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3.11.4 국가인권위 배움터에서 열린 민교협, 학단협 공동주최 '노동자 자결 사태와 대책' 토론회에서 발표된 조돈문 교수 발표문입니다.
<관련기사>
참여정부의 ‘죽음의 정치’ 부추기는 이데올로기
최근 노동자들의 잇따른 자살과 관련해 참여정부의 노동정책은 다섯 가지의 이데올로기가 부추기는 ‘죽음의 정치’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가톨릭대학교 사회학부 조돈문 교수는 4일 오전 서울 을지로 국가인권위원회 배움터에서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 등의 주최로 열린 ‘노동자 자결 사태와 대책’ 토론회를 통해 이같은 의견을 발표했다.
조 교수는 먼저 "노태우 정권도 출범 뒤 공안정국으로 전환하는데 14개월이나 걸렸지만, 노무현 정권의 경우는 ‘신’공안정국으로 전환하는데 불과 4달 밖에 걸리지 않았다"고 말문을 열었다.
조 교수는 "즉 대선공약과 국정비전에 포함됐던 친노동적, 진보적 약속들이 4달도 안돼 파기됐다"며 "지금은 군사독재정권 때부터 노동자들에게 너무도 익숙한 ‘죽음의 정치’가 진행 중이다"고 설명했다.
이어 "‘죽음의 정치’는 원래 저항하는 노동자들과 노동조합에게 이데올로기 공세를 펼치며 노동자들을 고립시키고 자신을 정당화하는 법이다"며 참여정부가 사용하는 다섯 가지의 이데올로기를 들었다.
조 교수에 따르면 참여정부는 ‘노동시장 유연화는 더 진전돼야 한다’, ‘노동자간 임금격차는 대기업 노동자 이기주의 때문이다’는 이데올로기를 이용해 '죽음의 정치'를 펼치고 있다.
또 이를 위해 ‘노조는 힘이 너무 세다’, ‘노동자가 경영에 참여하면 안 된다’, ‘노동운동은 서민들의 삶의 조건 향상을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는 이데올로기 역시 동원하고 있다.
조 교수는 그러나 "한국의 노동시장은 이미 비정규직 비율이 50%를 넘을 정도이고 한국은 서구의 비정규직 가사노동 등과는 달리 비자발적 기간제 근로의 비율이 높아 그 폐해가 심각하다"고 반박했다.
특히 "대기업과 중소기업 노동자 간에 임금격차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중소기업과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임금을 올려 소득불평들을 해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한국의 노조 조직율이 12%에 불과하고 노조 미조직 사업장은 단체협약 혜택도 받지 못하며 노동계급 정당이 의회에도 진출하지 못하고 있는데 노조의 힘이 세다고 할 수 있느냐"고 반문했다.
아울러 기업에는 노동자와 노조같이 운명을 같이하는 내부감시자가 필요하다는 점과 서민들의 삶의 조건을 향상시키는 것은 노동운동이 비판하듯 정권의 몫이라는 점도 지적했다.
조 교수는 끝으로 "사회통합은 ‘사회통합적’ 경제정책 없이는 불가능하다"며 "참여정부가 빈부격차 해소, 재벌개혁, 정경유착 근절 등 대선공약을 이행하고 이윤보다 공익을 우선해야 한다"고 당부했다.〈뉴시스>
< 발표문 >
노무현정권과 노동자: "희망"의 정치, "죽음"의 정치.
조돈문(가톨릭대 사회학, 2003.11.5 chodon@catholic.ac.kr)
<대통령 선거하던 날 어느 초등학생의 일기>
12월 19일 (목요일) 날씨 : 맑음
제목 : 대통령 선거일-우리에겐 기쁘지 않은 날
"오늘 드디어 대통령 선거일이다... 그런데 노동당(민주)의 권영길을 지지하고 계시던 아빠가 민주당의 노무현을 지지하자고 하신다. 이회창을 막기 위해선 강한 쪽을 지지해야 한다고... 엄마는 우셨다. 대통령도 자기 맘대로 못 찍는 나쁜 나라라고.... 결국 노무현을 찍으셨다. 나도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다. 결국은 노무현이 대통령이 되었다. 다른 사람은 기쁠지 몰라도 우린 기쁘지 않다."
(초등학교 2학년인 제 딸아이는 민주노동당 지지자입니다. 민노당의 저조한 득표율에 짜증을 내면서 선거방송을 끝까지 지켜보다가 방금 일기를 쓰고 잠들었습니다)
<김주익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 유서>
"조합원 동지들의 전면파업이 50일이 되었건만 회사는 교섭 한번 하지 않고 있다. 아예 이번 기회에 노동조합을 말살하고 노동조합에 협조적인 조합원의 씨를 말리려고 작심을 한 모양이다.
노동자가 한 사람의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목숨을 걸어야 하는 나라, 그런데도 자본가들과 썩어빠진 정치꾼들은 강성노조 때문에 나라가 망한다고 아우성이다.
1년 당기 순이익의 1.5배, 2.5배를 주주들에게 배상하는 경영진들, 그러면서 노동자들에게 회사가 어렵다고 임금동결을 강요하는 경영진들. 그토록 어렵다는 회사의 회장은 얼마인지도 알 수 없는 거액의 연봉에다 50억 원 정도의 배상금까지 챙겨가고 또 1년에 3천5백억원의 부채까지 갚는다고 한다. 이러한 회사에서 강요하는 임금동결을 어느 노동조합, 어느 조합원이 받아들이겠는가."
I. 노무현 정권 출범과 "희망"의 정치
대통령 후보 노무현은 많은 노동자들에게 고민을 안겨주었다. 민주노총 조합원 설문조사에 따르면 민주노총 조합원들은 권영길 후보에 비하여 노무현 후보에게 10% 정도 더 높은 지지를 보이며 조합원 절반 정도 노무현 후보에게 투표한 것으로 나타났다. 한편 같은 조사에서 민주노총 조합원들이 민주당에 비해 2.5배나 높게 민주노동당을 지지하고 있었다는 것은 민주노총 조합원들이 보수 후보의 당선을 저지하려는 전술적 선택을 하는 한편 노무현 후의 상대적으로 개혁적, 통일지향적, 친노동적인 성향에 일정정도 기대를 걸었던 것이다.
노후보가 대선공약으로 천명한 150대 핵심과제는 노동자들에게 많은 것을 약속하지도 않았고 대대적 사회구조 변혁도 포함하지 않았지만, 재벌개혁, 정경유착 근절, 비정규직 차별철폐, 노사화합과 사회통합, 빈부격차 해소 등의 약속은 과거 정권들과는 다른 사회진보를 기대하도록 만들었다. 대선승리 후 노무현 정권이 출범하면서 국정비전으로 천명한 "12대 국정과제"는 "사회통합적 노사관계"를 그 하나로 설정하여 노동관계법규들을 국제기준에 맞도록 개정하고, 신뢰에 기초한 중층적 협의·교섭 구조를 구축하고, 노사자치주의 원칙을 확립할 것을 천명하였다. 또한 노사자치주의 원칙에 따라 "노사분규에 대한 공권력 개입을 최소화하고 노사분규 관련 법위반자에 대한 불구속 수사관행을 확립"하는 한편, "평화적 쟁의행위에 대한 업무방해죄 적용을 신중히 하고, 노동사건에 대한 손해배상·가압류 청구의 남용을 방지하는 방안 강구"하고, "공공부문 구조조정 과정에 노동자들의 참여방안을 마련하고... 정부가 모범을 보이는 공공부문의 노사관계실현"한다는 구체적 정책내용도 제시하였다.
