도저를 앞세워 현대중공업으로 진입해 들어왔다. 하늘에서는 헬기가 선무방송을 하는 가운데 바다에서는 군함을 통해 미포만으로 진입해들어왔다. 이에 저항하던 노동자들은 대량 연행당했지만 골리앗 결사대 78명은 골리앗을 점거한 채 투쟁을 이끌어 가기 시작했다. 골리앗 농성자들은 메시지를 통해 이렇게 자신들의 요구를 밝혔다. "새벽과 한 밤중에 헬기까지 동원한 정부의 무력진압에 우리는 노동자들에 대한 사회적 천대와 우리의 비애에 울분을 느끼고 급기야 투신하려는 동지들을 서로가 감싸안으며 자제시키고 있습니다. 저희도 저 밑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그러나 더 이상 회사측에 의해 일방적으로 노조가 유린되고 정부에 의해 천대받는 현실에서 골리앗 위에 있는 우리 전원은 죽을 수는 있어도 물러서지 않기로 결의하였습니다"
한편 이러한 현대중공업에 대한 강경진압과 골리앗 농성은 울산지역 노동자들과 가족들의 분노를 폭발시키며 연일 대규모 가두시위가 이어졌다. 5월 3일 까지 가두시위 관련 연행자가 730명을 넘어설 정도로 대규모 가두시위가 계속되었다. 또한 전국적으로도 전노협총파업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한편 5월 3일 골리앗에서는 물이 바닥나서 하루에 생라면 하나로 때우면서 버텨나갔고 마침내 5월 6일부터 전원 단식에 돌입하였다. 농성 이 시작된 후 9일 동안 한번도 대화를 시도하지 않던 회사측도 5월 7일 단 한차례 대화가 있었으나 결렬되었으며 그 후 외부로부터 고립 상황에서 버티던 농성대오는 농성 13일만인 5월 10일 오후 2시 30분 '현중노조가'를 부르며 골리앗에서 내려와 전원 연행됨으로써 투쟁은 마무리되었다.
3) 관련 피해자 : 1) 현대중공업 - 이영현 등 34명 2) 현대자동차 - 이상도 등 15명 3) 현대정공 - 김상일 등 3명 4) 현대중공업외주 - 강봉진 등 2명 5) 현대중장비 - 김학두 등 3명

<90년 쟁의사업장에 대한 공권력 집중 투입 사건>

1) 발생시기 : 1990년
2) 사건배경 : 1989년 들어서면서부터 노동쟁의에 대한 정부의 정책이 이전과 달리 적극적으로 쟁의현장에 공권력을 투입하여 노동쟁의 자체를 무산시키는 방식으로 바뀌게 된다. 이러한 방침을 노동, 치안부서 차원에서가 아니라 범정부적 차원에서 추진되게 된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전노협 결성식을 이틀 앞둔 90년 1월 20일 노태우대통령 주재 하에 노동, 상공, 재무, 내무, 법무장관과 검찰총장, 치안본부장 등 7개 부처 관계장관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된 '산업평화 조기정착과 임금안정을 위한 대책회의'였다. 대책회의에서는 전노협을 법외단체로 규정, 이와 연계된 노동단체들을 엄단하고 가입 노조들의 탈퇴를 유도하기로 하였다.
이후 정부부처가 총동원되어 노동운동에 대한 대대적 공세를 시작하였다. 이 회의에 이어 노동부는 '노사관계 준법질서 확립을 위한 판단기준'을 발표했는데 그 내용에는 연대파업은 물론 구속자석방을 요구하는 쟁의, 파업기간 임금지급을 요구하는 쟁의, 가족 등 외부인이 응원하는 쟁의, 준법투쟁이라도 적접절차를 거치지 않은 쟁의 등을 불법쟁의로 규정하였다. 또한 치안본부도 세부지침으로 '악성노사분규에 대한 경찰력 투입 대책'을 확정하였는데 그 핵심 내용은 악성분규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공권력을 투입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정부의 총체적 탄압은 기업주들의 성실한 교섭의무라든가 자율적 노사교섭을 저해하고 노조의 교섭력을 현저히 약화시키면서 대규모 쟁의와 대규모공권력 투입의 악순환을 초래했다.