이러한 "사회통합적 노사관계" 정책방향은 배제와 탄압에 기초한 선행정권들의 노동정책에 비해 진일보한 것으로서 참여와 포용의 원칙에 기초해 있다는 점에서 노동자들에게 "희망"의 정치를 기대하게 하였다. 1997년 말 외환위기와 함께 시작된 경제위기 이후 노동자들의 삶의 조건들이 크게 악화되었다는 점에서 노동자들이 "희망"의 정치에 거는 기대는 그만큼 절실했던 것이었다.
경제위기 하에서 전개된 끝없는 구조조정과 정리해고는 대규모로 실업자들을 양산했고 생존자들에게도 평생직장의 개념과 회사에 대한 정체감을 앗아갔고, 여전히 세계 최장시간 노동과 산업재해 중대재해율에서 세계최고를 기록하며 노동조건은 열악함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신자유주의 경제정책 하에서 강력하게 추진된 "노동의 유연화"로 비정규직 노동자 비율은 크게 증가하였고[주1], 정규직 노동자와 동일한 직무를 수행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임금 및 각종 노동조건에서 차별대우를 받고 있고, 월차휴가 신청했다가 업체관리자로부터 칼침을 맞은 현대아산 하청노동자 사례에서 보듯이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노동조합 조직화가 되지 않아 노동기본권의 보호도 받지 못하고 있다. 또한 경제위기 하에서 소득불평등 정도는 크게 악화되었으나 경제적 여건이 회복되고 있는 상황 하에서도 악화된 소득불평등 정도는 경제위기 이전 수준으로 환원되지 않고 있다.
노무현정권 출범초기는 노조탄압에 저항하는 두산중공업 투쟁, 전교조의 NEIS 거부투쟁, 화물연대의 노동3권 인정 및 지입제 등 계약구조 개선 투쟁, 부산·대구·인천 지하철노조의 시민안전 연대파업, 철도노조의 4.20 합의 이행 요구 투쟁, 현대자동차 등 대기업의 단체교섭관련 투쟁, 민주노총 6.25 총파업 등 굵직한 노사분규들이 이어졌다. 정치적 기회구조가 우호적으로 변화되면 노동자들의 억압되었던 욕구와 권리의식이 노사분규의 분출로 표현되는 것은 우리 현대사에서 자주 반복되어 나타났던 일이다. 해방 직후, 4월 혁명 이후, 유신정권이후 서울의 봄 등 오랜 억압의 기간 뒤 잠깐 열렸던 정치적 공간 속에서 노사분규가 폭발하여 이전 10년 기간에 맞먹을 정도의 빈도를 보여주곤 했다. 재벌과 보수언론은 노사분규 양상을 부풀리며 호들갑을 떨었지만 실제 노무현 정권 출범 후 반년간의 노사분규 빈도는 김대중정권 마지막해인 2002년의 같은 기간과 거의 비슷한 수준에 불과했다.[주2] 다만 김대중정권 시기의 노사분규와 다른 점이 있었다면 노정권 초기 노동자 투쟁은 일정한 정도 "희망"의 정치에 대한 기대감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뿐이다.
두산중공업, 화물연대, 전교조, 철도노조 등의 투쟁 과정에서 정부는 노동조합의 비판을 진지하게 검토하여 철도민영화와 교육행정시스템 정보화라는 추진중인 정부정책도 유보하고 재고하기로 하였으며, 자본과 보수언론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노동부장관이 파업 절차의 불법성에도 불구하고 노동조합의 주장과 요구조건에 귀를 기울이며 직접 중재에 나서기도 하는 등 전향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주3] 노무현정권은 개방성과 인내심의 시험을 치르고 있었다. 노무현정권 출범 초기 몇 개월은 노동자들의 "희망"의 정치에 대한 기대가 터무니없는 것이 아니었음을 확인시켜 주었다.
II. 과거로의 회귀와 "죽음"의 정치.
노무현 정권의 개방성과 인내심은 오래 가지 않았다. 노정권의 "희망"의 정치 시도는 재벌과 보수언론의 공격 대상이 되었고, 대통령은 재벌, 보수언론, 보수야당 뿐 아니라 보수성향의 경제부처장관들과 관료들 등 기득권세력들에 포위되어 있는 것으로 보였다. 노대통령은 5월 12일 미국방문중 재벌대표들과의 간담회에서 "돌아가면 공의 절반을 (기업인들에게) 돌려주겠다"고 약속하였고, 미국방문을 계기로 노무현정권과 재벌과의 관계는 화해무드로 접어들게 되었다. 재벌대표들은 정권초기에 부분적으로 보였던 친노조적 성향에 대한 우려를 많이 해소하게 되었고, 노대통령은 기득권세력의 중심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노무현대통령은 6월 들어 조흥은행 노조 파업과 철도노조 파업 등 파업투쟁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단호하게 대처할 것을 엄명하였다. 철도공사화와 NEIS 관련 합의사항은 파기되었고, 정부의 철도민영화와 교육행정시스템 정보화정책은 다시 원래대로 추진되기 시작했다. 또한 철도노조 파업에 대해 정부는 공권력을 투입하고 파업투쟁의 핵심을 무더기로 징계하고 97억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도 제기하였다. 정부가 앞장서서 노사자치주의 원칙을 뒤집으면서 생산현장은 공권력 투입, 대량 구속, 가공할 액수의 손해배상 소송과 가압류 청구로 이어졌다. 노정권은 출범 8개월만에 132명을 구속하여 1년 단위로 환산하면 198명 수준으로, 사흘에 한명꼴로 구속한 김영삼정권(연평균 126명)과 이틀에 한명꼴로 구속한 김대중정권(연평균 178명)보다도 높은 수치이다. 손해배상소송과 가압류 청구액수는 10월 20일 현재 46개 사업장을 대상으로 1351억원이 청구되어, 해당 사업장 당 평균 30억원 규모에 달한다. 노정권의 "신"공안정국은 출범후 불과 4개월 만에 시작되었고, 이는 군사쿠데타의 주역이었던 노태우 정권이 출범하고 공안정국으로 전환하는데 14개월이 걸렸다는 점을 고려하면 노정권의 신속한 변신은 놀랄만하다.
기간산업 사유화를 유보하고 공공부문 구조조정에 노동자들이 참여하는 방안을 마련하겠다던 출범전의 약속은 파기되고, 철도공사화는 "협상 대상이 아니라 정부정책"이라며 노동조합과 노동자들을 배제하고 일방적으로 강행하고 있다. 비정규직 노동자의 임금 및 근로조건 차별을 철폐하겠다던 출범전의 약속은 파기되고, 동일노동 동일임금을 추진하지 않고, 근로시간 단축도 중소사업장에서의 시행은 공공부문과 대기업보다 7년이나 늦은 2011년으로 미루어 중소사업장·비정규직 노동자들과 대기업·정규직 노동자들과의 노동조건 격차를 더욱 악화시키는 한편 연 15일 유급휴가 사용의 조건을 1년의 8할 이상 출근으로 한정함으로써 기간제근로자들을 배제함으로써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별을 더욱 심화시키고 있다. 노사분규 공권력 개입 최소화, 노사분규 관련법 위반자 불구속 수사 원칙, 손해배상 및 가압류 청구 남용방지 등 출범전 약속은 파기되고, 정부가 앞장서서 철도노조에 공권력 투입, 대량해고 및 징계,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함으로써 사적부문에 포용과 통합의 모범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노동조합 탄압과 노동기본권 억압에 앞장서고 있다. 또한 재벌과 정계의 정경유착을 근절하고 재벌개혁을 추진하겠다던 출범전의 약속은 흐지부지되고, 정경유착 근절과 재벌개혁을 약속하던 대선과정에서 이미 엄청난 액수의 정치자금을 재벌기업들로부터 받은 것으로 드러나고 있어, 재벌체제 변혁에는 관심이 없고 "기업하기 좋은 나라" 만들기를 절대절명의 과제로 삼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게 하였다.
결국 대선공약과 국정비전에 포함되었던 친노동적, 진보적 약속들은 4개월을 견디지 못하고 파기된 것이다. 지난 8월 노동조건 개악을 수반하는 근로시간 단축법이 통과되자 양대노총은 투쟁을 선언했으나 재벌들은 노정권에 갈채를 보냈고, 법적 근거도 없는 사용자 대항권을 세우기 위한 로드맵을 발표하자 양대노총은 노정권을 규탄했으나 재벌들은 환호했다. 이제 재벌들은 초기에 의심했던 노정권의 친노동자적 성향에 대한 우려를 말끔히 씼고 다시 태어난 "친재벌" 대통령에 안도하게 되었다. 노동자들이 기대했던 "희망"의 정치는 불과 4개월만에 짧은 시행착오와 더불어 마감되었고, 군사독재정권 시기부터 노동자들에게 너무도 익숙한 "죽음"의 정치가 다시 시작된 것이다.
III. "죽음"의 정치 이데올로기 다섯 가지.
"죽음"의 정치는 저항하는 노동자들과 노동조합들에 대해 이데올로기적 공세를 펼치며 노동조합을 무력화시키고 시민사회로부터 고립시키는 한편 스스로를 정당화한다.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조작이 펼쳐지는 한 "죽음"의 정치는 계속될 것이고 "사회통합"은 파괴될 것이다.
1) "노동시장 유연화는 더욱 진전되어야 한다"는 이데올로기:
이는 한국 노동시장이 경직되었다는 전제에 입각하고 있으나, 한국노동시장은 대단히 유연성이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비정규직 비율이 통계계산법에 따라 52-58%에 달하고 있으며, 서구의 비정규직은 가사노동 혹은 여가생활 등 다른 활동과의 병행을 위하여 자발적으로 선택한 단시간근로가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반면 한국의 경우 자발적 단시간근로의 경우는 적고 정규직과 동일한 직무를 수행하면서도 임금 및 노동조건에서만 차별대우를 받는 비자발적 기간제근로와 간접고용유형의 비율이 높아서 비정규직의 폐해가 훨씬더 심각하다. 또한 경기변동에 따른 고용변동성에 있어서도 고용유연성이 높은 것으로 알려진 미국보다도 훨씬 더 높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주4]
2) "노동자간 임금격차는 대기업 노동자 이기주의때문이다"는 이데올로기:
세금도 내지 않고 기업으로부터 거액의 불법 정치비자금을 받은 대통령후보들과 정치인들에 대해서는 관대하면서 정당하게 소득세도 부담하며 근로에 대한 대가로 임금을 받는 대기업 노동자들을 매도하는 것은 정권의 도덕성 실종을 보여준다. 대기업-중소기업, 정규직-비정규직 노동자들 사이의 임금격차가 심각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들은 여전히 근로소득 기준 하위 40% 속에서의 격차에 불과하다. 따라서 대기업·정규직 노동자들의 임금수준 하락은 전체국민 사이의 소득불평등을 더욱 심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점에서 중소기업과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임금수준을 상향조정하는 것만이 대선공약에서 약속한 소득불평등 축소와 중산층 70%의 사회를 실현할 수 있다. 또한 고용보험, 건강보험, 국민연금 등 주요 사회보험의 비정규직 노동자 적용율은 여전히 20-25% 수준에 머물고 있으며 노동부가 앞장서서 동일노동 동일임금제에 반대하는 것은 노동자들 사이의 불평등을 심화시킨 일차적 책임이 정부의 무능과 위선에 있음을 확인시켜준다.
3) "노동조합은 너무 힘이 세다"는 이데올로기:
노동조합 조직율은 12%에 불과하고 미조직 사업장은 단체협약 혜택도 받지 못하며, 노동계급 정당이 의회에도 진출하지 못하고 있는데 한국의 노동조합이 힘이 세다고 할 수 있는가? 노동조합의 힘이 센 나라에서 세계 최장시간 노동과 최고율의 중대재해를 기록할 수 있는가? 매년 1800건 정도의 부당노동행위와 5-6천 건의 부당해고가 횡행하고 있는 나라가 노동조합이 힘이 센 나라인가? 노동현장에 대한 경찰력 투입, 노동조합 간부와 노동자들의 노조활동 및 쟁의활동 관련 구속, 손해배상 소송과 가압류로 노조활동을 탄압하고 노동자들의 가정을 파괴함에 있어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데, 노동조합이 힘이 세다는 말인가? 노동조합이 힘이 있다면 과거에 비하여 국가와 자본의 일방적 지배를 맹목적으로 수용하지 않고 저항하는 저지력을 지니고 있는 정도에 불과한데, 노동조합과 노동자들의 자기보호도 부정한다면 정권과 자본이 지향하는 사회는 노예제 사회인가? 세계에서 노동조합 활동이 가장 극심하게 탄압받고 있는 나라임이 분명하지만 정권과 자본이 이러한 이데올로기를 퍼뜨리는 것은 노동조합을 더욱더 무력화시키는 한편 국가와 재벌의 일방적 지배라는 객관적 사실을 호도하기 위한 것이다. 실제 금년의 한 여론조사에서 시민들의 92.5%가 한국에서 "우리나라 재벌들은 지나치게 힘이 세다"고 응답하였다는 사실은 정권 이데올로기의 허구성을 반영하는 것이다.
<표> 연도별 파업빈도, 부당노동행위 및 부당해고 신고 건수(매년 12월말 누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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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 도 // 파업빈도 / 부당해고 / 부당노동행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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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 // 78 / - / -
1998 // 129 / 4465 / 988
1999 // 198 / 4839 / 1075*
2000 // 250 / 4843 / 1285
2001 // 234 / 6117 / 1830
2002 // 321 / 5348 / 1787
2003 // 290* / 4066* / 1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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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 중앙노동위원회, 노동부, 노동연구원.
* 주: 2003년 수치들은 9월말 기준, 1999년 부당노동행위는 10월 말기준.
4) "노동자가 경영에 참여하면 안된다"는 이데올로기:
기업의 경영실패는 노동조합이 다년간 축적해온 임금인상과 노동조건 개선의 성과를 일시에 물거품으로 만든다. 기업의 불투명한 경영, 소유주의 절대적 권력, 소유와 경영의 세습, 잘못된 투자계획, 무리한 확장, 기술투자의 기피, 기업자금 횡령, 불법 정치자금 헌납 등은 한국 기업들의 오래된 관행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기업 경영진도, 감사도, 은행도, 주식시장도, 경제부서도, 세무당국도 이를 포착·저지하지 않았으며, 그 결과가 1997-98년 경제위기로서 국민 모두에게 재앙을 가져다 주었다. 경제위기를 치르고서도 기업들의 행태는 변화하지 않았으며, 사외이사나 사외감사 제도를 도입한 기업들에서도 수백억의 정치자금이 갈취되며 기업의 재정을 위태롭게 만들고 있었는데 아무도 이를 포착·고발하지 못했다. 이들은 모두 기업이 파산해도 물질적 생존에 전혀 위협을 받지 않는 자들이다. 그래서 기업의 사활에 운명을 같이하는 내부감시자가 필요하며 그것이 노동자·노동조합이다. 일반국민들의 절대다수인 72.5%가 "근로자가 경영에 참가하는 것이 좋다"고 보고 있지만 정권과 재벌만이 그 필요성을 부인하고 있는 것이다.