3) 1990년 주요 공권력 투입 일지사례
1. 5 부산 동신화학에 경찰 투입 노조원 33명 연행, 3명 구속
인천 마이크로전자 경찰 투입 노조원 54명 연행
1.17 인천 명성전자 경찰투입 노조원 40명 연행, 1명 구속 13명 불구속 입건
2.27 서울 남부기계금속 경찰이 투입되어 노조원 7명 구속
4.28 현대중공업 경찰 투입
5.11 부천 유성기업 경찰 투입 노조원 153명 연행
5.12 대구 태화염공, 남선물산 2차 경찰 투입
5.13 평택 한국야쿠르트(주) 경찰 투입 노조원 31명 연행
5.23 대구 태화염공, 남선물산 3차 경찰 투입
6. 1 서울 대한교육보험 경찰 투입 노조원 212명 연행,7명 구속
6.13 서울 나우정밀 경찰투입 노조원 600여명 강제해산, 3명 구속
8.28 마산 한국스타 경찰 투입 손성란 위원장 등 5명 구속
8.30 안산 금강공업 경찰 투입 노동자 3인 분신
8.31 대구 남선물산 5차 경찰 투입 노조간부 3명 구속
9.11 부산 풍산금속 경찰 투입 노조원 연행 14명 구속
10.4 서울대병원 경찰 투입 노조원 63명 연행, 3명 구속, 60명 불구속 입건

< 박창수 한진중공업노조위원장 옥중사망 진상규명 및 장례투쟁>

1) 발생 시기 : 91년 5월
2) 사건 경위 : 90년 전노협 가입노조에 대해 업무조사, 지노협 의장 구속 등을 통해 전노협을 압박했던 노태우 정부의 기조는 91년에도 유지되고 있었다. 특히 91년 들어서 대기업노동조합들의 조직인 연대회의가 전노협과 연대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2월 13일, 박창수 한진중공업위원장을 비롯한 대기업연대회의 가입 노조대표자들을 대우조선 파업에 대한 지원을 논의했다는 이유만으로 제3자 개입 혐의로 구속시켰다. 이렇듯 박창수 위원장이 서울 구치소에 수감중인 가운데 4월 25일, 부산 남구 대연동 까페에서 안기부 조정관임을 자처한 사람이 한진중공업노조 사무국장 정세군 등을 두차례 만나서 전노협 탈퇴를 제의하면서 그럴 경우 박창수위원장을 석방할 수 있음을 시사하는 등 안기부의 한진중공업 노조에 대한 전노협 탕퇴공작이 진행되고 있었다.
5월 4일 박창수위원장이 이마에 세로 6㎝ 정도의 상처가 나서 안양병원으로 후송되어 중환자실에 입원하였다. 5월 5일 박창수위원장 입원실로 안기부직원이 전화를 3차례 해왔지만 교도관의 제재로 박창수위원장과는 통화를 못하고 장세군 노조사무국장, 박창수위원장 부친 등과 통화를 하는 등 안기부요원의 접촉시도가 있었다. 5월 6일, 04시 45분 병원마당 시멘트 바닥에서 박창수위원장 시신이 발견되었다. 유가족, 동료노동자들이 병원으로 모여드는 가운데 검찰과 유가족 간의 박창수위원장 시신부검을 둘러싸고 갈등이 있었으나 이상수, 노무현 의원의 중재로 병원에서 경찰병력이 일단 철수했다. 그러나 5월 7일 전경 1000여 명이 병원 영안실에 투입되어 영안실에 있던 노동자, 학생 300여 명을 몰아내고 시신을 탈취하여 부검을 강행하며 이 과정에서 다수가 연행되어 15명이 구속되었다. 이에 항의해 유족을 중심으로 병원 623호실로 들어가서 농성을 시작하였고 안양시내에서 2000여 명, 부산에서 5000여 명이 "진상규명", "구속노동자 석방" 등을 요구하며 가두시위를 전개했다. 이러한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투쟁은 전국으로 확산되는 가운데 5월 18일에는 전노협 주최로 '고 박창수 위원장 옥중살인 규탄 및 폭력통치 종식을 위한 전국노동조합 총력투쟁'이 전개되어 전국 150개 노조 10만 명이 참여하여 조직적인 총파업투쟁을 전개하였다. 또한 6월 12일에는 한진중공업조합원 1000여 명이 안기부를 항의방문하고 한진그룹 본사 앞에서 항의집회를 전개하다 전원 연행되는 등 끊임없이 진상규명투쟁이 전개되었고 6월 29일 박창수위원장 장례식을 끝으로 투쟁은 막을 내린다.
3) 관련피해자 : 사망자 - 박창수(한진중공업위원장), 구속자 - 이병학 외 다수