5) "노동운동은 서민들의 삶의 조건 향상을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는 이데올로기:
서민들의 주택과 복지문제, 소득불평등 문제 해결을 위해 노동조합이 노력하지 않는다고 비판하고 있으나, 이러한 문제영역들은 정부가 책임을 맡은 부분이며 정부의 무능과 의지부족으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민주노조들은 90년대 초반부터 이미 세제개혁, 의료보험 및 국민연금제도 개혁 등을 요구하며 "사회개혁투쟁"을 전개해오고 있으나, 정권은 사업장을 넘어서는 쟁점의 투쟁은 불법으로 규정해 왔다. 노정권은 노동조합이 임금과 노동조건 개선만을 위해 투쟁하고 사회문제에도 관심을 가지라고 주문하고 있으나, 국가는 노동조합이 사회개혁을 요구하면 불법으로 규정하고, 노동조합이 임금과 노동조건 개선을 요구하며 투쟁하면 집단이기주의로 매도해 왔다. 정부는 말바꾸기를 계속해 왔으나 일관된 정책방향은 노동조합의 조직과 동원 활동에 대한 억압이었다.
IV. "죽음"의 정치와 "희망"의 정치
"죽음"의 정치 프로젝트는 정권, 재벌, 보수언론이 주도하여 노동기본권을 제약하고 노동조합을 무력화시켜 노동계급에 대한 국가와 자본의 일방적 지배를 확립하고, 노동계급을 일반 시민과 시민사회 세력들로부터 고립시키고, 노동계급 자체를 조직 노동자와 미조직 노동자, 정규직과 비정규직 노동자, 대기업과 중소사업장 노동자로 분열시키며, 조직노동 부문도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을 분열시켜 분할지배하는 것이다. "죽음"의 정치 프로젝트는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고, 노조간부들의 죽음은 과잉성공에 대한 훈장에 불과하다.
노동자들의 삶의 조건이 악화되고 노동조합이 수세에 몰리기 시작한 것은 경제위기에 편승하여 김대중정권이 신자유주의 경제정책과 노동의 유연화를 공세적으로 전개하면서부터였다. 김대중정권이 한편으로 보수 지역패권주의와 싸우고 남북관계 개선 등 부분적으로 개혁성의 성과를 거두고 있을 때도 노동자-노동조합에 대해서는 일방적 지배와 억압으로 일관했다. 지역주의 대 탈지역주의, 냉전 대 통일 세력의 대립 구도는 일면 현실을 반영하기도 하였으나 언론, 보수정당들과 시민사회 세력들에 의해 과장된 측면도 있으며, 결과적으로 국가와 자본의 신자유주의 공세와 노동의 대응 구도는 가려지게 되었다. 김정권에서 노정권으로 이어지는 국가, 재벌, 보수언론의 노동자·노동조합 죽이기는 노동운동의 고립화와 함께 성공적으로 전개되었다.
고용불안정과 노동조건 악화에 맡겨진 노동자들은 자본과의 교섭도, 국가의 개입도 기대할 수 없는 여건 속에서 노동조합에 대한 요구를 가중하게 되었고, 노동조합 지도부는 정권의 집요한 탄압과 손해배상소송과 가압류 등 물질적 폭력 앞에 투쟁도 힘차게 조직할 수 없었고 투쟁은 성과를 내기도 어려웠다. "죽음"의 정치가 이렇게 오랫동안 준비·진행되고 있었지만 여전히 노동조합은 고립을 벗어나지 못했다. 결국, 노조간부들의 책임감과 무력감은 자살을 부른 것이며,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는 점에서 시민사회 세력들은 "죽음"의 정치에서 조연 혹은 방관자의 역할을 맡았었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노동조합과 연대세력은 "죽음"의 정치에 저항할 수는 있으나, 홀로 "희망"의 정치를 세울 수는 없다. "희망"의 정치를 복원하기 위해서는 국가가 앞장서야 하며, 그것이 참된 "사회통합적 노사관계"를 수립하는 길이다.
먼저, 손해배상 소송과 가압류의 대상을 제한하고 절차를 엄격하게 하여 정상적인 노동조합 활동과 쟁의권을 제약하지 않도록 하고, 공공부문부터 앞장서서 손해배상과 가압류 청구를 취하하도록 하여 정상적 노동조합 활동을 가능하게 하고 "희망"의 정치를 지향한다는 신호를 노동자들에게 보내주어야 한다.
국제기준에 맞도록 노동기본권 보장을 확대해야 한다. 노동기본권을 보장하는 것은 노동시장 약자를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서, 사회의 진보를 의미하는 것이지 "주고받기"의 대상이 아니다. 참정권이 확대될 때 여성과 서민들에게 시민권 양보를 요구하지 않은 것은 시민으로서의 기본권을 찾아주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또한 쟁의행위는 범죄행위가 아니라 민주시민으로서 노동자들이 갖는 권리행사라는 점을 인정하고 쟁의행위를 직·간접적으로 억압하는 각종 조치들을 삼가야 한다.
노동자간 임금 및 노동조건 격차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동일노동 동일임금 원칙을 수립하여 비정규직에 대한 차별을 없애고, 비정규직의 노조조직 자유를 보장하는 한편 산별교섭을 촉진하여 미조직 사업장에도 산별협약을 적용토록 하고, 비정규직 비율을 낮추는 사업장들에 대해 세제혜택 등 각종 지원정책을 펼쳐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규모를 감축시켜 나가야 한다.
노동조합을 실질적 동반자로 인정하여 기업수준의 경영참여, 산업 및 전체 경제 수준의 정책참여를 제도화하여 노동조합과 노동자들이 기업, 산업, 경제의 성과와 어려움을 공유토록해야 한다. 또한 공공부문부터 노동조합과 함께 산업발전 방향을 모색하고 구조조정의 필요성 여부 및 그 내용과 절차를 협의하는 참여와 협력에 기초한 노사관계의 모범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것이 노·사간, 노·정간 신뢰를 쌓아서 사회통합을 이루고 경제적 효율성도 확보하는 길이다.
사회통합적 노사관계는 "사회통합적" 경제정책 없이는 불가능하다. 빈부격차 해소, 재벌개혁, 정경유착 근절 등 대선공약을 이행하고 이윤보다 공익을 우선시하는 것이 그 첫걸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주)
1) 전체 피고용자 가운데 비정규직의 비율은 1997년에는 45.7%였으나 1999년에는 51.6%로 크게 증가하여 경제위기 초기에 비정규직 비율이 크게 증가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2002년 현재 비정규직 비율은 51.6%로 경제가 회복됨에도 불구하고 비정규직 비율이 감소되지 않고 있는 것은 비정규직 비율 급증이 경제위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김대중정권의 노동의 유연화에서 비롯되었음을 의미하며, 노무현정권이 노동의 유연화 정책을 지속하는 한 비정규직 비율은 꾸준히 증대될 것이다. 또한, 정규직 비율이 상대적으로 낮은 제조업의 고용규모가 위축되는 반면 비정규직의 비율이 전체산업 평균을 훨씬 상회하는 서비스산업 부분이 팽창하고 있어, 비정규직 감축을 위한 국가의 정책적 개입이 없으면 비정규직 비율이 높아지리라는 것은 자명하다.
2) 9월말까지 파업누계는 2003년 290건으로서 2002년의 264건에 비해 10% 정도 많으나, 노무현정권의 노동정책이 강경대응으로 전환하던 시점이 6월 하순이었다는 점을 고려하여 6월 말까지 파업누계를 보면, 2003년은 118건으로 2002년의 207건의 절반 수준에 불과하다.
3) 철도노조와의 4.20 합의, 화물연대와의 5.14 합의, 전교조의 항의와 국가인권위원회의 권고에 따른 5.26 NEIS 3개영역 전면 재검토 발표는 과거정권들과 차별되는 대화와 협의를 중시하는 "희망"의 정치 가능성을 확인시켜주었다.
4) 김유선(2003)의 한국과 미국 노동자들의 고용변동성 비교연구에 따르면 한국 노동자들의 고용변동성이 미국에 비해 4배나 높은 것으로 나타났으며, 이같이 고용변동성으로 측정한 노동의 유연성은 정규직과 비정규직 모두 미국에 비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관련기사>
참여정부의 ‘죽음의 정치’ 부추기는 이데올로기
최근 노동자들의 잇따른 자살과 관련해 참여정부의 노동정책은 다섯 가지의 이데올로기가 부추기는 ‘죽음의 정치’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가톨릭대학교 사회학부 조돈문 교수는 4일 오전 서울 을지로 국가인권위원회 배움터에서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 등의 주최로 열린 ‘노동자 자결 사태와 대책’ 토론회를 통해 이같은 의견을 발표했다.
조 교수는 먼저 "노태우 정권도 출범 뒤 공안정국으로 전환하는데 14개월이나 걸렸지만, 노무현 정권의 경우는 ‘신’공안정국으로 전환하는데 불과 4달 밖에 걸리지 않았다"고 말문을 열었다.
조 교수는 "즉 대선공약과 국정비전에 포함됐던 친노동적, 진보적 약속들이 4달도 안돼 파기됐다"며 "지금은 군사독재정권 때부터 노동자들에게 너무도 익숙한 ‘죽음의 정치’가 진행 중이다"고 설명했다.
이어 "‘죽음의 정치’는 원래 저항하는 노동자들과 노동조합에게 이데올로기 공세를 펼치며 노동자들을 고립시키고 자신을 정당화하는 법이다"며 참여정부가 사용하는 다섯 가지의 이데올로기를 들었다.
조 교수에 따르면 참여정부는 ‘노동시장 유연화는 더 진전돼야 한다’, ‘노동자간 임금격차는 대기업 노동자 이기주의 때문이다’는 이데올로기를 이용해 '죽음의 정치'를 펼치고 있다.
또 이를 위해 ‘노조는 힘이 너무 세다’, ‘노동자가 경영에 참여하면 안 된다’, ‘노동운동은 서민들의 삶의 조건 향상을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는 이데올로기 역시 동원하고 있다.
조 교수는 그러나 "한국의 노동시장은 이미 비정규직 비율이 50%를 넘을 정도이고 한국은 서구의 비정규직 가사노동 등과는 달리 비자발적 기간제 근로의 비율이 높아 그 폐해가 심각하다"고 반박했다.
특히 "대기업과 중소기업 노동자 간에 임금격차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중소기업과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임금을 올려 소득불평들을 해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한국의 노조 조직율이 12%에 불과하고 노조 미조직 사업장은 단체협약 혜택도 받지 못하며 노동계급 정당이 의회에도 진출하지 못하고 있는데 노조의 힘이 세다고 할 수 있느냐"고 반문했다.
아울러 기업에는 노동자와 노조같이 운명을 같이하는 내부감시자가 필요하다는 점과 서민들의 삶의 조건을 향상시키는 것은 노동운동이 비판하듯 정권의 몫이라는 점도 지적했다.
조 교수는 끝으로 "사회통합은 ‘사회통합적’ 경제정책 없이는 불가능하다"며 "참여정부가 빈부격차 해소, 재벌개혁, 정경유착 근절 등 대선공약을 이행하고 이윤보다 공익을 우선해야 한다"고 당부했다.〈뉴시스>
< 발표문 >
노무현정권과 노동자: "희망"의 정치, "죽음"의 정치.
조돈문(가톨릭대 사회학, 2003.11.5 chodon@catholic.ac.kr)
<대통령 선거하던 날 어느 초등학생의 일기>
12월 19일 (목요일) 날씨 : 맑음
제목 : 대통령 선거일-우리에겐 기쁘지 않은 날
"오늘 드디어 대통령 선거일이다... 그런데 노동당(민주)의 권영길을 지지하고 계시던 아빠가 민주당의 노무현을 지지하자고 하신다. 이회창을 막기 위해선 강한 쪽을 지지해야 한다고... 엄마는 우셨다. 대통령도 자기 맘대로 못 찍는 나쁜 나라라고.... 결국 노무현을 찍으셨다. 나도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다. 결국은 노무현이 대통령이 되었다. 다른 사람은 기쁠지 몰라도 우린 기쁘지 않다."
(초등학교 2학년인 제 딸아이는 민주노동당 지지자입니다. 민노당의 저조한 득표율에 짜증을 내면서 선거방송을 끝까지 지켜보다가 방금 일기를 쓰고 잠들었습니다)
<김주익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 유서>
"조합원 동지들의 전면파업이 50일이 되었건만 회사는 교섭 한번 하지 않고 있다. 아예 이번 기회에 노동조합을 말살하고 노동조합에 협조적인 조합원의 씨를 말리려고 작심을 한 모양이다.
노동자가 한 사람의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목숨을 걸어야 하는 나라, 그런데도 자본가들과 썩어빠진 정치꾼들은 강성노조 때문에 나라가 망한다고 아우성이다.
1년 당기 순이익의 1.5배, 2.5배를 주주들에게 배상하는 경영진들, 그러면서 노동자들에게 회사가 어렵다고 임금동결을 강요하는 경영진들. 그토록 어렵다는 회사의 회장은 얼마인지도 알 수 없는 거액의 연봉에다 50억 원 정도의 배상금까지 챙겨가고 또 1년에 3천5백억원의 부채까지 갚는다고 한다. 이러한 회사에서 강요하는 임금동결을 어느 노동조합, 어느 조합원이 받아들이겠는가."
I. 노무현 정권 출범과 "희망"의 정치
대통령 후보 노무현은 많은 노동자들에게 고민을 안겨주었다. 민주노총 조합원 설문조사에 따르면 민주노총 조합원들은 권영길 후보에 비하여 노무현 후보에게 10% 정도 더 높은 지지를 보이며 조합원 절반 정도 노무현 후보에게 투표한 것으로 나타났다. 한편 같은 조사에서 민주노총 조합원들이 민주당에 비해 2.5배나 높게 민주노동당을 지지하고 있었다는 것은 민주노총 조합원들이 보수 후보의 당선을 저지하려는 전술적 선택을 하는 한편 노무현 후의 상대적으로 개혁적, 통일지향적, 친노동적인 성향에 일정정도 기대를 걸었던 것이다.
노후보가 대선공약으로 천명한 150대 핵심과제는 노동자들에게 많은 것을 약속하지도 않았고 대대적 사회구조 변혁도 포함하지 않았지만, 재벌개혁, 정경유착 근절, 비정규직 차별철폐, 노사화합과 사회통합, 빈부격차 해소 등의 약속은 과거 정권들과는 다른 사회진보를 기대하도록 만들었다. 대선승리 후 노무현 정권이 출범하면서 국정비전으로 천명한 "12대 국정과제"는 "사회통합적 노사관계"를 그 하나로 설정하여 노동관계법규들을 국제기준에 맞도록 개정하고, 신뢰에 기초한 중층적 협의·교섭 구조를 구축하고, 노사자치주의 원칙을 확립할 것을 천명하였다. 또한 노사자치주의 원칙에 따라 "노사분규에 대한 공권력 개입을 최소화하고 노사분규 관련 법위반자에 대한 불구속 수사관행을 확립"하는 한편, "평화적 쟁의행위에 대한 업무방해죄 적용을 신중히 하고, 노동사건에 대한 손해배상·가압류 청구의 남용을 방지하는 방안 강구"하고, "공공부문 구조조정 과정에 노동자들의 참여방안을 마련하고... 정부가 모범을 보이는 공공부문의 노사관계실현"한다는 구체적 정책내용도 제시하였다.
이러한 "사회통합적 노사관계" 정책방향은 배제와 탄압에 기초한 선행정권들의 노동정책에 비해 진일보한 것으로서 참여와 포용의 원칙에 기초해 있다는 점에서 노동자들에게 "희망"의 정치를 기대하게 하였다. 1997년 말 외환위기와 함께 시작된 경제위기 이후 노동자들의 삶의 조건들이 크게 악화되었다는 점에서 노동자들이 "희망"의 정치에 거는 기대는 그만큼 절실했던 것이었다.