< 지역노동조합 연대 조직탄압과 이에 맞선 총파업투쟁>

1) 발생 시기 : 89년
2) 사건 배경 : 88년 노동자들은 전국적으로 각 지역마다 민주노조의 연대조직을 만들어 자신들의 권익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한다. 특히 이러한 연대투쟁은 구사대 등을 동원해 노동자들의 투쟁을 진압하려던 기업주들을 의도를 무력화시키면서 실실적으로 많은 성과를 가져오고 이를 바탕으로 각 지역에서는 지역노조협의회를 만든다. 그러나 이러한 자주적인 노동자들의 연대조직 발전에 위협을 느낀 노태우정권은 각 지역노조협의회 의장들을 제3자 개입 금지 등의 위반으로 구속시키는 등의 탄압을 가했다. 이에 각 지역별로 지역노조협의회 의장들이 구속되고 이의 석방을 요구하는 노동자들의 총파업이 전개되었다. 부천을 필두로 서울, 마산창원, 인천, 경기남부지역 등으로 이어진 이런 지역협의회 의장 석방 요구투쟁은 또 다시 대량해고와 구속을 초래했다.
3) 사건경위 :
- 서울지역노조협의회 단병호위원장 구속과 서울지역 총파업 사건 : 4월 16일 서울지역노조협의회 의장 단병호위원장이 3월의 서울지하철노조 파업과 관련 제 3자 개입금지로 구속되었다. 이에 서노협은 "단병호 위원장 석방"을 요구하며 4월 20일 서울지역 총파업을 전개하였고 여기에는 47개 노조 3,500여명이 잔업거부, 총회, 파업 등의 형태로 참가하였다.
- 인천지역노조협의회 최동식 의장 구속과 인천지역 총파업 사건 : 89년 11월 11일, 인천지역노조협의회 최동식 의장은 전국 노동자 대회 전야제가 개최되고있던 동국대학교로 들어가려다가 70여명의 노동자들과 함께 연행되어, 다른 사람들은 모두 석방되었으나 최동식 의장은 계속 경찰에 의해 구금되었다. 이에 분노한 인천지역 노동자들은 11월 15일 저녁 최동식 의장 석방을 요구하며 인천지역 서운동, 작전동, 효성동 일대에서 격렬한 가두시위를 전개하였고 11월 16일에는 인노협 소속 45개 노조5천여명의 노동자들이 총파업 투쟁에 돌입하였다. 이 과정에서 인노협 소속 노동자 130여 명이 경찰에 연행되는 등의 피해가 발생했다.
- 부천지역에서는 한경석 부천투쟁본부장과 임동섭 상황실장이 경찰에 의해 전격 구속되어 총파업이 전개되었고 마창에서는 이흥석 의장을 비롯한 지도부가 구속되어 1만명이상이 참가하는 격렬한 가두시위가 전개되었다. 또한 88년 8월 경기남부지역노동조합연합 임석순 의장이 제 3자 개입금지 조항으로 구속되었으며, 대구경북노지역노동조합연합 준비위 이병수, 이상훈 등이 구속되었다.
4) 관련 피해자 : 단병호, 최동식, 이흥석, 한경석, 임석순 등 다수

< 전노협 결성 및 사수 투쟁 >
1) 발생시기 : 1990
2. 사건경위 : 90년 1월 22일, 전국노동조합협의회(이하 '전노협')가 결성되었다. 이는 87년 7,8월 대투쟁과 88년, 89년 각 지역의 연대투쟁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전국적인 노동자의 구심점이 만들어졌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한국사회 노사관계의 근본적인 변화를 예고하는 사건이었다. 이에 노태우정권은 전노협 출범 이틀 전인 1월 20일, 노태우대통령 주재하에 노동, 상공, 재무, 내무, 법무장관과 검찰총장, 치안본부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산업평화 조기정착과 임금안정을 위한 대책회의'를 개최하여 전노협을 법외단체로 규정, 전노협 소속 노조의 탈퇴를 유도하고 전노협과 연계된 노동단체에 대해 엄단하기로 방침을 결정하였다. 이에 따라 전노협 결성식장이 원천봉쇄되는 등 전노협은 출범부터 정부의 강력한 탄압에 직면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탄압에 맞서 전노협을 사수하려는 노동자들의 투쟁 과정에서 단병호 전노협위원장을 비롯하여 262명이 구속되었고, 김영대 서노협 의장을 포함 10개 지노협의장단이 수배되었다. 또한 노동부에서는 전노협 가입 단위 노조들에 대해 업무조사권을 발동하였다.
업무조사지침에는 조사기간을 2월 한달 동안으로 정하고 조사대상에는 전노협기금 결성 노조 등이 있는 경우로 명시되어 있고 조사내용에는 적법상급연합단체 가입여부에 대한 항목이 포함되어 있어 업무조사 자체가 전노협탈퇴를 압박하기 위한 것임이 분명했다. 특히 노동부는 3월 12일. 업무조사를 거부한 한양대병원노조 차수련 위원장과 삼성제약노조 김은임 위원장을 구속시켰다.
이러한 파상적인 압박에 대해 전노협은 4월 6~8일 서울 명동성당에서 전국의 전노협 가입 단위노조 대표자들이 참가한 가운데 전노협 사수를 위한 철야단식 농성을 전개하였고 노동부의 업무조사에 대해서는 조사거부로 맞서는 한편 90년 5월 1일 노동절 101주년을 기해 전노협 사수를 위한 총파업 투쟁에 돌입한다.
3) 관련피해자 : 단병호(당시 전노협위원장), 김영대(당시 서노협 의장), 등 다수