경제위기 하에서 전개된 끝없는 구조조정과 정리해고는 대규모로 실업자들을 양산했고 생존자들에게도 평생직장의 개념과 회사에 대한 정체감을 앗아갔고, 여전히 세계 최장시간 노동과 산업재해 중대재해율에서 세계최고를 기록하며 노동조건은 열악함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신자유주의 경제정책 하에서 강력하게 추진된 "노동의 유연화"로 비정규직 노동자 비율은 크게 증가하였고[주1], 정규직 노동자와 동일한 직무를 수행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임금 및 각종 노동조건에서 차별대우를 받고 있고, 월차휴가 신청했다가 업체관리자로부터 칼침을 맞은 현대아산 하청노동자 사례에서 보듯이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노동조합 조직화가 되지 않아 노동기본권의 보호도 받지 못하고 있다. 또한 경제위기 하에서 소득불평등 정도는 크게 악화되었으나 경제적 여건이 회복되고 있는 상황 하에서도 악화된 소득불평등 정도는 경제위기 이전 수준으로 환원되지 않고 있다.
노무현정권 출범초기는 노조탄압에 저항하는 두산중공업 투쟁, 전교조의 NEIS 거부투쟁, 화물연대의 노동3권 인정 및 지입제 등 계약구조 개선 투쟁, 부산·대구·인천 지하철노조의 시민안전 연대파업, 철도노조의 4.20 합의 이행 요구 투쟁, 현대자동차 등 대기업의 단체교섭관련 투쟁, 민주노총 6.25 총파업 등 굵직한 노사분규들이 이어졌다. 정치적 기회구조가 우호적으로 변화되면 노동자들의 억압되었던 욕구와 권리의식이 노사분규의 분출로 표현되는 것은 우리 현대사에서 자주 반복되어 나타났던 일이다. 해방 직후, 4월 혁명 이후, 유신정권이후 서울의 봄 등 오랜 억압의 기간 뒤 잠깐 열렸던 정치적 공간 속에서 노사분규가 폭발하여 이전 10년 기간에 맞먹을 정도의 빈도를 보여주곤 했다. 재벌과 보수언론은 노사분규 양상을 부풀리며 호들갑을 떨었지만 실제 노무현 정권 출범 후 반년간의 노사분규 빈도는 김대중정권 마지막해인 2002년의 같은 기간과 거의 비슷한 수준에 불과했다.[주2] 다만 김대중정권 시기의 노사분규와 다른 점이 있었다면 노정권 초기 노동자 투쟁은 일정한 정도 "희망"의 정치에 대한 기대감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뿐이다.
두산중공업, 화물연대, 전교조, 철도노조 등의 투쟁 과정에서 정부는 노동조합의 비판을 진지하게 검토하여 철도민영화와 교육행정시스템 정보화라는 추진중인 정부정책도 유보하고 재고하기로 하였으며, 자본과 보수언론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노동부장관이 파업 절차의 불법성에도 불구하고 노동조합의 주장과 요구조건에 귀를 기울이며 직접 중재에 나서기도 하는 등 전향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주3] 노무현정권은 개방성과 인내심의 시험을 치르고 있었다. 노무현정권 출범 초기 몇 개월은 노동자들의 "희망"의 정치에 대한 기대가 터무니없는 것이 아니었음을 확인시켜 주었다.
II. 과거로의 회귀와 "죽음"의 정치.
노무현 정권의 개방성과 인내심은 오래 가지 않았다. 노정권의 "희망"의 정치 시도는 재벌과 보수언론의 공격 대상이 되었고, 대통령은 재벌, 보수언론, 보수야당 뿐 아니라 보수성향의 경제부처장관들과 관료들 등 기득권세력들에 포위되어 있는 것으로 보였다. 노대통령은 5월 12일 미국방문중 재벌대표들과의 간담회에서 "돌아가면 공의 절반을 (기업인들에게) 돌려주겠다"고 약속하였고, 미국방문을 계기로 노무현정권과 재벌과의 관계는 화해무드로 접어들게 되었다. 재벌대표들은 정권초기에 부분적으로 보였던 친노조적 성향에 대한 우려를 많이 해소하게 되었고, 노대통령은 기득권세력의 중심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노무현대통령은 6월 들어 조흥은행 노조 파업과 철도노조 파업 등 파업투쟁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단호하게 대처할 것을 엄명하였다. 철도공사화와 NEIS 관련 합의사항은 파기되었고, 정부의 철도민영화와 교육행정시스템 정보화정책은 다시 원래대로 추진되기 시작했다. 또한 철도노조 파업에 대해 정부는 공권력을 투입하고 파업투쟁의 핵심을 무더기로 징계하고 97억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도 제기하였다. 정부가 앞장서서 노사자치주의 원칙을 뒤집으면서 생산현장은 공권력 투입, 대량 구속, 가공할 액수의 손해배상 소송과 가압류 청구로 이어졌다. 노정권은 출범 8개월만에 132명을 구속하여 1년 단위로 환산하면 198명 수준으로, 사흘에 한명꼴로 구속한 김영삼정권(연평균 126명)과 이틀에 한명꼴로 구속한 김대중정권(연평균 178명)보다도 높은 수치이다. 손해배상소송과 가압류 청구액수는 10월 20일 현재 46개 사업장을 대상으로 1351억원이 청구되어, 해당 사업장 당 평균 30억원 규모에 달한다. 노정권의 "신"공안정국은 출범후 불과 4개월 만에 시작되었고, 이는 군사쿠데타의 주역이었던 노태우 정권이 출범하고 공안정국으로 전환하는데 14개월이 걸렸다는 점을 고려하면 노정권의 신속한 변신은 놀랄만하다.
기간산업 사유화를 유보하고 공공부문 구조조정에 노동자들이 참여하는 방안을 마련하겠다던 출범전의 약속은 파기되고, 철도공사화는 "협상 대상이 아니라 정부정책"이라며 노동조합과 노동자들을 배제하고 일방적으로 강행하고 있다. 비정규직 노동자의 임금 및 근로조건 차별을 철폐하겠다던 출범전의 약속은 파기되고, 동일노동 동일임금을 추진하지 않고, 근로시간 단축도 중소사업장에서의 시행은 공공부문과 대기업보다 7년이나 늦은 2011년으로 미루어 중소사업장·비정규직 노동자들과 대기업·정규직 노동자들과의 노동조건 격차를 더욱 악화시키는 한편 연 15일 유급휴가 사용의 조건을 1년의 8할 이상 출근으로 한정함으로써 기간제근로자들을 배제함으로써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별을 더욱 심화시키고 있다. 노사분규 공권력 개입 최소화, 노사분규 관련법 위반자 불구속 수사 원칙, 손해배상 및 가압류 청구 남용방지 등 출범전 약속은 파기되고, 정부가 앞장서서 철도노조에 공권력 투입, 대량해고 및 징계,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함으로써 사적부문에 포용과 통합의 모범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노동조합 탄압과 노동기본권 억압에 앞장서고 있다. 또한 재벌과 정계의 정경유착을 근절하고 재벌개혁을 추진하겠다던 출범전의 약속은 흐지부지되고, 정경유착 근절과 재벌개혁을 약속하던 대선과정에서 이미 엄청난 액수의 정치자금을 재벌기업들로부터 받은 것으로 드러나고 있어, 재벌체제 변혁에는 관심이 없고 "기업하기 좋은 나라" 만들기를 절대절명의 과제로 삼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게 하였다.
결국 대선공약과 국정비전에 포함되었던 친노동적, 진보적 약속들은 4개월을 견디지 못하고 파기된 것이다. 지난 8월 노동조건 개악을 수반하는 근로시간 단축법이 통과되자 양대노총은 투쟁을 선언했으나 재벌들은 노정권에 갈채를 보냈고, 법적 근거도 없는 사용자 대항권을 세우기 위한 로드맵을 발표하자 양대노총은 노정권을 규탄했으나 재벌들은 환호했다. 이제 재벌들은 초기에 의심했던 노정권의 친노동자적 성향에 대한 우려를 말끔히 씼고 다시 태어난 "친재벌" 대통령에 안도하게 되었다. 노동자들이 기대했던 "희망"의 정치는 불과 4개월만에 짧은 시행착오와 더불어 마감되었고, 군사독재정권 시기부터 노동자들에게 너무도 익숙한 "죽음"의 정치가 다시 시작된 것이다.
III. "죽음"의 정치 이데올로기 다섯 가지.
"죽음"의 정치는 저항하는 노동자들과 노동조합들에 대해 이데올로기적 공세를 펼치며 노동조합을 무력화시키고 시민사회로부터 고립시키는 한편 스스로를 정당화한다.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조작이 펼쳐지는 한 "죽음"의 정치는 계속될 것이고 "사회통합"은 파괴될 것이다.
1) "노동시장 유연화는 더욱 진전되어야 한다"는 이데올로기:
이는 한국 노동시장이 경직되었다는 전제에 입각하고 있으나, 한국노동시장은 대단히 유연성이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비정규직 비율이 통계계산법에 따라 52-58%에 달하고 있으며, 서구의 비정규직은 가사노동 혹은 여가생활 등 다른 활동과의 병행을 위하여 자발적으로 선택한 단시간근로가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반면 한국의 경우 자발적 단시간근로의 경우는 적고 정규직과 동일한 직무를 수행하면서도 임금 및 노동조건에서만 차별대우를 받는 비자발적 기간제근로와 간접고용유형의 비율이 높아서 비정규직의 폐해가 훨씬더 심각하다. 또한 경기변동에 따른 고용변동성에 있어서도 고용유연성이 높은 것으로 알려진 미국보다도 훨씬 더 높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주4]
2) "노동자간 임금격차는 대기업 노동자 이기주의때문이다"는 이데올로기:
세금도 내지 않고 기업으로부터 거액의 불법 정치비자금을 받은 대통령후보들과 정치인들에 대해서는 관대하면서 정당하게 소득세도 부담하며 근로에 대한 대가로 임금을 받는 대기업 노동자들을 매도하는 것은 정권의 도덕성 실종을 보여준다. 대기업-중소기업, 정규직-비정규직 노동자들 사이의 임금격차가 심각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들은 여전히 근로소득 기준 하위 40% 속에서의 격차에 불과하다. 따라서 대기업·정규직 노동자들의 임금수준 하락은 전체국민 사이의 소득불평등을 더욱 심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점에서 중소기업과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임금수준을 상향조정하는 것만이 대선공약에서 약속한 소득불평등 축소와 중산층 70%의 사회를 실현할 수 있다. 또한 고용보험, 건강보험, 국민연금 등 주요 사회보험의 비정규직 노동자 적용율은 여전히 20-25% 수준에 머물고 있으며 노동부가 앞장서서 동일노동 동일임금제에 반대하는 것은 노동자들 사이의 불평등을 심화시킨 일차적 책임이 정부의 무능과 위선에 있음을 확인시켜준다.
3) "노동조합은 너무 힘이 세다"는 이데올로기:
노동조합 조직율은 12%에 불과하고 미조직 사업장은 단체협약 혜택도 받지 못하며, 노동계급 정당이 의회에도 진출하지 못하고 있는데 한국의 노동조합이 힘이 세다고 할 수 있는가? 노동조합의 힘이 센 나라에서 세계 최장시간 노동과 최고율의 중대재해를 기록할 수 있는가? 매년 1800건 정도의 부당노동행위와 5-6천 건의 부당해고가 횡행하고 있는 나라가 노동조합이 힘이 센 나라인가? 노동현장에 대한 경찰력 투입, 노동조합 간부와 노동자들의 노조활동 및 쟁의활동 관련 구속, 손해배상 소송과 가압류로 노조활동을 탄압하고 노동자들의 가정을 파괴함에 있어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데, 노동조합이 힘이 세다는 말인가? 노동조합이 힘이 있다면 과거에 비하여 국가와 자본의 일방적 지배를 맹목적으로 수용하지 않고 저항하는 저지력을 지니고 있는 정도에 불과한데, 노동조합과 노동자들의 자기보호도 부정한다면 정권과 자본이 지향하는 사회는 노예제 사회인가? 세계에서 노동조합 활동이 가장 극심하게 탄압받고 있는 나라임이 분명하지만 정권과 자본이 이러한 이데올로기를 퍼뜨리는 것은 노동조합을 더욱더 무력화시키는 한편 국가와 재벌의 일방적 지배라는 객관적 사실을 호도하기 위한 것이다. 실제 금년의 한 여론조사에서 시민들의 92.5%가 한국에서 "우리나라 재벌들은 지나치게 힘이 세다"고 응답하였다는 사실은 정권 이데올로기의 허구성을 반영하는 것이다.
<표> 연도별 파업빈도, 부당노동행위 및 부당해고 신고 건수(매년 12월말 누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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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 도 // 파업빈도 / 부당해고 / 부당노동행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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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 // 78 / - / -
1998 // 129 / 4465 / 988
1999 // 198 / 4839 / 1075*
2000 // 250 / 4843 / 1285
2001 // 234 / 6117 / 1830
2002 // 321 / 5348 / 1787
2003 // 290* / 4066* / 1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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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 중앙노동위원회, 노동부, 노동연구원.
* 주: 2003년 수치들은 9월말 기준, 1999년 부당노동행위는 10월 말기준.
4) "노동자가 경영에 참여하면 안된다"는 이데올로기:
기업의 경영실패는 노동조합이 다년간 축적해온 임금인상과 노동조건 개선의 성과를 일시에 물거품으로 만든다. 기업의 불투명한 경영, 소유주의 절대적 권력, 소유와 경영의 세습, 잘못된 투자계획, 무리한 확장, 기술투자의 기피, 기업자금 횡령, 불법 정치자금 헌납 등은 한국 기업들의 오래된 관행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기업 경영진도, 감사도, 은행도, 주식시장도, 경제부서도, 세무당국도 이를 포착·저지하지 않았으며, 그 결과가 1997-98년 경제위기로서 국민 모두에게 재앙을 가져다 주었다. 경제위기를 치르고서도 기업들의 행태는 변화하지 않았으며, 사외이사나 사외감사 제도를 도입한 기업들에서도 수백억의 정치자금이 갈취되며 기업의 재정을 위태롭게 만들고 있었는데 아무도 이를 포착·고발하지 못했다. 이들은 모두 기업이 파산해도 물질적 생존에 전혀 위협을 받지 않는 자들이다. 그래서 기업의 사활에 운명을 같이하는 내부감시자가 필요하며 그것이 노동자·노동조합이다. 일반국민들의 절대다수인 72.5%가 "근로자가 경영에 참가하는 것이 좋다"고 보고 있지만 정권과 재벌만이 그 필요성을 부인하고 있는 것이다.