< 병역특례해고노동자의 투쟁과 조수원열사 장례투쟁>
1) 발생시기 : 93∼95년
2) 사건경위 : 병역특례 제도란 방위산업체에서 일정 기간(5년) 근무한 노동자들에 대해 군 입대를 면제해 주는 제도로 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쟁의행위가 금지된 대우정밀, (주)풍산 등의 방위산업체 노동자들 중 병역특례자들이 근무기간을 다 채우지 못한 상황에서 노조활동과 관련하여 기업으로부터 해고를 당하면서 소위 병역특례해고노동자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다. 최초로 문제가 된 대우정밀의 경우, 병역특례 노동자가 근무기간 3년을 채우지 못한 가운데 노조활동 관련되어 해고되었는데 정부는 이들에 대해 일체의 근무기간을 인정해 주지 않은 채 군 입영영장을 발부하였고 이를 거부한 병역특례해고노동자들은 군 기피자로 수배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이에 대우정밀 병역특례 해고노동자 19명 중 황용범 등 9명이 91년 8월부터 수배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이에 대우정밀 병역특례해고노동자들을 중심으로 풍산금속 등 영남지역의 병역특례해고자노동자 69명이 부산대학교에서 단식농성을 전개하며 '특례기간 5년에서 3년으로 단축', '병역특례기간을 적정비율로 계산하여 군복무 기간으로 인정해 줄 것' 등을 요구하며 일차 단식농성을 전개하였다. 93년 9월, 병역특례해고노동자들은 전해투 투쟁과 결합하기 위해 서울로 상경하여 민주당사에서 무려 38일간의 단식 농성 끝에 전원이 실신, 입원하는 등 치열한 투쟁을 전개하였다.
이어서 이들은 94년 4월 1일 '병역특례 해고노동자의 수배해제와 원상회복을 위한 특별위원회(이하 '병역특위')를 구성하여 청와대, 국방부, 병무청에 각계의 탄원서를 발송하는 등 꾸준한 투쟁을 전개하였다. 그 결과 5월 25일, 대우정밀 해고 노동자들의 경우 대우그룹차원에서 병역특례가 가능한 계열사에 복직시키고 노사공동 명의로 정부에 이들의 병역문제 해결을 탄원하기로함으로써 문제가 해결의 실마리를 찾는 듯 했다. 그러나 이에 대해 병무청은 '해결 불가'라는 입장을 되풀이하여 문제해결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복직은 되었지만 군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황에서 병역특위는 1995년 4월 24일 박형규 목사를 비롯한 498인의 명의로 정부에 병역특례자 군문제 해결을 위한 시행령 개정을 요구하는 청원서를 접수시켰다. 그리고 이러한 청원을 관철시키기 위해 국회의원 면담, 공청회 등
끊임 없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 결과 95년 12월 6일, 국회 국방위원회 청원심사위원회에서 '회사, 당사자, 본인 3자가 모여 병역특례 해고노동자 군문제를 긍정적으로 검토하라'는 권고안을 내렸다. 이에따라 12월 12일 조수원을 비롯한 병역특례 해고자 3인과 대우그룹, 풍산그룹 회사관계자, 병무청 국장, 과장, 심사관이 모여 논의했으나 병무청은 '군복무를 하라'는 입장을 되풀이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수원은 12월 15일 5년 동안 농성하며 지내던 민주당 서울지부당사 전해투 농성장에서 목매어 숨진 채 발견되었다.
한편 조수원의 사망을 계기로 노동자들의 분노가 폭발, 대우정밀 조합원 등 150여명이 상경하여 신한국당사 앞에서 쇠사슬농성을 전개하다 16명의 노동자가 연행되었는가 하면 병역특례 수배자들이 수배해제를 요구하며 명동성당에서 쇠사슬 농성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투쟁에 힘입어 11명의 병역특례해고자 문제가 해결되는 등의 성과를 남기고 96년 1월 3일, 조수원열사 장례식이 치루어졌다.

<98년 부산지하철 파업유도 사건>
7월 2일 부산교통공단 마지막 교섭 및 비상총회 / 오후7시
7/ 3 04시 동래역에서 파업돌입 (508명 연행)
7/ 6 14명 구속, 강본부장 수배
7/ 8 오후6시-, 파업7일째 철야협상을 벌였으나 타결에 실패했다.
공단은 >파업 중 무노동 무임금 >7일 이상 무단결근때 직권면직 >파업손실 소
제기 입장을 발표했고 손선규 건교부차관이 오후 공단을 찾아 1호선 2인승무제
수용불가를 밝혔다.
7/ 9 이갑용위원장과 민철노련 김선구 수석부위원장은 오전 이정무교통장관과 면담하고
부산지하철 파업 해결책을 요구했다.
오후3시 / 노조와 부산본부는 공단 앞 항의집회
8/ 8 낮 12시, 공단앞 항의집회 / 오후2시, 롯데앞 서명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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