5) "노동운동은 서민들의 삶의 조건 향상을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는 이데올로기:
서민들의 주택과 복지문제, 소득불평등 문제 해결을 위해 노동조합이 노력하지 않는다고 비판하고 있으나, 이러한 문제영역들은 정부가 책임을 맡은 부분이며 정부의 무능과 의지부족으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민주노조들은 90년대 초반부터 이미 세제개혁, 의료보험 및 국민연금제도 개혁 등을 요구하며 "사회개혁투쟁"을 전개해오고 있으나, 정권은 사업장을 넘어서는 쟁점의 투쟁은 불법으로 규정해 왔다. 노정권은 노동조합이 임금과 노동조건 개선만을 위해 투쟁하고 사회문제에도 관심을 가지라고 주문하고 있으나, 국가는 노동조합이 사회개혁을 요구하면 불법으로 규정하고, 노동조합이 임금과 노동조건 개선을 요구하며 투쟁하면 집단이기주의로 매도해 왔다. 정부는 말바꾸기를 계속해 왔으나 일관된 정책방향은 노동조합의 조직과 동원 활동에 대한 억압이었다.
IV. "죽음"의 정치와 "희망"의 정치
"죽음"의 정치 프로젝트는 정권, 재벌, 보수언론이 주도하여 노동기본권을 제약하고 노동조합을 무력화시켜 노동계급에 대한 국가와 자본의 일방적 지배를 확립하고, 노동계급을 일반 시민과 시민사회 세력들로부터 고립시키고, 노동계급 자체를 조직 노동자와 미조직 노동자, 정규직과 비정규직 노동자, 대기업과 중소사업장 노동자로 분열시키며, 조직노동 부문도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을 분열시켜 분할지배하는 것이다. "죽음"의 정치 프로젝트는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고, 노조간부들의 죽음은 과잉성공에 대한 훈장에 불과하다.
노동자들의 삶의 조건이 악화되고 노동조합이 수세에 몰리기 시작한 것은 경제위기에 편승하여 김대중정권이 신자유주의 경제정책과 노동의 유연화를 공세적으로 전개하면서부터였다. 김대중정권이 한편으로 보수 지역패권주의와 싸우고 남북관계 개선 등 부분적으로 개혁성의 성과를 거두고 있을 때도 노동자-노동조합에 대해서는 일방적 지배와 억압으로 일관했다. 지역주의 대 탈지역주의, 냉전 대 통일 세력의 대립 구도는 일면 현실을 반영하기도 하였으나 언론, 보수정당들과 시민사회 세력들에 의해 과장된 측면도 있으며, 결과적으로 국가와 자본의 신자유주의 공세와 노동의 대응 구도는 가려지게 되었다. 김정권에서 노정권으로 이어지는 국가, 재벌, 보수언론의 노동자·노동조합 죽이기는 노동운동의 고립화와 함께 성공적으로 전개되었다.
고용불안정과 노동조건 악화에 맡겨진 노동자들은 자본과의 교섭도, 국가의 개입도 기대할 수 없는 여건 속에서 노동조합에 대한 요구를 가중하게 되었고, 노동조합 지도부는 정권의 집요한 탄압과 손해배상소송과 가압류 등 물질적 폭력 앞에 투쟁도 힘차게 조직할 수 없었고 투쟁은 성과를 내기도 어려웠다. "죽음"의 정치가 이렇게 오랫동안 준비·진행되고 있었지만 여전히 노동조합은 고립을 벗어나지 못했다. 결국, 노조간부들의 책임감과 무력감은 자살을 부른 것이며,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는 점에서 시민사회 세력들은 "죽음"의 정치에서 조연 혹은 방관자의 역할을 맡았었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노동조합과 연대세력은 "죽음"의 정치에 저항할 수는 있으나, 홀로 "희망"의 정치를 세울 수는 없다. "희망"의 정치를 복원하기 위해서는 국가가 앞장서야 하며, 그것이 참된 "사회통합적 노사관계"를 수립하는 길이다.
먼저, 손해배상 소송과 가압류의 대상을 제한하고 절차를 엄격하게 하여 정상적인 노동조합 활동과 쟁의권을 제약하지 않도록 하고, 공공부문부터 앞장서서 손해배상과 가압류 청구를 취하하도록 하여 정상적 노동조합 활동을 가능하게 하고 "희망"의 정치를 지향한다는 신호를 노동자들에게 보내주어야 한다.
국제기준에 맞도록 노동기본권 보장을 확대해야 한다. 노동기본권을 보장하는 것은 노동시장 약자를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서, 사회의 진보를 의미하는 것이지 "주고받기"의 대상이 아니다. 참정권이 확대될 때 여성과 서민들에게 시민권 양보를 요구하지 않은 것은 시민으로서의 기본권을 찾아주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또한 쟁의행위는 범죄행위가 아니라 민주시민으로서 노동자들이 갖는 권리행사라는 점을 인정하고 쟁의행위를 직·간접적으로 억압하는 각종 조치들을 삼가야 한다.
노동자간 임금 및 노동조건 격차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동일노동 동일임금 원칙을 수립하여 비정규직에 대한 차별을 없애고, 비정규직의 노조조직 자유를 보장하는 한편 산별교섭을 촉진하여 미조직 사업장에도 산별협약을 적용토록 하고, 비정규직 비율을 낮추는 사업장들에 대해 세제혜택 등 각종 지원정책을 펼쳐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규모를 감축시켜 나가야 한다.
노동조합을 실질적 동반자로 인정하여 기업수준의 경영참여, 산업 및 전체 경제 수준의 정책참여를 제도화하여 노동조합과 노동자들이 기업, 산업, 경제의 성과와 어려움을 공유토록해야 한다. 또한 공공부문부터 노동조합과 함께 산업발전 방향을 모색하고 구조조정의 필요성 여부 및 그 내용과 절차를 협의하는 참여와 협력에 기초한 노사관계의 모범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것이 노·사간, 노·정간 신뢰를 쌓아서 사회통합을 이루고 경제적 효율성도 확보하는 길이다.
사회통합적 노사관계는 "사회통합적" 경제정책 없이는 불가능하다. 빈부격차 해소, 재벌개혁, 정경유착 근절 등 대선공약을 이행하고 이윤보다 공익을 우선시하는 것이 그 첫걸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주)
1) 전체 피고용자 가운데 비정규직의 비율은 1997년에는 45.7%였으나 1999년에는 51.6%로 크게 증가하여 경제위기 초기에 비정규직 비율이 크게 증가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2002년 현재 비정규직 비율은 51.6%로 경제가 회복됨에도 불구하고 비정규직 비율이 감소되지 않고 있는 것은 비정규직 비율 급증이 경제위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김대중정권의 노동의 유연화에서 비롯되었음을 의미하며, 노무현정권이 노동의 유연화 정책을 지속하는 한 비정규직 비율은 꾸준히 증대될 것이다. 또한, 정규직 비율이 상대적으로 낮은 제조업의 고용규모가 위축되는 반면 비정규직의 비율이 전체산업 평균을 훨씬 상회하는 서비스산업 부분이 팽창하고 있어, 비정규직 감축을 위한 국가의 정책적 개입이 없으면 비정규직 비율이 높아지리라는 것은 자명하다.
2) 9월말까지 파업누계는 2003년 290건으로서 2002년의 264건에 비해 10% 정도 많으나, 노무현정권의 노동정책이 강경대응으로 전환하던 시점이 6월 하순이었다는 점을 고려하여 6월 말까지 파업누계를 보면, 2003년은 118건으로 2002년의 207건의 절반 수준에 불과하다.
3) 철도노조와의 4.20 합의, 화물연대와의 5.14 합의, 전교조의 항의와 국가인권위원회의 권고에 따른 5.26 NEIS 3개영역 전면 재검토 발표는 과거정권들과 차별되는 대화와 협의를 중시하는 "희망"의 정치 가능성을 확인시켜주었다.
4) 김유선(2003)의 한국과 미국 노동자들의 고용변동성 비교연구에 따르면 한국 노동자들의 고용변동성이 미국에 비해 4배나 높은 것으로 나타났으며, 이같이 고용변동성으로 측정한 노동의 유연성은 정규직과 비정규직 모두 미국에 비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